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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마이클 조던( MICHAEL JORDAN)> 롤랜드 레이즌비 지음, 서종기 옮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그리고 우여곡절의 '인간 조던'

입력 2020-12-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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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추억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그렸다. 마치 조던의 자서전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조던이 농구계에서 이룬 깨지지 않을 많은 업적을 무작정 칭송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매끄럽지 못했던 가정사, 너무나 뛰어났기에 평생 그를 따라다닌 ‘건방진 조던’이라는 평가, 그리고 내기골프 등으로 얼룩진 어두운 면모들도 매우 세밀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역시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는 말로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만 그 만큼 조던이 더 사랑받고 존경받는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있었음을 안타까와 한다. 개인적으로 조던의 왕팬이었기에 ‘인간 조던’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농구 황제가 아닌 인간 조던을 한번 들여다 보자. 

 

 

* 코피 쏟으며 태어난 ‘미래의 농구황제’ - 마이클 조던은 1963년 2월 브루클린의 킴벌랜드 병원에서 코피를 쏟으며 태어났다. 산모가 퇴원한 후에도 아이는 3일이나 입원해 있어야 했다. 그 후로도 다섯 살까지는 왠지 모르게 코피를 자주 흘려 애간장을 태웠다고 한다. 선수 생활 중에도 종종 코피가 나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 조던은 집안에서 내내 무시당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는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던은 그것이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 조던은 딸인 시스에게 8년 동안이나 성학대를 가했다는 사실이 2010년에 뒤늦게 알려지는 등 순탄치 못한 가정사를 가졌다. 

 

* 농구와의 운명적인 만남 - 조던은 운명적으로 농구와 닿아 있었다. 아버지 제임스는 채리티 고등학교 농구선수였고, 어머니 델로리스의 오빠인 에드워드 역시 록키 포인트 트레이닝 스쿨의 선수였다. 두 집안이 처음 대면한 장소가 실내 농구장이었다. 조던은 일찍부터 농구에 관심을 보였다. 형인 래리와 방과 후면 어김없이 일대일 대결을 펼쳤다. 처음에는 형에게 계속 졌지만 마이클은 그 일대일 대결이 둘을 성장시켰다고 회고한다. 래리는 1980년대 말에 193센티미터 이하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농구 리그에서 시카고 팀 소속으로 활동하다 어깨부상으로 일찍 중도하차한다. 

 

* 농구 다음의 운동 ‘야구’ - 12살에 마이클 조던은 리틀 야구 리그 선수로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투수로 활약하면서 노히트 노런을 두 번이나 기록했고, 팀을 주 선수권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노스캐롤라이나주 최우수선수에 선정될 정도였다. 올스타전에 출전해서는 4회를 던지면서 타자 12명을 모조리 삼진 아웃시켰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리틀 리그를 벗어나면서 조던은 더 이상 위력적이지 못했다. 야구장이 너무 넓어진 것이다. 이후 그는 농구에 매진하게 되지만 농구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염증을 느낀 끝에 다시 성인 야구에 도전하게 된다.

 

* 전설의 23번 유니폼을 입다 - 1979년 미시간 주립대의 매직 존슨은 래리 버드의 인디애나 주립대를 꺾고 모교를 NCAA 정상으로 올려 놓았다. 10대의 조던은 속공의 천재인 존슨을 자신의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레이니 농구부에 다니던 조던은 이 때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실력을 쌓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의 유니폼 번호가 23번으로 정해진 것도 이 때다. 당시 지역 내 베스트 파이브에 선정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들 등번호 가운데 23번과 33번이 남았고 조던은 23번을 선택한다. 형 래리가 쓰던 45번의 절반에 가깝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이 곳에서 조던은 시즌 평균 24.6 득점에 11.9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당시 레이니 농구부는 조던만 바라보고 뛰는 팀이었다. 

