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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죽기 직전 조국의 인정을 받은 비운의 과학자

입력 2017-04-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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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1
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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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캄캄한 새벽 경복궁, 암호명 ‘여우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해 된 한명의 여인, 대한민국의 국모 ‘명성황후’였습니다.
 

사건에 가담한 조선인 장교가 있었으니 ‘우범선’입니다. 역사의 불명예스러운 한 획을 긋고 옛 동료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일본 땅에는 아내와 아들만이 남았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범선의 큰 아들은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해 전공과목으로 ‘농학’을 선택했습니다.

그 후 1935년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바로, 우장춘 박사입니다.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은 다윈 진화론의 적자생존설을 수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논문 말미 ‘나가하루 우’라는 한국성이 표기되어 조선에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죠.

조국에 뼈를 묻겠다. -우장춘 박사-

우장춘 박사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농민에게 새로운 농법과 종자를 홍보했죠.

업적은 혁신적이었고, 날로 발전했습니다. 한국 땅 맞춤형 쌀을 개발해내었습니다. 건강한 꽃씨를 만들어 내는 가하면 과일 품종의 정착과 대량 생산에도 일조했습니다. 제주 감귤과 강원도 감자도 그의 결실입니다.

세계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늘 ‘친일 매국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농업의 자주적 혁신을 일궈냈지만, 인정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장춘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도리를 다했습니다.

어느 덧, 그는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병상에 누운 그에게 한 장의 쪽지가 날아들었습니다.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게 된 겁니다.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
병상에서 포장을 수여받은 우장춘 박사는 한참을 오열했다고 전해집니다.

길가의 민들레는 밟혀도 꽃을 피운다.
-우장춘 박사-

굴곡진 삶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길가의 민들레처럼 이리저리 밟혔지만 결국 꽃을 피워 냈습니다.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그의 업적과 도전정신을 기립니다.

박민지 기자 pmj@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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