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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묵살당한 충정에도… 목숨 아깝지 않으리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⑨금산

입력 2021-08-31 07:00 | 신문게재 2021-08-3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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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
금산 칠백의총 전경. 사진=남민

 

옳은 일에는 목숨도 바친다 ‘살신성인(殺身成仁)’

 

子曰(자왈), 志士仁人(지사인인) 無求生以害仁(무구생이해인) 有殺身以成仁(유살신이성인)

공자께서 “뜻을 지닌 선비와 인(仁)을 지닌 사람은 자기 살고자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인을 이룬다”라고 하셨다.

 

 

◇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측한 조헌

공자는 “인(仁)이란 자신이 서고 싶은 자리에 남을 먼저 서게 하고, 자신이 뜻을 이루고 싶은 것에 남이 먼저 이루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까지 말했다.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는 상소를 무시하고 결국은 백성마저 버리고 도망친 선조 임금이지만, 그를 지키겠다며 온몸을 던졌던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대표적 인물이다.

임진왜란 발발 수년 전에 일본의 무장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일본 승려 겐소 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로 한양에 들어와 일본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다. 이때 일본의 간계를 눈치채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헌이다.

그는 청절왜사소(請絶倭使疎)를 써 관찰사 권징(權徵)에게 올려줄 것을 청했다. 일본에 사절을 보내 축하한다면 저들이 더욱 교만해져 군사를 일으켜 도적질할 것이니 사신들을 처형해 누구도 조선을 범할 수 없다는 위엄을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직접 한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상소를 받아본 선조는 조헌을 인요(人妖), 즉 상식을 벗어난 요망한 자로 치부했다. 그리고 사흘 안에 승정원에 내려보내야 할 소장을 내려보내지 않고 태워버렸다. 국정 기록물을 고의로 인멸한 것이다. 그리고는 사관에게 “차라리 내 허물을 크게 기록하여 후세를 경계하면 좋겠다”고 지시했다. 무능한 국왕의 극치였다.

 

금산 고경명 선생 비각
고경명 선생 비각. 사진=남민

 

2년 뒤 1589년 4월에 조헌은 도끼를 메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대궐 문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논시폐소(論時弊疎)’ 지부상소를 올렸다. 들어주지 않으면 도끼로 자신의 몸을 베어버리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조헌은 5월에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그해 11월에 풀려났지만 일본 사신이 다시 와 있다는 소식에 “속임수 술책에 동맹을 맺지 말라”고 거듭 요청했다. 조속히 변방에 문사를 뽑아 배치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조는 이번에도 “조헌은 간귀(奸鬼)다”라며 대로했다.

통신사 황윤길 일행이 일본 사신과 함께 돌아온 직후인 1591년 3월. 조헌은 백의 차림에 또다시 도끼를 메고 궁궐로 나아갔다. 도요토미가 사신을 보내 엿보게 하여 갑자기 출병할 계획을 세울 것이라며 ‘청참왜사1소(請斬倭使一疎)’를 올려 간언했다. 임진왜란 1년 1개월 전이었다. 사흘이 지나도 답이 없자 ‘청참왜사2소’를 올린다. 일본의 상륙 지점은 동남 해안(부산 일대)이며, 한양을 향하는 길목은 조령, 죽령, 추풍령일 것이라고 했다. 도요토미의 전략 그대로였다.

승정원은 이 소를 받지 않았다. 7월에도 조헌은 금산 군수 김현성(金玄成)에게 이듬해 봄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니 조정에 전문을 보내라 했지만 이 역시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묵살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모두 조헌의 예측대로 일어났다. 발발 시점과 부산으로의 상륙, 한양으로 진격하는 길목까지 정확히 들어맞았다.

조헌은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을까? 율곡 이이, 우계 성혼, 토정 이지함을 스승으로 모신 덕분에 대세를 읽는 시야를 가졌고, 천문에 밝아 별의 움직임으로 길흉화복을 내다볼 수 있었다. 도요토미를 정권 탈취 신하로 확신했고, 사신들이 오가는 것을 조선을 정탐하는 행위로 읽었다. 혹자는 말한다. “임진왜란 후에는 이순신이 있었고, 임진왜란 전에는 조헌이 있었다”라고.

 

금산 성곡서원 터
성곡서원 터. 역사적 유적지가 지금은 양봉터로 이용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사진=남민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왜군이 들이닥치면서 조선은 곧이어 초토화된다. 조헌을 요괴 취급하던 선조는 황급히 도망갔다. 그럼에도 조헌은 왕의 신변을 걱정했다. 관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기에 의병을 모아 왕을 지키려 했다. 조헌은 5월 중순 충청지역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켜 무장한 왜적에 농기구와 돌멩이로 맞서 보은 차령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어 청주성까지 탈환했다.

그러나 의병의 승전을 시샘한 지방관의 방해로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내부는 분열되어 갔다. 그럼에도 그는 “이달 안에 임금께서 환궁하게 하겠다”며 충성을 다짐했다. 하지만 곡창지대 호남의 관문인 금산성에 왜군이 대거 진입했다는 소식에 급히 금산으로 향한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협공을 요청하고 승병장 영규(靈圭) 대사까지 가세시켰으나 겨우 700명뿐. 왜군은 1만 5700명으로 중과부적이었다. 권율마저 ‘18일 전투 연기’ 전갈을 보내왔다. 그래도 호남평야의 곡식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8월 18일 새벽 연곤평 들판. 조총으로 무장한 왜적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화살로 맞선 의병들이 겁에 질릴 법도 했으나 조헌은 “오직 한 번의 죽음만 있을 뿐”이라며 ‘옳을 의(義)’ 자를 쓴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자고 독려했다. 단 한 명의 의병도 도망가지 않았고 들판은 피로 물들고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 조헌은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맞았다.