 

* ‘파이브 스타’에서 진짜 스타가 되다 - 당시에 고교 최고 유망주들은 ‘파이브 스타 캠프’에 초대됐다. 십수 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에서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 혹은 최고 중의 최고에게 ‘원 포제션 플레이어’라는 호칭이 붙여지곤 했다. 한번 보면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그런 선수를 의미했다. 조던이 그랬다. 점프 슛을 쏠 때 수비가 세 명이나 붙는데도 아무도 막지 못했다. 파이브 스타 캠프를 다녀온 후 조던의 명성은 더욱 치솟았다. 1981년 고교 졸업자 가운데 전국 10위에 드는 유망주로 소문이 났다. 매사추세츠 출신의 센터 패트릭 유잉보다 나은 ‘전미 넘버 원’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 딘 스미스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맹활약 - 조던은 원래 카림 압둘 자바와 빌 윌튼, 존 우든 감독이 있던 UCLA에 진학하길 원했지만 나중에 딘 스미스가 감독으로 있던 UNC(노스캐롤라이나대학)가 왠지 자신과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신장 213센티미터의 센터 유잉도 함께 뛸 뻔 했다. 하지만 캠퍼스 견학 후 돌아가는 길에 KKK단의 시위를 보고는 유잉은 생각을 바꿨다. 둘이 최강의 호흡을 맞춰 NCAA 우승을 여러 번 차지했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딘 스미스는 개인 기량보다 체계적인 팀 플레이를 중시하며 늘 ‘열심히, 영리하게, 함께’를 강조했다. 상대편을 자극할 화려한 플레이는 삼가도록 가르쳤다. 매사를 정석대로 처리하며 선수들이 운동과 학업 사이에서 균형을 잡도록 힘썼다. 조던은 이곳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소화했고 1982년에 마침내 UNC는 대학 농구계 최정상에 올랐다. 조던은 이곳에서 활동한 3년 동안 평균 17.7 득점을 기록하며 한 때 21연승 기록까지 만들어 냈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실력 탓에 조던은 다른 한편으로 건방지고 말이 지나치게 많은 리더로 성장하게 된다. 

 

* LA올림픽 국가대표로 차출되다 - NBA 드래프트가 끝나고 조던은 1984년 LA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된다. 대표팀 감독 밥 나이트는 딘 스미스보다 더한 시스템 농구의 신봉자였다. 당시 찰스 바클리와 존 스탁턴, 칼 말론 등 최고 실력의 아마추어 선수들이 탈락했을 정도였다. 조던은 올림픽을 앞두고 NBA 선수들과의 시범 경기에서 엄청난 실력을 과시하며 프로 데뷔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고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건다. 

 

* 시카고 불스에서 신화를 쓰다 - 조던은 올림픽 후 1984년에 전체 3순위로 시카고 불스와 7년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 금액은 당시 휴스턴 로케츠의 센터 하킴 올라주원와 랄프 샘슨의 뒤를 이어 NBA 역대 3위에 해당하는 600만 달러였다. 가드 포지션으로는 역대 최고액이었다. 이 때 이미 나이키는 조던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조던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선수”라며 그때까지 준비해 둔 마케팅 예산 250억 달러를 모두 조던에게 투자하기로 한다. 조던의 신발과 운동복에 어울리는 명칭을 고민하던 나이키는 ‘에어 조던’이라는 이름을 찾게 된다. 1984년에 나이키와 첫 거래를 함으로써  조던은 막대한 부를 얻게 된다. 1984년 10월 26일 워싱턴 불리츠와의 프로 데뷔전에서 조던은 16득점에 7어시스트, 6리바운드를 기록한다. 그리고 아홉 경기만에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상대로 45득점을 올렸고 뉴욕 닉스전에서 42점, 애틀란타 호크스전에서 45점을 올리며 단번에 슈퍼 스타 반열에 오른다. 

 

* 조던의 ‘금지된 신발’ - 조던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1985년 초에 나이키는 ‘에어 조던’ 1탄을 내놓는다. 그런데 NBA에서 이 빨강과 검정으로 장식된 모델에 착용 금지 명령을 내린다. 당시 리그 지침 상 선수들은 흰색 운동화만 착용할 수 있었다. NBA는 조던이 그 신발을 신을 때마다 벌금 5000달러를 물리겠다고 경고했다. 나이키는 매 경기 벌금을 자신들이 내 줄테니 조던에게 에어 조던을 착용하고 뛰라고 했다. 그렇게라고 해서 신발을 알리고 광고를 통해 팬들에게도 리그에서 사용 금지된 제품을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노이즈 마케팅 덕분에 이 제품은 출시 3년 만에 1억 5000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매상을 올렸다.

