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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地오그래피> 남영우

입력 2022-03-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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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그래피


저자는 국내를 대표하는 지리학자다. 도시지리학에서 출발해 인문지리학으로 학문의 지평을 넓혀 왔다. 저자는 땅이 역사를 만들었다며 “지리가 곧 역사”라고 말한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땅에 숨겨져 있으며 그 흔적을 찾으면 역사를 알게 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역사를 만든 동서양의 산과 하천, 언덕과 골짜기의 내력을 탐문하며,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알려준다.


* 잘 생긴 땅과 못생긴 땅, 그리고 ‘두모사상’ - ‘두모’란 풍수사상과 흡사하다. 인류는 중국에서 풍수사상이 나오기 전부터 두모사상에 의거해 ‘살기 좋은 땅’을 골라 살았다. 땅의 생김새는 평지와 굴곡이 다양한 지형의 정도로 말하는데 이를 ‘지절(肢節’)이라고 한다. 지절은 수직지절과 수평지절로 나뉘는데, 지형적 다양성과 복합성에 따라 지절률이 높다 혹은 낮다 말한다. 저자는 해안선의 드나듦이 복잡하고 고도차가 많은 땅이 잘생긴 땅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지절률이 높은 땅에서 서로 다른 문명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한 차원 높은 문명이 창출되었다고 강조한다. 지리학자인 다이아몬드도 <총,균,쇠>에서 인류 문명사가 서남아시아에서 아시아쪽으로 동진하지 못하고 에게해와 그리스 유럽 쪽으로 서진한 이유도 지절의 상태에서 찾았다. 서쪽의 지절률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높은 지절률을 보이는 곳은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연안 펠로폰네소스반도와 이탈리아 반도, 서유럽, 아메리카 대륙의 동쪽과 서쪽, 동아시아 중위도 지역 등이다. 모두 고대문명이 발생하거나 중세 및 근대 문명이 꽃 핀 곳들이다.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와 중앙아메리카도 지절률이 높은 땅이지만 이들은 적도에 너무 가까운 저위도라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강을 건넌 의미 - 우리가 요단강이라 부르는 요르단강은 해발 2814m 높이로 눈 덮힌 헬몬산에서 발원해 갈릴리해를 거쳐 사해로 흘러간다. 폭정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와를 따라 가나안의 예리코를 침범하는 이른바 성전(聖戰) 과정에서 요르단강을 건너게 된다. 이들에게 예리코성 점령은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 간 약속이 이뤄졌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4~5월은 아직 우기(雨期)가 끝나지 않아 강물의 수위가 대단히 높았기에 강을 건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예리코 주민들은 깎아지른 듯한 예리코성 성벽에 안도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르단강 건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방심하다 함락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고고학적 발굴 결과 예리코 성벽은 공성전에 의해 함락된 것이 아니라 지진 같은 지각변동으로 무너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실제 이 시기에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

*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이유 - 루비콘강은 이탈리아 북부의 전장 80km 짜리 작은 강이지만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의 운명을 바꾼 강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70년 전후로 카이사르는 성공적인 정복 전쟁으로 막대한 부와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었다. 이에 일부 원로원들이 경계심을 품고 그의 집정관 재임 시 불법행위를 벌할 목적으로 그를 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갈리아 원정에서 귀국 중이던 카이사르는 본국과 속주 영토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당시 로마 국법에서는 군대를 본국에 들이지 못하도록 되지 있었기에 루비콘강을 건너려면 앞서 군대를 해산하고 무장해제된 채로 귀환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따르지 않고 반역의 길을 택했다.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말이 이때부터 나왔다. 어떤 결단을 내릴 경우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에 이르렀을 때 리는 말로 회자되고 있다.

