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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30년 만의 숏커트 "혹시 이혼?"이란 소리가 들려왔다

[이희승 기자의 사적라이프] 단발령 겪은 90년대 중반 여고시절 지내며 긴머리 집착
25cm 이상 머리카락 기부하면 소아암 환자 인모가발 가능
출근시간 2분대로 단축, 숙면 방해하는 긴머리에서 해방

입력 2023-05-18 18:00 | 신문게재 2023-05-19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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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어머나운동본부)

“아직도 안 늦었어요! 진짜 자릅니다. 싹뚝!”

처음 방문한 미용실 원장님은 넉살도 좋았다.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입으로 소리를 내며 나를 웃겼다. 무려 3번의 도전 끝에 “좋은 일 하신다니 잘라는 드릴게”라고 해서 들어간 곳이었다. 그렇게 무려 30년만에 숏커트에 ‘성공’했다.

10년 지기 단골숍의 담당 선생님은 헤어 디자이너로서 의지가 확고한 분이셨다. 긴 얼굴형인 내가 뱅 스타일의 앞머리를 아무리 해달라고 읍소해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가끔 층을 전체적으로 내 달라거나 기분전환 겸 칼 단발을 한다고 하면 늘 “차라리 뿌염을 하시거나 이 참에 전체 염색을 하라”며 에둘러 ‘커트병’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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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고 보니 시원섭섭했던 나의 긴 머리카락. 당시에는 최대한 길게 보내는 게 관건이었지만 앞으로는 더 건강한 모발상태로 보내고픈 욕구가 샘솟는다.(사진=이희승기자)

사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헤어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조르는 대로 잘라주면 “그러게 왜 안 말렸냐” “다시는 앞머리를 안 자를 거다” “아무리 자른다고 해도 말려야 된다” 등의 징징거림에 반년 넘게 시달려야 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귀를 드러낸 헤어스타일은 진짜 고등학교 3학년 이후 처음이다. 파마와 염색은 당연히 상상할 수 없고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이 교칙인 여자고등학교를 다닌 탓이었다. 

지금도 머리가 길면 공부에 방해된다는 당시의 규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질끈 묶으면 편하고 좋은데 ‘단발령’이라 불린 그 학칙에 의해 고등학교 3학년이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암묵적으로 숏커트를 해 ‘입시생의 결연함’을 표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교련선생님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기억나는 교련선생님은 당시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조금이라도 층을 낸 헤어스타일이거나 길이가 어중간하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바람에 ‘인간 줄자’라 불렸다. 

30대 중후반이었던 선생님은 ‘긴머리=곧 날라리’라 여겼고 그런 아이들의 명찰을 뺏는 걸 즐겼다. 명찰이 없으면 등교시간에 선도부에 잡히고 반복되면 학적부에도 올라가는 시대라 반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칼단발을 하거나 숏커트를 유지했다. 

그러고도 머리를 자르지 않는 애들한테는 길고 매끈한 수제 막대기로 손바닥에 사랑의 마사지를 퍼부었다. 손금이 가려질 정도로 부어올라 연필을 손에 쥐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누구 하나 고소하거나 대들 생각을 못하던 야만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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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과 여군 등 긴 머리를 가진 수많은 영웅들이 일찌감치 ‘어머나 운동본부’에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었다. (사진=홈페이지캡처)

 

그런 청소년기를 보내서인지 긴 머리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딸기색, 금발, 에시 그레이, 초록색, 핑크색 등 코팅과 염색이란 미명 하에 머리카락은 타들어 갔고 가끔 녹았으며 다시 자라기를 반복했다. 앞머리의 변천사도 파란만장(?)했는데 타고난 얼굴형은 생각지도 않고 시스루 뱅, 세미 커트, 처피 뱅, 샤기 커트 등 수십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스타일을 시도했다.

그런 노력보다 중요한 건 풍성한 머리숱과 건강한 모발이란 걸 알지 못한 20대를 거쳐 30대는 펌의 종류와 고데기에 빠져들었다. 머리색과 스타일이 주는 현란함보다 최상의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스킬이 중요하단 걸 깨달은 시기기도 하다. 동시에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인간의 머리가 이렇게나 빠질 수 있는지 절규했고 잔디인형처럼 다시 자랄 수도 있다는 걸 알게되고부터는 모든 게 부질 없어졌다.