 

* 인간으로 둔갑한 신? - 1985~86 시즌 중 조던은 치명적인 왼쪽 발목뼈 부상을 당한다. 그 탓에 정규 시즌 중 무려 64경기를 못뛰게 된다. 시즌 막판에 복귀해 분전했으나 팀은 30승 52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동부지구 8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잡았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래리 버드가 지키는 동부지구 1위팀 보스턴 셀틱스였다. 조던은 1차전에서 43분간 뛰면서 49점을 넣었지만 123대 104로 졌다. 2차전은 두 차례나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속에 63점이라는 역대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최다 득점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버드가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둔갑하고 나타난 것 같아요”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조던 혼자 힘으로 승리할 순  없었다. 2차전도 135대 131로 졌다. 3차전도 조던이 19득점에 12리바운드 9어시스트로 분전했지만 122대 104로 완패한다. 이 세 경기로 조던은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급 선수로 평가받게 된다. 올스타 주간에 열리는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공중의 제왕(His Airness)’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조던은 그야말로 ‘농구의 신’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 시카고 볼스를 부자 구단으로 만들어주다 - 조던은 시카고 불스의 홈구장 관객수를 3배 이상 늘려주었다. 발목 부상으로 거의 출전하지 못하던 시즌에 20만명이던 관중이 65만명으로 늘었다. 원정경기에서도 리그 전체 관중 수를 28만명 가량 늘리고 371만 달러의 추가 수익을 창출해 냈다. 한 때 파산 위기에 몰렸던 불스는 4년 만에 완전히 흑자 구단으로 탈바꿈했고 조던은 8년간 2500만 달러의 연장 계약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 고집스러운 선수선발 육성 의지 - 조던은 늘 신인이나 이적생의 실력을 직접 테스크하려 했다. 신임들의 경쟁심과 정신력을 확인하는 이 일은 그에게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그가 나중에 직접 구단을 경영할 때 그를 괴롭히는 문제로 떠오른다. 스카티 피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등학교 시절에 어느 대학에서도 영입 제안이나 장학금 제의를 받지 못한 이른바 ‘워크온(walk-on) 선수였다. 키 185센티미터에 몸무게 68킬로의 선수를 눈여겨 볼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 입학 후 키가 201센티미터까지 자랐고 평균 23.6점에 10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유망주로 성장했다. 피펜이 입단한 뒤 그에게 재능을 발견한 조던은 그를 더욱 강한 선수로 키우고자 연습 때마다 호되게 다뤘다. 피펜은 그 경험덕에 많은 것을 배웠지만 조던 특유의 독설과 다그침에 둘의 관계는 그다지 살갑지 않았다고 한다. 

 

* 조던을 막으려 만든 ‘조던 룰’ - 늘 자신감이 있었던 조던은 상대 팀 수비수들을 자주 시험하고 도발했다. 피스톤스에 조던을 유난히 잘 마크한 듀마스라는 선수가 있었지만 대부분 조던을 막는데 실패했다. 피스톤스 코치진은 조던이 다득점을 올리지 못하도록 일명 ‘조던 룰’까지 만들어 냈다. 조던이 오른쪽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코트 중앙부로 모는 것이 전략의 핵심이었다. 자유투 라인 쪽으로 밀어내고 쉽게 골 밑을 돌파하지 못하게 했다. 베이스라인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고 이동 방향도 최대한 왼쪽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조던이 페인트 존 안에서 공을 잡으면 수비수가 금새 이중삼중으로 에워쌓다. 그 시절에 불수를 이길 방법은 조던 룰 뿐이었다. 덕분에 피스톤스는 동부 컨퍼런스를 제패하고 NBA 우승을 두 차례나 차지할 수 있었다. 

 

