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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칼럼] 인간 본성과 복지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의 미래

입력 2020-02-0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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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우 보현한의원 원장
복지주의는 현대 국가의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이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정부에 의한 복지를 강화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확대된 복지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하 전자)과 제한된 복지정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하 후자)의 입장 차이를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내버려둘 경우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힘들다고 인식한다. 뛰어난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정부의 보살핌이 있어야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하고 노후를 준비할 수 있다고 본다. 국가는 어버이처럼 국민들을 보살피고, 그들로 하여금 정부에서 정한 복잡한 규정들을 준수하도록 강요한다. 만약 개인을 자유롭게 내버려둘 경우 사회는 금세 무질서해지고, 약탈과 폭력이 난무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관점은 일견 성악설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을 ‘빈서판(Blank Slate)’으로 보는 입장에 더 가깝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백지와 같아서, 특정한 정보를 학습시키거나 특정 규칙을 따르도록 할 경우, 쉽게 인간의 사고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고 심지어 원하는 대로 유도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후자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 큰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고아로 태어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노력하면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나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예상한다. 개개인이 이기심을 가지고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가격과 같은 개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자생적인 조절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자의 이익추구가 적절히 조절될 수 있다고 여긴다. 정부가 모든 분야에 세세히 관여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 진화된 관습과 제도들이 사회질서를 적절하게 유지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람들을 강하게 통제하지 않아도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입장은 인간 본성이 백지가 아닌 비교적 고정되고 구체화된 밑그림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성립된다. 인간에게는 이기심 외에도 이타심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적 특성들이 상수로서 존재하며, 교육이나 환경을 통해 변경하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때문에 몇몇 특성들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혹은 억누르는 제도 및 입법을 반대한다.

정부의 본질과 역할을 보는 관점에서도 둘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정부가 사회의 전반적인 질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시장실패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정부의 개입이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개인이나 개별기업은 오직 사적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들로서, 정부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열등하며, 공익은 오직 정부만이 추구할 수 있다고 여긴다. 개인의 본성이 매우 유연하다고 보기 때문에, 사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라도 공직을 맡게 되면 공익을 위해 업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공무원이 늘어야 하고, 동시에 정부 권한이 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후자는 정부 또한 개개인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정보와 부족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한다. 하이에크가 지적한 것처럼 정부도 ‘구조적 무지(constitutional ignorance)’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당장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더라도 정부에서 섣불리 개입할 경우 개인에게 맡겨두었을 때보다 오히려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본다. 실상 정부의 행동이란 것도 개인들에 의해 집행되는 것이며, 개별사안에 대한 판단력은 그것을 담당한 공무원 개인의 지적 수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의 구체적 지식수준은 해당사안의 이해당사자보다 오히려 더 낮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사익을 중시하던 개인이 공직을 맡게 된 사실만으로 수많은 이해관계의 상충을 고려해서 진정한 공익을 발견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공무원이나 정치인들도 어디까지나 공익이 아닌 그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려고 애쓸 뿐이다. 결국 공익 발견에 대한 기대는 인간의 지적 한계를 간과한 것이며, 개인의 사적 노력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 자생적 질서의 역할이다. 따라서 사회가 복잡해지고 정부의 권력이 커질수록 정부실패는 더 빈번히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정부의 역할은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육에 대해서도 관점 차이는 극명하다.

전자는 모든 사람에게 가급적 동일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별적 교육이야말로 경제적 불평등을 만드는 근본원인이자 모든 계층적 차별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이나 가정형편에 따라서, 심지어는 재능이나 취향에 따라서조차도 교육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빈서판’ 이론처럼 인간의 재능이나 개성에는 큰 차이가 없고, 차이가 있더라도 교육과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고 보아, 사교육을 허용할 경우 부모의 부에 따라 자녀의 성적차이가 생길 것을 우려한다. 다른 한편으로 서로 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간의 인식 차이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나 혼란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는다. 즉 사교육은 사회통합에도 방해가 된다는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사교육을 최대한 억제하고 공교육을 강화하는 정책에 찬성한다.