* 가장 용맹스런 군대는 산악지대에서 - 유럽의 최빈국이었던 스위스는 용병부대를 조직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알프스를 오르내리며 심폐기능과 지구력을 키워온 스위스 군대였다. 1513년 노바라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 군대를 격파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들은 이후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병으로 투입되어 1527년 신성로마제국 침범 때 끝까지 교황을 지키다 전원 몰살되는 비극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 같은 충성심이 널리 알려지면서 바티칸 근위병은 이후 스위스 용병들로만 채워진다. 이들은 1616년부터 프랑스 왕궁 경비를 맡았다가 1792년 프랑스 혁명 와중에 루이 16세를 탈출시키고 끝까지 저항하다 전멸당하기도 했다. 스위스 용병과 자주 비교되는 것이 히말라야 부족 중 가장 용맹한 네팔의 ‘구르카족’이다. 영국이 1814년 구르카왕국을 침공했을 때 이들은 ‘쿠크리’라는 단검 하나로 대항했다. 영국은 이들의 용맹성을 높이 샀고, 전쟁 후 이들을 동인도회사의 사병으로 편입되어 1857년 인도와의 세포이전쟁 때 큰 활약을 한다. 1, 2차 세계대전과 6.25, 포틀랜드, 걸프 전쟁 등에 참전해 용맹을 떨쳤다. 현재도 영국 왕실 근위병으로 투입되고 있다. 영국군과 동일한 연봉을 받기에 네팔 젊은이들은 매년 가을 히말라야 산맥에서 펼쳐지는 혹독한 용병 선발에 앞다퉈 지원하고 있다.

* 동서양을 이어준 초원길과 실크로드 - 유라시아 대륙 북쪽의 추운 타이가 기후대와 남쪽의 사막 지역 사이에 ‘스탭’이라는 초원길이 동서로 6000km 이상 펼쳐져 있다. 유목민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말을 타고 쉽게 이동할 수 있어 기원전 스키타이족부터 그리스 페르시아 흉노 몽골의 지배 하에 동서를 연결하는 광대한 천연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초원길 남쪽에는 실크로드가 있다. 사막 실크로드는 이탈리아-소아시아-서아시아-이란고원-중앙아시아-파르미고원-타림분지-중국 장안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통해 불교와 간다라 미술이 전파되고 동서양 물품교역이 극대화되었다.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따라 절도사를 배치해 치안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송나라 시대에 와서는 오랑캐의 공격이 심해지면서 바다 실크로드가 개척된다. 중국 광저우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반도와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는 이 길을 통해 이질적인 문화 문명간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질 수 있었다.

* 높은 대지 ‘메사’에 자리잡은 요새들 - 에스파니아어로 메사(Mesa)는 탁자처럼 정상은 평평하면서 가장자리는 가파른 벼랑으로 이뤄진 지형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마사다(Masada) 요새’가 대표적이다. 70년 이스라엘 함락 후 유대인들이 마지막까지 로마에 항전했던 곳이다. 사해 해변으로부터 높이 434m 높이의 암석으로 이뤄져 있는데 정상의 면적이 무려 7만㎡에 이른다. 궁전과 수조, 로마식 목욕탕, 창고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스리랑카 중부 정글지역의 ‘시기리야(Sigiriya)’도 180m 정도의 거대 화강암 덩어리 위에 세워진 천연 요새다. 이 중턱에는 ‘거울의 벽’이라 불리는 길이 140m, 높이 40m의 거대한 갤러리가 있는데 지금도 프레스코화 20여 점이 남아있다. 페루의 맞추픽추(Machu Picchu)는 잉카 문명의 흔적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세계적 유적지이자 천혜의 요새다. 우루밤바 계곡의 약 2400m 고산지대에 입지해 약 400여 년 이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에스파냐 군대의 공격을 피해 비밀리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예일대 고고학 교수인 하이럼 빙엄이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페루 정부는 그가 가져간 잉카 유물의 반환과 함께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 카스피해는 바다인가 호수인가 - 중앙아시아 서쪽의 카스피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해(內海)로 한반도의 두배 크기다.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호수로 볼 수도 있지만 크기나 염분으로 보면 바다가 분명하다. 이곳은 페르시아만과 서시베리아에 이어 세계 3위 매장량으로 추정되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있어 주변국들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다. 유전을 가진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과 러시아는 이곳을 바다로 본다. 그래야 영해, 경제수역, 대륙붕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원이 부족한 이란은 호수로 간주해 연안 5개 국들이 20% 씩 균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카스피해 분할을 둘러싼 갈등은 2018년에 협상이 일단락되었다. 5개국은 일단 이곳이 바다라고 규정했다. 이어 대부분 지역은 공동수역으로 관리하고, 해저자원은 각국에 분할키로 했다. 한편 이곳은 석유, 천연가스 외에 철갑상어 세계 어획량의 80%를 차지하기도 한다.