* 도움 안되는 가족들 - 조던은 1988년 시즌에 평균 35득점으로 리그 득점 1위에 오르면서 정규 시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평균 스틸 3.2개로 1위에 올랐고 올해의 수비수에도 선정되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 해 조던과 나이키는 ‘플라이트 23’이라는 소규모 체인사업을 시작한다.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가 아들에게 빌붙지 않고 돈을 직접 벌게 해 주자는 취지였다. 나이키는 조던의 형제들에게도 체인점의 일부 지분을 나눠주었다. 하지만 플라이트 23은 가족 간의 갈등, 특히 조던 부모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개업식 때도 둘은 말다툼을 벌였다. 이 사업을 책임지기로 한 제임스는 부주의한 경영으로 구설에 올랐다. 결국 조던과 나이키는 매장 운영의 권한과 지분을 모두 거둬들이기로 결정했고, 이후 조던은 “앞으로 절대 가족과 같이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 독단적인 스타일로 욕을 먹다 - 조던의 활약이 커질수록 비평가들은 그의 플레이를 비판했다. 동료들의 실력을 향상시킨 래리 버드나 매직 존슨과 달리 너무 이기적인 플레이를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조던이 팀의 리더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동료들을 대하는 방식이 따뜻하거나 부드럽지는 않았다. “잘 할 자신이 없으면 팀을 나가라”고 부담을 주기 일쑤였다. 자신의 압도적인 재능을 믿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다른 팀원들에게 함부로 하는 경향이 여전했다. 사생활도 의문 투성이였다. 골프를 지나치게 즐기고 내기를 즐기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조던이 세상 사람들의 온갖 요구와 기대에 시달리면서도 그나마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후아니타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 필 잭슨 감독과의 운명적 만남 - 필 잭슨은 유쾌하게 경기를 관전하는 지도자 스타일이었다. 그가 불스의 감독으로 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선수단 내부의 위계를 능력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는 심리학에 기반한 독특한 지도자 방식을 활용했고 특히 불교식 사고나 마음 수련 및 명상을 도입해 선수들의 안정감을 높이려 했다. 조던도 처음에는 생소해 했으나 새 훈련 방식으로 큰 덕을 보게 된다. 잭슨은 그러면서 강력한 존재감으로 팀 워크에 위협을 가하던 조던에게서 선수단을 보호하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조던을 구하고 팀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동안 조던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틀을 깨기로 했다. 언론의 취재까지 제한하면서 팀의 리빌딩을 추진했다. 잭슨이 짜낸 최고의 묘안은 선수들과 코치진으로 이뤄진 소집단을 구단의 다른 사람들, 특히 경영진을 배제한 그들만의 조직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구단주가 팀 활동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 조치로 잭슨과 조던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조던-피펜 맞대결시키고 트라이앵글 전술을 만들다 - 잭슨은 부임 후 처음 맞이한 트레이닝 캠프에서 수비를 지상 최대의 과제로 내걸었다. ‘풀 코트 프레스’를 펼치기로 한 것이다. 팀 내 건강한 경쟁이 필수라고 판단한 잭슨은 조던과 피펜을 맞대결을 시켜 경쟁심을 붇돋우게 했다. 매일 같이 조던에게 후보 선수들과 한 팀을 만들어 피펜과 주전팀으로 맞서게 했다. 그 덕에 피펜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피펜은 또 조던과 달리 자신의 힘을 동료들과 나눌 줄 알았고, 훌륭한 수비수로 성장해 불스를 뛰어난 수비팀으로 바꿔 놓았다. 여기에 잭슨은 ‘트라이앵글 오펜스’ 전략까지 팀에 심었다. 골 밑의 센터와 코트 좌우측 45도 외곽에 자리잡은 선수들 사이에 적절한 공간을 두는 전략이었다. 완전 적응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 전술로 불스는 최강의 농구팀이 되었다. 상대 팀이 조던을 수비하기 위해 더블 팀을 붙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농구황제의 세대교체를 확인시킨 바르셀로나 올림픽 - 미국 농구 대표팀은 금메달 결정전까지 14차례 시합에서 모두 최소 32점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팀 내에서 더 큰 관심을 모은 것은 팀 결성 때부터 시작된 조던과 존슨의 계속된 기 싸움이었다. 누가 최고인지를 두고 으르렁대다가 둘은 결국 바르셀로나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문 모나코에서 청백전으로 결판을 내기로 한다. 그날 조던과 존슨은 팀을 나눠 언론 출입을 통제한 상태에서 대결을 벌였고, 조던은 어릴 적 영웅이던 매직 잭슨을 이겼다. 타고난 리더였던 존슨은 이제 자신의 시대가 지났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92년 8월 8일, 미국팀은 결승전에서 크로아티아를 117대 85로 완파하고 금메달을 목에 건다. 

 

* 자신의 명성에 스스로 금을 내다 - 1991년 여름 조던과 리처드 에스키나스는 도가 넘는 고액의 내기 골프를 즐긴다. 누가 이기면 다른 한 사람이 더블로 판돈을 올렸고 나중에 조던이 갚아야 할 돈이 125만 2000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재미로 시작한 시합이 빚으로 남게 되자 조던은 급기야 “120만 달러짜리 수표를 써 주느니 차라리 당신을 쏴버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던의 서명이 들어간 수표들은 이후 곳곳에서 발견된다. 경찰은 마약상 제임스 슬림 보울러, 보석금 보증업자 에디 도우의 사무실 등지에서 5만~10만 달러 상당의 수표들을 찾아낸다. 조던은 매년 트레이닝 캠프가 열리기 직전에 이른바 ‘마이크의 시간’이라는 모임을 열고 고액의 내기 골프와 포커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조던은 NBA 사무국으로부터 불미스러운 인물들과 어울려 내기 골프를 즐겼다는 이유 등으로 견책 처분을 받는다.

