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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칼럼] 정부에 ‘제도적 자제’가 필요하다

입력 2023-09-2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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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취소’와 ‘육군사관학교 홍범도장군 흉상 이전’ 관련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 중이다.

‘반일(反日)’인가 또는 ‘반공(反共)’인가 정체성 논란이다, 정체성 논란은 “항일 독립운동이 중요한가 또는 자유 수호 6·25 전쟁이 중요한가”의 인식의 차이에서 생겨났으며, “북한-중국-러시아 등 대륙으로 향해 나가야 하는가 대(對) 미국-일본 등 해양으로 향해 가야 하는가”라는 국가 발전모델 논쟁으로 확장됐다.

그리고 정체성과 인식 논쟁이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유럽의 ‘종교전쟁’과 흡사하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역사’ 논쟁에 역사학계가 두드러지게 나서지 않고 있는 점이다. 학계가 ‘빨치산의 정의’ 관련 공동 성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역사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다.

역사학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추측컨대 사회주의 좌파계열 역사학자들이 과거 좌파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과장 해놓은 ‘좌파 활동 기록’이 그대로 있어 그것이 도리어 부정할 수 없는 역사 기록으로 발목을 잡고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독립운동이 명명백백 자료로 뒷받침이 되면 역사학계가 의견을 제시하지 않을 리 없지만 홍범도 장군의 경우 사료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전승 관련 기록이 사료로 확실히 뒷받침되는 것이 아니라 구술(口述)에 의한 것이고, 그 과장된 구술을 자료의 뒷받침 없이 독립투쟁의 성과로 학술 논문에 서술해 놓았던 때문일 수도 있다.

본래 ‘국사(國史)’란 일정 정도 자민족 중심으로 과장됨이 있음을 전제로 하지만 우리 국사는 지나쳐 보였다. 학자들이 ‘세계사 속의 한국사’라는 세계사적 시각이 아니라 ‘자민족 국수주의(쇼비니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이 개입된 ‘역사 전쟁’에 역사학계가 사료를 바탕으로 정리해주어야 끝나는데 학계의 ‘비철저성‘과 ‘이념 편향성’ 때문에 논쟁이 종결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정율성과 홍범도의 항일운동의 성과와 공산주의 활동 관련 어떠한 검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분의 ‘마음의 조국’이 어딘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본인의 조국(祖國)은 소련과 중국에 가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괜스레 ‘항일건국 투사’로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소홀히 취급되어 아쉽다.

정율성은 19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전후(戰後)에는 북한에서 살았고, 1956년 중국에 귀화해 ‘정뤼성’으로 살다 죽은 분이다. 때문에 정율성의 ‘마음의 조국’이 중국이고 중국인으로 대부분을 살았고 또 중국에서 추앙하고 있는 분인데 그분을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역사 공원‘을 만들어 기린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정율성 본인조차도 중국이나 북한이 자신을 기리는 것은 환영하지만 대한민국이 자신을 기리고 기념하는 것은 반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

홍범도 장군도 ’마음의 조국‘ 부분에서 명확해 보인다. 홍범도 장군이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 참변‘ 후 재판위원을 맡아 볼셰비키 편에 섰으며 그 뒤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독립운동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아직 태평양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으로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무슨 ’조국 타령‘이냐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무장독립운동 기간보다 볼셰비키와 소련 공산당원으로서의 기간이 매우 길고 소련에서 ’공산당원‘으로 천수를 마쳤기 때문에 홍범도의 ’마음의 조국‘은 아무래도 ’볼셰비키 소련“에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분을 육사생도에게 모범으로 삼게 한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 한다. 상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수년 전 1946년 10월 개교한 북한 ’김일성대학‘ 교수 자리에 지원한 남한 학자들의 교수 임용 지원서류를 일별한 적이 있다. 지금의 교수 임용지원서와는 달리 학문적 업적이나 강의 경력보다 일제 하에서 자신이 얼마나 혁혁한 사회주의 활동을 했는지를 주로 서술했다 . ’김일성 대학‘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 자신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활동을 적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정율성과 홍범도의 공산당 입당 원서가 존재할 것이고 그 원서에 자신이 누구인지 기술한 ’공산당 입당의 변(辨)‘ 문서를 공개하면 이번 정체성 논쟁은 종결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김원봉을 독립군 출신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군인으로 이미지화 하려고 독립유공자로 세우려고 했다 . 하지만 김원봉은 ”독립군이었지만 북한 정권의 개국 공신으로 남한을 공격한 북한 장관을 지냈고 그 공로로 훈장도 받았다“ 점 때문에 여론의 반대로 실패했다. 김원봉 실패에 대안으로 홍범도가 등장했다.

이렇게 문 정부는 역사 왜곡이 지나쳐 ’정상적‘인 정책으로 보이지 않음에도 자제하지 않고 권력으로 강행했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가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에 반대하고 육군사관학교 교정의 홍범도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기겠다는 것은 전 정부에서 행해진 ‘비정상’의 ‘정상화’로 이해된다. 역사든 정치든 지나침은 반작용을 부르는 법이다.

스티븐 래비츠키와 다니엘 지블렛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였다”라고 회고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가드레일로 ‘상호관용’(mutual toleration)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라는 두 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상호관용’이란 정치적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행위이고, ‘제도적 자제’란 대통령 등 권력자가 주어진 권리를 행사할 때 ‘판사를 자기 사람으로만 임명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등 스스로 자제를 하는 것을 말한다. 관용과 절제가 민주주의가 탈선하지 않게 지키는 ‘가드레일’의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대법원장 임명 등 많은 사법부 인사 임명에서 그리고 소득주도 성장이나 탈원전, 규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 등은 ‘자제’ 없이 ‘과도하게’ 정부 권력으로 밀어붙였다. 또 정율성, 김원봉, 홍범도로 이어지는 국가유공자 재선정 시도와 공원 건립은 상식적이지도 또 절제되지도 않은 정부 정책으로 스스로 자제해야 했다 .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윤석열 정부 시기에 되돌리는 ‘정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나치지 않는 ‘제도적 자제’는 윤석열 정부도 ‘반면 교사’로 배워야 할 미덕(virtue)이다.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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