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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MZ세대의 말장난에 입맛이 당기는 '잡채 그 잡채'

[이희승의 영화보다 요리]고구마 전분을 기름으로 볶아 오방색을 더한 수고로움 '그 잡채'

입력 2023-04-13 18:00 | 신문게재 2023-04-14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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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뢰한‘은 진심을 숨긴 형사와 거짓이라도 믿고 싶은 살인자의 여자가 나누는 감정을 그린 하드보일드 멜로 영화로 오승욱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 김남길이 열연을 펼쳤다.(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탄수화물 그 ‘자체’인 잡채. 주 재료인 당면은 고구마 또는 감자 전분으로 만들어 100g당 탄수화물이 86g이나 된다. 하물며 모든 재료를 기름에 볶아 섞는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저탄고지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면을 끊는 것인데 잡채야 말로 그 정점에 있는 음식이다. 라면과 더불어 잡채는 ‘꿈에서도 먹고 있다’ ‘원하는 체중이 되면 가장 먼저 먹을 음식’ ‘명절에 가장 경계해야 할 1위’ 등 각종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하지만 요즘 MZ세대들에게 ‘잡채’는 일종의 말장난이다. 주로 아이돌 팬들과 SNS에서 자주 사용되며 ‘그 자체’라는 뜻이다. ‘여신 잡채’라던지 ‘감동 잡채’ 등 각종 상황에서 쓰인다. 그러고 보니 잡채가 먹고 싶어졌다. 요리 좀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잡채는 정말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이다. 이제는 글로벌 장사까지 나선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쉬워유~”를 연발하며 초간단 레시피를 내놔도 당면 불리고 볶기, 양념과 들어가는 재료 손질까지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어디에 내놔도 ‘기본 이상’은 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나 정성 좀 들였어’라고 생색(?)낼 수 있는 요리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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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잡채’라고 하면 연상되는 각종 채소가 들어간 이 음식은 불지 않아야 하고 윤기가 돌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음식이다. 서울 깍쟁이 ‘그 잡채’ 같은 음식이 아닐까.(사진=연합)

 

잔치날 상에 반드시 오르는 음식 중 하나인 잡채는 넣는 재료에 따라 다채로워지며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금치나 부추를 넣으면 푸른색을 띄고 계란지단이나 콩나물을 넣으면 노란색, 햄이나 파프리카, 당근은 붉은색을 띤다. 당면은 간장이나 흑설탕을 적당히 넣은 탓에 갈색, 계란 흰자 지단을 넣으면 흰색이 더해져 오방색을 띤다.

잡채는 본래 중국에서 기원한 음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중국식은 육류가 들어가지 않고 거의 채소로만 이뤄져 땅콩기름을 넣고 볶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왕에게 진상할 정도의 고급음식이다. 잡채 조리법이 실린 국내 최초의 문헌은 헌종 11년(1670년) 발간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다. 이 책에는 ‘꿩고기로 육수를 내고 고기를 잘게 찢은 뒤 각색의 재료를 한치씩 넣어 기름에 볶거나 데친다. 이를 그릇에 담고 꿩고기 육수와 된장을 걸러낸 물과 섞는다’고 자세히 설명돼 있다.

지난 2015년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영화 ‘무뢰한’을 보면 겉모습만 도도하고 화려한 혜경(전도연)이 잡채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순정을 바친 애인은 자신 때문에 살인자가 된 상황에서 그를 잡기 위해 경찰 신분을 숨기고 접근한 재곤(김남길)에게 묘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신이다. 하드보일드 멜로지만 그 한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 직후 “잡채가 당긴다” “좋아하는 음식이 아닌데 먹고 싶어졌다”는 후기가 제법 올라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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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요리실력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 한석규가 요리하는 모습이 더욱 싱크로율을 높였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한 장면. (사진제공=왓챠)

 