 

* 부상이 은퇴를 재촉하다 - 1993년 1월 8일. 조던은 NBA 입성 후 620 경기만에 통산 2만 점을 득점했다. 그보다 빨리 2만점에 도달한 선수는 499경기만에 대기록을 작성한 윌트 체임벌린 뿐이었다. 불스는 지난 4년 동안 매년 100경기 이상을 치렀고 조던의 무릎은 시합 때마다 욱신거렸다. 그제야 조던은 왜 NBA구단들이 연속 우승에 실패하는 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고 한다. 조던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선수 생활이 끝나간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도 그의 은퇴를 관측하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 제임스 조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조던은 “더 이상 농구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은퇴하고 싶어요”라고 측근에게 전한다. 드디어 1993년 10월 6일 공식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농구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불스가 절 받아주고, NBA 총재가 복귀를 허용한다면 나중에 5년 뒤에라도 돌아올지 모릅니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 기대에 못 미친 야구 생활 - 조던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야구장으로 향했다. 그의 상품 가치를 잘 아는 구단들이 줄을 섰고 화이트삭스가 그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시범경기에서부터 높은 벽을 느껴야 했다. 당연히 25인으로 한정된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시즌 개막 첫 주에 모두 9차례 타석에 들어서 7번의 삼진을 당했다. 마지막 달에 타율 2할 6푼을 기록하며 평균 타율을 간신히 2할2리로 끌어올리는 데 그쳤다. 436타석에서 안타를 88회 쳤고 2루타와 3루타가 17회였다. 도루가 30개, 득점은 46점이었다. 농구 선수로 하늘을 찌를 듯 했던 자신감을 야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나이키와 맺은 3000만 달러의 광고 소득이 마이너리그의 조던을 지탱시켜 주었다. 조던은 1994년 가을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열린 23번 영구결번식에 참석했다. ‘마이클을 향한 경례’라는 부제가 붙은 행사였다. 이날 필 잭슨은 조던의 심중에 다시 농구 선수로 뛰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감지했고 조던의 복귀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 복귀 후 피펜-로드맨과 맹위 - 조던의 불스 복귀는 당초 예상보다 늦어졌다. 구단으로부터 피펜과 암스트롱을 방출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는데 시간이 걸렸다. 조던은 영구별번된 23번 대신 45번 유니폼을 입게 된다. 조던이 불스를 떠난 후 피펜은 1994년부터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뉴욕 닉스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2패 뒤 맞은 박빙의 마무리 상황 때, 자신이 아닌 1년차 쿠코치에게 마지막 슛을 지시한 잭슨 감독에게 항명하는 사태를 일으킨다. 안 그래도 낮은 연봉에 마음 상해 있던 그는 트레이드설에 휩싸이게 된다. 피펜을 설득한 조던은 복귀 후 정규 시즌 마지막 4주 동안 팀을 13승 4패로 이끈다. 이후 피펜의 동의를 얻어 월 퍼듀를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보내고 ‘코트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을 데려온다.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인터뷰하는 괴짜 였지만, 조던의 존재감이 그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로드맨은 시즌 첫 시범경기에서 10개의 리바운드를 걷어내며 세간의 우려를 일축했고 이후 불스는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다. 

 

* 무너져 가는 불스 - 조던은 시카고 불스를 다섯 차례나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팀의 불화를 낳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특히 제리 크라우스 단장에 대한 비난은 노골적이었다. 크라우스가 피펜을 푸대접했을 뿐만아니라 자신과 가장 친했던 조니 바크 코치를 해고한 것을 문제 삼았다. 조던은 매번 시합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아 빈정대는 말투로 동료든 선수든 코치든 가리지 않고 놀려댔다. 그리고 예정보다 더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밝혔다. “전 이제 10년 전보다 제 생각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이런 가운데 잭슨 감독이 1997년 7월에 불스와 1년 600만 달러에 계약했다는 발표가 난다. 사실상의 결별이었다. 조던은 “잭슨 없이는 선수 생황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피펜도 동급 선수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자신의 연봉에 불만을 드러내며 결국 휴스턴 로케츠로 트레이드됐다. 조던의 은퇴는 기정사실화됐다. 

