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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탄핵 당하고도 ‘떼쓰던’ 대통령 “압두라만 와히드”

입력 2016-12-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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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인도네시아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압두라만 와히드는 ‘행동하는 종교인’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온 국민의 신망을 얻으며 국가원수가 되었죠.

어린 시절부터 인도네시아 최대 회교조직 ‘나흐들란툴울라마’를 맡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해왔습니다. 특히 지방에 은행지점을 확대시킨 공로로 막사이사이상을 받기도 했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수하르토 독재 하에서는 저항운동을 통해 ‘행동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주주의를 꿈꿨기 때문입니다.

1996년 독재자 수하르토가 와히드의 라이벌인 메가와티의 지지자를 유혈진압할 때도 강력 항의했습니다. 야당인사 17명과 함께 민주주의 탄압에 대해 경고하는 탄원서에 서명키도 했죠.

사회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이슬람교도를 위해 정치에 나섰습니다. 전인구 3%에 불과한 화교기업인들이 국가자본 70%를 주무르고 60년대까지 기독교도가 정부요직을 독차지한 데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1999년 10월, 제 4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선거에서 와히드는 인도네시아 국민계몽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민주투쟁당 후보로 출마한 라이벌 메가와티를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그는 국가통합과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모든 정파를 포함하는 국민연합 내각을 발족시키면서 정세가 안정되어가는 듯 했죠.

오랜 독재에 찌든 국민은 열렬히 환호했지만 곧 암초에 부딪쳤습니다. 동티모르를 비롯한 일부 지방의 분리주의 요구와 전 정부의 부정부패 처리가 지연되면서 반발을 사기 시작한 겁니다.

2000년 8월 이후 불거진 정파 간 갈등이 표면화 되면서 국민은 더욱 동요했습니다. 2001년 초에는 조달청 자금 횡령과 기부금 유용 혐의로 국회로부터 경고장을 받기도 했는데요. 인도네시아 정세는 파국으로 내려앉았습니다.

건강문제도 심각했습니다. 뇌졸중으로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기력해졌고, 무기력은 무능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식석상에서 실언을 하는 것은 물론 독단적 인사를 단행키도 했습니다.

같은 해 7월 23일 무능력과 부패의혹 연루 등에 시달리다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국민협의회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탄핵 이후 지지자를 등에 업고 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죠. 계속해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와히드는 국민협의회 활동을 중지시키고 조기총선 실시를 선포했지만 군부와 경찰은 거부했습니다. 같은 날 오후, 의사당에서 신임대통령으로 대선에서 맞붙었던 메가와티가 선출되면서 결국 쫓겨났습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끌어내려지는 형국, 대한민국 또 하나의 역사로 기록 될 수 있을까요?

박민지 기자 pmj@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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