극 중 잡채를 만드는 신에는 비루한 희망이 담뿍 담겨있다. 재곤이 도망자가 된 애인과 친구였다는 거짓말은 이미 간파한 혜경이다. 한 때는 알아주는 텐프로에서 이제는 변두리 단란주점 마담으로, 이후엔 갚지못한 빚에 어디론가 팔려가 마약중독자의 수발을 들며 시들어가는 인생을 살게 되는 혜경은 마지막으로 이 남자가 내민 손을 잡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빌라 한켠에서 만드는 잡채는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음식도 아니다. 고작 냉장고를 털어 만든 비주얼이지만 혜경이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행복이 맛있게 버무려진다. 손으로 잡채를 먹기시작한 두 사람. 혜경을 사랑하게 된 속내를 숨기고 비아냥거리는 재곤의 말에 ‘칸의 여왕’ 전도연이 보여주는 ‘영혼이 나간 눈빛’은 잡채의 윤기만큼이나 찬란하다.

영화 속 잡채는 실제로 현장에서 전도연이 직접 만든 것으로 촬영 후 잡채를 맛본 김남길과 스태프들은 그 맛에 모두 감탄했다는 후문이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일타스캔들’ 속 전도연이 맡은 반찬가게 사장 캐릭터는 어쩌면 미래를 내다 본 신의 한 수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처절한 사랑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렸을 ‘무뢰한’ 속 잡채가 맛있었다면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요리에 서툰 남편이 대장암에 걸린 아내를 위해 염분 없는 잡채를 만들다 보니 그랬다고는 하지만 매워도 너무 맵다.

인문학자 강창래가 암투병 중이던 아내를 위해 요리했던 레시피에서 출발한 이 드라마는 라면도 겨우 끓였던 한 남자의 갱생기에 가깝다. 남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 아내는 곧 이혼을 앞둔 남편에게 자신의 마지막 길을 부탁한다. 그리고 남편은 두말 없이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 선다.

입맛을 잃은 아내를 위해 먹고싶다는 잡채를 만들어 봤지만 제대로 간을 하지 못한 탓에 밍밍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쥐똥고추로 살짝 매콤함을 더한다는 게 그만 양 조절에 실패한다. 청양고추보다 5배 매운 이 태국고추의 크기를 간과한 탓에 입에 넣자마자 사레들린 듯 기침을 해대는 아내. 자기가 먹어봐도 사람이 삼킬 수준이 아니다. 크기가 너무 작아 몇개나 넣은 탓이다. 하지만 되려 아내는 “간 없는 음식만 먹다 보니 되려 매운맛이 당긴다”며 그릇을 싹 비운다. 아내가 젓가락질을 계속 하게 만든 건 잡채의 맛 뿐 아니라 남편의 도전이지 않았을까.

 

 

◆잡채에 딴 국물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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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달인’에 나와 자신만의 비법을 공개한 노룬산 분식은 내 30년 단골집이기도 하다. 사진에서와 같이 국물이 떡볶이보다 많은 이유는 당면에 곁들여주기 위해서다. (사진제공=SBS)

 

잔치 음식이라고만 여겨졌던 잡채를 떡볶이 국물에 비벼 먹는 건 ‘떡볶이 성지’로 불리는 노룬산 분식의 사장님이 직접 개발했다. 원래는 떡볶이가 메인인 탓에 잡채를 만들기 위해 미리 삶아놓은 당면은 불어서 버리기 일쑤였다. 분식집에서 잡채는  인기있는 음식도 아니다. 하지만 귀차니즘에 빠진 몇몇 단골들이 집에서 만들어먹기는 손이 많이 간다며 다소 심심한 양념으로 무쳐주는 이곳의 잡채를 찾는 탓에 메뉴에서 빼지 못했다.

 

분식집 사장님의 잡채 비법 중 8할은 삶기다. 1차로 녹두와 목이버섯을 끓인 물로 당면을 삶아 건져내고 미역과 파뿌리를 우린 육수로 잡채를 볶아낸다. 간을 세게 하지 않는 건 떡볶이도 같이 팔기 위해서였다. 밀떡볶이의 단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을 넣지 않는다. 콩나물, 배에서 나오는 수분과 갱엿의 달콤함으로 국물을 많이 내는 게 포인트다. 탄수화물이 녹아있는 떡볶이 국물이야 말로 잡채를 먹을 때 필수요소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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