 

금산 조헌 선생을 모신 표충사
조헌 선생을 모신 표충사. 사진=남민

 

조헌은 원래 내외직 벼슬을 했던 문신이었다. 의병장 생활은 일생의 마지막 3개월이 전부였다. 그 석 달 동안 조헌은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었다. 자신의 청을 뿌리친 왕에게조차 신하로서 자신의 최후를 바침으로써 살신성인의 표상이 됐다. 700명의 의병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이탈없이 대항하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했다. 이들의 저항은 결국 왜군으로 하여금 호남 곡창지대를 포기하게 만든다.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나흘 후 달려와 시신들을 수습해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칭했다. 조헌을 ‘인요’라고 조롱했던 선조는 뒤늦게 1603년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를 세웠고, 1647년 유림들이 사당을 세워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 조헌과 이름 없는 ‘칠백의총’

 

금산 칠백의사 순의탑
금산 칠백의사 순의탑. 남민

 

조헌은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했다. 집 뒷산이 중봉산(重峯山)이라 호를 중봉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던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한다. 31세 땐 명나라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뽑혀 중국에 다녀오면서 조천일기(朝天日記)를 남겼다.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식견을 보인 것이다.

이순신도 모르게 이순신을 도운 일도 있다. 이순신이 발포(전남 고흥군) 만호(萬戶, 종4품) 시절에 전라 좌수사 이용의 미움을 받아 근무 성적이 최하위로 매겨졌는데 당시 전라도 도사였던 조헌이 바로 잡아 구제해 주었다. 월등한 이순신을 밉다고 깎아내릴 수 없다는 소신이었다.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통진 현감과 충청도 보은 현감을 지내던 때에 스승 율곡이 사망하자 당파싸움은 더욱 거셌고 그도 파직 당했다. 이때부터 세상을 등져 옥천 산림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됐고, 고종 때 문묘에 배향됐다.

칠백의사 사당은 현종 때인 1663년에 ‘종용사(從容祠)’라 사액해 토지를 하사하고 제사를 모셨다. ‘대의에 따라 의연하게 순절하신 분들을 모신 사당’이란 뜻이다.

경내 입구 쪽 비각 속의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는 왜란 직후 해평 부원군 윤근수가 글을 짓고 명필 김현성이 썼다. 일본 금산경찰서장 이시카와 마치오가 1940년에 폭파시켰는데 갑자기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몰아쳐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유림들이 조각난 비석을 모아 땅 속에 숨겨뒀다가 1970년대 성역화 때 붙여 순의비각에 보관 중이다. 종용사 뒤 ‘칠백의총’ 옆의 비는 일본인이 폭파한 비를 대신해 1963년 다시 만들었다.

조헌의 묘소는 제2의 고향인 옥천군에 모셨다. 훼손된 의총과 종용사는 군민 성금으로 정비해 지금에 이른다. 칠백의총 경내에는 순의비각과 기념관 등이 있다. 맞은 편에는 ‘칠백의사순의탑’이 있다. 칠백의총 입구에 세웠다가 연곤평이 내려다 보이는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금산의 명소

 

금산 송시열 글씨의 수심대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수심대. 사진=남민

 

중봉 관련 유적지로 복수면 곡남리의 수심대(水心臺)와 조헌사당(趙憲祠堂)인 표충사가 있다. 그가 후손들에게 살 곳으로 권했던 장소다. 수심대는 냇가에 마을이 3개로 나뉘어져 ‘마음 심(心)’ 자와 같다며 그가 이름 지었다. 바위 위 ‘수심대’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사당의 표충사 편액은 광해군이 1609년에 하사했다.

 

대둔산 아래 ‘금산이치대첩지’는 권율이 동복현감 황진과 1500여 명의 군사로 10배 이상 많은 일본군을 물리친 역사적 현장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호남평야다. 배나무가 많아 이치(梨峙)라 불렀다. 지금도 계곡에는 200~300년 된 키 큰 산돌배나무가 많다.

 

금산 이치대첩지
권율이 일본군을 대파한 역사적 현장 금산 이치대첩지. 사진=남민

 

금산은 인삼의 고장이다. 1500년 전 남이면 성곡리에서 처음 인삼을 재배했다는 개삼(開蔘)터가 있다. 그 주차장 너머 농지 사이 숲이 우거진 곳에는 성곡서원(星谷書院) 터가 있다. 조헌·고경명·김정·길재·윤택·김신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려 광해군 때 세운 서원이다. 훼철된 후 표지석만 한쪽에 방치되어 현재 양봉장으로 쓰이고 있어 안타깝다.

금산의 보석사(寶石寺)는 명성황후 원찰로 유명하다. 입구에 의병 승장비각이 있다. 승병장 기허(騎虛) 영규 대사가 수행했던 사찰이다. 맞은 편 산비탈에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1000년 넘은 매우 큰 은행나무가 사찰의 연륜을 말해준다. 

금산 적벽강
기암괴석에 단풍과 노을이 붉은 빛을 띠어 ‘적벽’이라 불린 금산 적벽강. 사진=남민

 

금성면 양전리에는 고경명 선생 비각이 있다. 영암군수, 동래부사 등으로 근무하다 낙향한 그는 임진왜란을 맞아 담양에서 6000명의 의병을 긴급 모집해 두 아들까지 대동해 싸우다 작은 아들과 함께 금산 눈벌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라북도와 경계선에 있는 대둔산(大芚山)은 명산 중 명산이다. 금산군의 동남쪽에서는 적벽강(赤壁江)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30m 높이의 기암괴석에 단풍이나 노을이 질 때 붉은 빛을 띠어 ‘적벽’이라 한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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