 

* 1998년 1월 13일 황제의 은퇴선언 - NBA의 직장 폐쇄로 조던의 은퇴식은 1999년 1월에 열리게 된다. 그는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이며 더 이상 새로운 도전 의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이 은퇴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인 것 같다고 토로했다. 조던은 농구 황제로 불렸지만 그에 합당한 금전적 대우는 받지 못했다. 선수 생활 동안 구단과 계약으로 받은 돈이 약 9000만 달러인데, 이는 2012년 공개된 NBA 선수들 통산 연봉 순위에서 87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케빈 가넷이나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 같은 선수들은 3억 달러를 받았다. 조던 시대 선수들 가운데 최고액은 1억 9000만 달러를 번 패트릭 유잉이었다. 스카티 피펜이 1억 900만 달러, 하킴 올라주원이 1억 700만 달러였다. 시카고 불스가 조던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도 그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욱이 레이커스의 구단주는 팀에 다섯차례의 우승컵을 안겨준 매직 존슨에게 1400만 달러를 선물했다.

 

* 구단 경영자가 되다 - 조던은 은퇴식 때 “앞으로 조용한 삶을 사는 평범한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시카고 불스의 공동 소유주가 되기를 기대했다. 경영자가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밀워키 벅스에서 처음 열매를 맺는 듯 했으나 막판에 결렬되었고, 이후 조던은 워싱턴 D.C 소재의 워싱턴 위저즈와 인연을 맺게 된다. 조던은 자신이 광고 촬영 등 대외 사업활동을 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비상근 임원으로 일하길 원했다. 골프 등 여가 시간을 위한 많은 자유시간을 원했다. 그의 조건은 구단의 불만을 샀고 이후 잦은 충돌로 이어진다. 그러다 조던은 뜬금 없이 자신이 다시 코트에 서게 되면 어린 후배들에게 농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도 가르칠 수 있고, 무엇보다 구단을 살릴 최선의 방법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다. 하지만 조던이 복귀하면, 선수는 구단 지분을 보유할 수 없다는 리그 규정 때문에 공동소유주라는 위치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그 사이 9.11 테러가 터졌고 훈련 중 갈비뼈 부상까지 당했다.

 

* 애타던 복귀, 그리고 토사구팽 - 조던은 코드 복귀 후 2001년 12월27일 인디애나와의 시합에서 프로 데뷔 이래 단일 경기 최저인 6득점에 그쳤다. 연속 두 자릿수 득점 기록을 866경기만에 내려 놓아야 했다. 다음 경기에서 51점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며 “역시 조던”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의 무릎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위저즈는 그를 대신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내 후아니타는 2002년 1월에 이혼 소송을 청구했고 그 해 4월2일에 조던은 레이커스와의 시합에서 2득점에 그친다. 이틀 뒤 위저즈는 그가 무릎 부상으로 남은 시즌을 결장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한다. 복귀 두 번째 시즌에도 올스타전에 참여해 20득점을 올리며 카림 압둘 자바를 제치고 올스타전 최다 득점자가 되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특히 구단을 향한 존경심의 부재는 조던을 더 어렵게 했다. 결국 구단은 농구 황제 조던을 해고하게 된다. 이후 조던은 밥캐츠 농구단의 운영임원으로 정착하지만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골프와 도박, 파티를 즐기는 생활을 지속했고 결국 2006년에는 후아니타와 공식 이혼하게 된다.

 

* 조던의 후계자는 누구? - 1994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입단한 그랜트 힐에게는 늘 ‘제2의 조던’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하지만 저자는 그가 조던보다는 피펜에 더 가까운 선수였다고 평가한다. 1997년 12월에 NBA에 입성한 코비 브라이언트야 말로 농구 황제 조던도 놀랄 만큼 많은 부분 그와 닮았다. 코비도 공중의 제왕을 줄곧 숭배하며 성장한 세대 가운데 그를 가장 훌륭하게 모방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던 역시 브라이언트의 점프력을 확인하고 그 능력과 재능에 감탄했다고 한다. 조던과 브라이언트는 첫 대결에서 각각 36점, 33점의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잭슨 감독은 두 슈처스타의 비교에 대해 “마이클 조던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하지만 조던이 인정하는 몇 안되는 선수 가운데 하나가 브라이언트 였다. 그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누구보다 마음 아파 했으며, 장례식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조사를 전하기도 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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