* 수중암초를 섬으로 바꾼 일본 - 일본은 ‘오키노토리시마’를 자국의 최남단 섬이라고 주장한다. 행정구역상 도쿄도 오가사와라촌 소속으로 도쿄에서 약 1740km 떨어진 이곳은 섬이 아니라 작은 암초에 불과하다. 국제법상 섬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이며, 만조 시에 수면 위에 있어야 한다. 일본정부는 수몰위기에 처했던 이곳을 1931년에 도쿄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는 섬 조항에 부합되도록 인공적으로 개조하고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설정했다. 두 개 암초와 관측시설, 주변 산호초로 이뤄진 이곳은 동서로 4.5km, 남북으로 1.7km에 이른다. 물론 주변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 소유라 해도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질 수 있는 ‘섬’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국제법 판례로도 2016년에 중국이 암초 간척사업으로 만든 51만㎡의 남중국해 이투아바섬 조성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궁극적으로 이곳을 더 개발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저자는 카이로선언 등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탐욕에 위해 점령한 모든 일본 영토를 포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며, 이곳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국제법상 불법행위라고 비판한다.

* 그린란드가 남아메리카보다 큰가 - 그린란드는 원래 노르웨이 영토였다. 덴마크 스웨덴 등으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1905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결정으로 현재는 덴마크 영토다. 선거로 뽑은 두 명의 대표가 덴마크 의회에 참석한다. 러시아 견제를 위한 그린란드의 지정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던 미국은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이 1억 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다. 지금은 1950년 미군 공공기지가 주둔해 있다. 그린란드는 세계 최대의 섬이다. 세계 지구로 보면 남아메리카 대륙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8분의 1 정도라고 한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들어지는 지도의 특성상 고위도 지방이 실제보다 과장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이 섬은 남서쪽에 희토류가 대량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2021년 여름에 눈이 아닌 비가 내리는 등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어 지구환경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관한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어디? -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부터 흑해와 캅카스산맥을 거쳐 카스피해와 우랄산맥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통용되어 있다. 하지만 18~20세기 유럽지도를 보면 그 경계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러시아는 16세기부터 우랄산맥을 유럽의 경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인 혼잡성 탓에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등 캅카스산맥 주변의 ‘캅카스 3국’은 유럽에선 유럽권 국가로 인정받으면서도 유엔 통계국에선 여전히 아시아로 분류되곤 한다. 2014년 아제르바이젠 수도 바쿠에서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해당국들은 자신들이 유럽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터키 남쪽 지중해에 위치해 남북으로 다른 정부가 세워진 키프로스섬도 논란거리다. 터키 자체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경계로 유럽 터키와 아시아 터키로 구분되는 마당에 이 섬 역시 그리스 관할인 남키프로스는 유럽으로, 터키 구역인 북키프로스는 아시아에 속한다. 그리스와 터키의 대립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현재 유엔이 관할하는 완충지대가 곧 유럽-아시아 경계인 셈이다.