그렇게 운명처럼 ‘어머나운동본부’를 알게 됐다. ‘어린 암 환자들을 위한 머리카락 나눔 운동’의 줄임말을 표방하며 항암치료 중 탈모 증상을 겪는 소아암 환아들에게 맞춤형 가발을 제작해 주는 단체다. 소아암 환자들은 특히 8세부터 18세 사이가 많은데 항암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 타의에 의해 머리를 밀게 된다. 

성인환자에 비해 그 충격이 더 커서 상실감과 대인기피현상으로 이어지기에 항암치료를 받으며 약해진 피부나 트러블에 최대한 자극을 덜 주고자 인모로 만든 가발이 절실한 것. 무엇보다 한국은 지난 1980년대까지 수출 1위로 가발을 만든 국가 아닌가. 머리카락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아이들의 자존감이 올라간다니 주저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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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이라도 펌을 했거나 염색, 상함 정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소아함 환자들을 위한 기부의 마음 아닐까.(사진=홈페이지 캡처)
 

대중에게 잘 못 알려진 정보는 염색이나 탈색, 펌을 한번이라도 한 머리카락은 보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정보에 대한 질문에 어머나운동본부 측은 “과거에는 화학 성분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모발의 손상도가 상당히 강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모발보호에 치중한 제품들이 대부분으로 어차피 모든 모발은 이염 과정을 거쳐 가발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한 부분은 커버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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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에서 직접 출력가능한 기부증서는 캡처상태로는 이름과 나이가 보이지 않지만 출력하면 회원가입한 성명과 아이디, 날짜가 적혀져 번듯한 기부증서로 완성돼 품 안에 안긴다.

굳은 마음을 먹고 자르러 갔지만 되려 복병은 딴 곳에 있었다. 단골숍에서는 거부당했고 회사 앞 미용실에서는 “기부용으로 자르려면 고무줄로 단단히 묶어 흐트러짐 없이 고정해서 자른 뒤 모양을 내야하는데 그러면 (헤어스타일이) 예쁘게 나오질 않아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막상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25cm 이상으로 최대한 길게 머리를 잘라 보내려면 남은 머리카락은 짧아지고 거기서 모양을 내 자르기에는 제약이 많다는 것. 


등을 완전 덮는 길이였지만 최대한 길게 어머나운동본부에 보내려는 의지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적당히 멋을 내야 하기에 짧은 채로 보낼 것인지 이염돼 상할 것을 감안해 최대한 길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빨리 결정됐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자라는 거고 세월의 직격탄으로 흰머리 노출빈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막상 잘라보니 숱이 엄청 많은 편에 속했다. 너무 짧아서 로트를 말 길이가 안 돼 펌도 할 수 없었지만 기부도 하고 편리함도 배가된 1석 2조의 선택이었다. 

그간 물결봉, 여신봉, 매직봉까지 종류별로 긴 머리를 펴거나 마는 헤어세팅기가 있었는데 숏 커트 후에는 간편해졌다. 머리 말리는 시간부터 단축됐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은 2분을 넘지 않는다. 잘 때 머리카락을 ‘덮고’ 잤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더불어 긴 머리가 눌리거나 얼굴에 달라붙어 수면을 방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어머나운동본부에 머리카락을 보내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다. 일단 보내야 할 주소(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45길 24  3층 어머나운동본부)를 적은 뒤 선불로 집 근처 편의점 택배나 우체국에서 발송하면 된다. 이때 날짜와 등기번호는 따로 적어둔다. 홈페이지에 가서 회원가입을 한 뒤 보낸 날짜와 택배 번호를 입력하면 끝. 3주 뒤 다시 접속하면 기부증서 출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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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숏커트 헤어스타일을 본 주변의 반응은 다양하다. ‘요즘 많이 힘든가봐’ ‘혹시 내가 아는 그 이유인가요? 이혼??’부터 ‘어려보인다’ ‘잘 어울린다’ 등 생각지도 못한 말들과 듣고 싶었던 말 중간의 어디쯤이 오간다. 그런 이유로 다시금 머리를 길러보기로 했다. 

흰머리가 더 빨리 진행되기 전까지 최대한 길러 생애 두 번째 기부증서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받아야 맛은 아닌데 이 종이 한장이 뭐라고 볼 때마다 뿌듯함이 가슴 속에 차오른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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