* 강했지만 취약했던 스파르타 - 그리스의 라이벌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는 그리스와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통치를 했다. 아테네가 개인의 재능과 권리를 중시한 반면 스파르타는 모든 사람을 단조롭고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시켰다. 아테네가 이방인에게 문호를 개방한 반면 이들은 교류를 피하거나 살해했다. 스파르타는 모든 토지를 환수해 모든 시민에게 균등하게 배분함으로써 사회불안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산지가 많은 다른 도시국가에 비해 스파르타는 에우로타스강 유역의 비옥한 평화를 끼고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했기에 폐쇄적인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이들은 평화시에도 전쟁에 대비해 군사훈련을 했다.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믿고 군국주의적 평등사회를 꾀했다. 내정에서는 엄격한 시회규범을 유지했고 외교에선 정복 일변도였다. 말보다는 행동을 중요시했다. 국민의 대다수가 시민이 아닌 농노들이었기에 이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특단의 관리가 필요해 엄격한 군국주의를 택했다. 저자는 잉여 식량이 담보된 땅만으로는 지속가능한 문명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스파르타의 교훈이라고 지적한다. 부족함을 메울 수 있는 국민들의 극복능력 배양과 창의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뉴욕 맨해튼 스카이라인의 비밀은 ‘땅 밑 지질’ - 영국은 1815년 세계 최초로 땅 밑의 암석을 파악하는 ‘지질지도’를 만들었다. 지하자원 채굴과 건축재 공급만이 아니라 고층빌딩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고층건물을 짓기 위해선 지반의 단단함부터 파악해야 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독특한 스카이라인도 땅 밑의 지충을 구성하는 암석 탓이다. 뉴욕은 ‘편암’이라는 단단한 변성암 덩어리들이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어 초고층 건물의 엄청난 무게를 떠받치기에 충분하다. 다만, 남단과 북단을 제외한 섬의 중간 지점들은 연약지반이 받치고 있어 초고층 건축이 어려웠다. 그래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양쪽으로 초고층 빌딩 숲과 중간의 유니온스퀘어 같은 낮은 지대로 이뤄지게 됐다. 참고로 미국은 1626년 네덜란드 식민지 총재가 인디언으로부터 현재 시세로 1000달러 정도에 해당하는 물품과 교환해 맨하튼을 사들였다. 이후 영국 함대가 1664년 강제 점령했고 당시 영국 왕 ‘요크’ 공의 이름을 따 ‘뉴욕’이라는 도시이름이 붙여졌다. 한편 영국 런던에 고층 건물이 적은 이유는 도시 땅 밑에 연약한 점토층 지반이 두텁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런던 여름철 지하철 내부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운 이유도 이 점토층이 단열재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 영원한 방랑민족 ‘쿠르드족’ - 쿠르드족은 대부분 이란과 이라크, 터키 인접지역에 거주한다. 아르메니아 레바논 시리아 거주 부족들까지 포함하면 총 인구는 약 33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단일 민족으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가장 큰 종족이다. 오랜 기간 터키인과 공존해 살았기에 문화적으로는 터키와 유사하다. 쿠르르족은 근세 역사에서 가장 배신을 많이 당한 민족으로 기록된다. 최근 100년 동안 8차례나 미국 영국 등 강대국을 돕거나 믿었다가 배신을 당했다. 1923년 로잔조약에 의해 자의적인 그어진 국경선 탓에 민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분리독립을 외치는 목소리를 이용한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번번히 당하고 박해까지 받았다. 최근에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시리아에서 미국 철수 결정을 하는 바람에 주변 국가들로부터 제압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제는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만한 리더십도 없어 쿠르드족의 통일국가 수립은 요원해 보인다고 저자는 안타까워 한다.

* 이스라엘에 요르단강 서안이 중요한 이유 - 요르단강 서쪽 땅을 국제사회는 흔히 ‘요르단 서안(West Bank)’이라 부른다. 가자 지구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속한다. 가자 지구에 비해 7배 넓으며, 암석지대에 남북 능선으로 이뤄졌다. 이스라엘은 평원지구인 가자 지구는 양보해도 요르단강 서안 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곳이 군사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은 지대가 높아 정상에서 대포나 미사일 같은 중화기를 이스라엘 쪽으로 쏘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더욱이 요르단강 서안에서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까지는 최단거리가 고작 80km에 불과하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구로 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곳 팔레스타인인들은 물론 그 어떤 집단도 자국 안보와 존립을 위협할 만큼 강력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 고구려가 수·당 군대를 무찔렀던 비결 - 지리적으로 볼 때 고구려의 방어 전략은 산성(山城)에 있었다. 실제로 고구려 성의 85%가 산성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잇단 침공을 패퇴시킨 것은 그들의 주요 침공 루트에 방어용 산성을 단단하게 구축한 덕분이었다. 특히 요동 지역 방어에 주력하기 위해 육로와 수로의 고통 요충지와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산성을 축성했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고구려는 60여 개 성에 행정기관인 주와 현을 두어 정치를 했다. 성이 공 정치단위이며 도시기능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지역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성곽방어체제를 강점으로 군사조직도 행정조직과 일치시켜 성의 성주가 행정조직과 군대 통솔권을 가졌다.

* 아프리카 비극의 해결책은 없나 - 1914년까지 유럽은 아프리카 대륙의 90%를 지배했다. 유럽열강들은 아프리카 땅을 나눠 갖기 위해 임의로 국경선을 만들었다. 지리적 특성이나 역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국경을 설정한 결과, 같은 부족이 국경선에 따라 흩어지고 전혀 이질적인 민족이 뒤섞이게 되었다. <머독의 종족지도>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약 862개 원시사회가 있는데, 그 중 아프리카에 300개 민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의적인 국경선으로 인해 종족간 충돌과 분쟁은 다반사가 되었다. 분쟁은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을 가로지르는 중남부에 집중되었다. 저자는 종족별 영역을 기반으로 자연환경과 생태적 환경을 고려해 국경을 설정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유럽 열강이 저지른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불모지역과 하천유역을 공유하도록 영토를 조정하고, 특히 중부 아프리카 영토를 재설정하고, 자연환경의 지형지물로 경계를 고려하며, 남북 간선 교통망을 개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아프리카연합의 중립적 씽크탱크 태스크포스 조직과 기금 조성을 주문한다.

* ‘옴팔로스 증후군’에 걸린 땅 - 옴팔로스(Omphalos)란 그리스어로 ‘배꼽’ 또는 ‘방패의 한복판에 있는 돌기’를 뜻한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옴팔로스 증후군이란 자신이 사는 곳이 지구의 중심이라고 믿는 일종의 자기과신 증세다. 그리스의 고대도시 ‘델포이’가 대표적이었다. ‘신들의 신’ 제우스가 인정한 세상의 중심이라 믿은 이들은 델포이신전에 반원형의 옴팔로스 돌을 세웠고, 그리스로부터 거리에 따라 근동(近東) 중동(中東) 극동(極東)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페루 남동부의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중심이었다. 그 북서쪽에 ‘맞추픽추’가 위치한다. 이탈리아 반도의 척추 지점에 위치한 로마는 로마제국의 중심이었다. ‘포로 로마노’라 불리는 광장이 로마의 중심이 되었고 이곳에 그리스어의 배꼽이란 뜻의 ‘옴빌리쿠스’가 설치되어 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2의 로마로 건설한 콘스탄티노플도 서로마의 수도처럼 세계의 배꼽이라고 불렸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대표적이다. 중화란 한족(漢族)의 문명권을 뜻한다. 이외 나라는 모두 오랑캐라며 배척했다.

* 비극적 사건이 빈번한 ‘삼각지대’ -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버뮤다 삼각지대’다. 미국 남부 플로리다 해협과 버뮤다섬, 푸에르토리코를 꼭지점으로 하는 이곳에서 지난 몇 백년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선박과 항공기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지구의 자기장 위기설, 이상지층설 등이 난무했다. 최근에는 호주 모나시대학 모너건 교수가 주장한 ‘메탄가스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는 심해에서 다량의 메탄가스가 바다 표면으로 유출되면 배가 부력을 잃고 침몰하게 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비행기 추락은 설명이 어렵다. 이라크 바그다드 북서쪽 팔루자 주변의 수니파 무슬림이 많이 사는 ‘수니 삼각지대’도 유명하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주요 지지기반이던 이곳은 미국의 개입 후 지금은 테러리스트들의 봉화대가 되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일대의 접경지대를 포함하는 ‘트리플 프런티어’도 무장세력과 도주자 여권 위조범, 강력범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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