후자는 기본적으로 정부는 최소한의 공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가정이나 사회관계 속에서 개인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익혀야할 수많은 암묵적 규율과 지식들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공교육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본다.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개인들이 다양한 환경에서 학습한 특유의 기술과 지식들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에 획일적 교육을 지양한다. 공교육은 본질상 획일적 교육을 지향하므로 그것이 강화될수록 사회는 더 단조롭고 발전이 정체될 수밖에 없다. 또 공교육을 강화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적인 평등에는 기여하는 바가 크게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교육은 본성을 바꾸기보다는 오히려 타고난 개성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도구에 가깝다.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면 더 평등해지기보다는 재능에 따른 차이가 더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을 강화할 경우 오히려 타고난 외모나 지능에 따른 계층화가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획일적인 공교육을 강화하는 대신 자녀와 부모들의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사교육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자와 후자의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각 개인들에 대해 딱 잘라 일대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관점을 주로 갖든 위와 같은 경향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안에 따른 견해 차이가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 본성 중 어느 것에나 부합하는 정치 혹은 경제체제를 선택해야 된다는 당위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본성에 부합한 체제인 사회주의가 나머지 다른 본성을 오해하고 그것과 괴리된 방향으로 나가 실패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타심에 대해서도 착각했다. 인간의 이타심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인간은 나누지 않는 게 자살과도 같을 때 비로소 나눈다. 혈연관계가 아닌 대상에 대한 호혜는 그 대상과 지속적인 관계가 이어질 것이 확실할 때 이루어진다. 그래야 내가 나중에 위험에 빠졌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원시인들은 고기나 꿀과 같이 획득하는데 우연과 운이 크게 작용하는 산물은 나눴지만, 과일이나 야채 같은 노력에 의해 생산량이 좌우되는 식량들은 가족 내에서만 분배했다.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자에게 지속적이면서 무조건적인 호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구호로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결코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이 점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근래에 유행하는 페미니즘도 일정부분 인간의 본성을 ‘빈서판’으로 보는 인지적 편향의 산물이다. 사회적 편견이나 관습 때문에 여성이 일방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은, 남성과 여성의 육체적, 심리적 측면에서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한 오해에 불과하다. 다수의 분야에서 유리천장은 사회적 차별에 의한 것도, 남녀 간의 업무능력 차이에 의한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는 남성과 여성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경향성은 진화된 심리의 성적 차이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더 높은 지위로 올려가기 위한 지위 경쟁에 남성은 적극이지만, 여성은 소극적이다. 실패가능성에 대한 태도도 서로 달라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경쟁적이면서 위험한 업무를 맡는 경향이 있다. 흔히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성들, 공격성, 야망, 집요함, 투쟁심 등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강하다. 이런 특성들이 남녀 간의 임금격차나 주로 종사하는 분야의 차이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남자애들이 총과 칼을 가지고 놀고, 여자애들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진 교육의 결과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성차에 의한 것이지 결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남성 중심의 지배 권력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차별의 산물은 아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에 기반한 정책들은 남성에게 역차별을 쉽게 허용하며,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큰 손실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름만 들어서는 도무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성인지예산제도가 대표적 예이다. 이런 제도들은 성차별을 철폐하여 여성 복지를 향상시킨다는 명목에 지출되는 일종의 복지예산이다. 올해만 해도 무려 30조가 넘게 책정되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예산이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데 사용되면,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기회를 상실할 것이고, 특정 업무에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 업무에서 배제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여성할당제부터 최근 추진된 여성이사 의무할당제와 같이 시장파괴적인 정책들은 앞으로도 쏟아져 나올 것이다. 경찰이나 소방관 등의 직업분야에서 여성할당제가 어떤 폐해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우리의 진화된 심리구조와 특정 이념이나 정책의 상호적합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선행 작업은 인간 본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도 조심해야 한다. 인간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자는 주장은 인간 본성 모두를 만족시키자는 주장과는 다르다. 단순히 어떤 체제가 본성에 더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의 대부분은 50~150명 규모의 집단생활을 하던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선조들의 적응도를 높여주었던 우리 본성의 적지 않은 부분들이 현대사회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질투와 시기심 그리고 도둑질이나 폭력성과 같은 본성도 있다. 아쉽게도 자본주의는 이런 본성들까지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이 틈을 한때는 사회주의가 파고들었고 지금은 그 바통을 복지주의가 이어받고 있다. 반복되는 자유주의의 위기는 어쩌면 여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는 인간의 진화된 본성에 잘 부합하는 체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거대한 사회적 협동으로 승화시키는 거의 유일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규정할지, 우리 타고난 본성 중 어떤 부분을 더 만족시키고 어떤 부분을 더 제한할지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분명한 것은 그 결정이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과 지나치게 괴리된 체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본성 중 일부를 제한해야만 인류가 번성할 수 있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혜택은 특정한 심리와 부합하지 않는 규율들을 채택한 덕분에 가능했다.

우리 자신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과 지적능력은 위대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거대한 사회적 분업을 세세히 파악하고 지시하기에 우리가 가진 이성만으로는 아직은 역부족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 점은 더 뚜렷이 드러난다. 복잡계 과학과 AI의 발전이 이 한계를 일정 부분 보완해주겠지만, 먼 미래에도 우리가 자생적 질서에 의존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정체된 이념이나 체제가 아니다. 사회가 진화하듯 자유주의도 진화하고 있고, 그래야만 한다. 만약 자유주의가 경직된 신조였다면, 이미 적응에 실패해 과거에 도태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주어질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규칙들에만 의존할 수 없다. “최대한 사회의 자연발생적 힘을 활용하고, 최소한의 강제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이다. 이를 문제해결에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힘이 작동하는 방식과 조건에 대한 이해라는 점이라고 하이에크는 주장했다. 그를 위해 정원사가 식물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듯이 자유주의자도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바로 인간 본성에 대해 더 깊이 그리고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과들을 꾸준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근래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 행동생태학 등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 덕분에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졌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성과들을 자유주의자들보다 복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더 빨리 받아들이고 활용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자유주의자들이 이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야 한다. 이런 노력은 복지를 만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자유주의의 미래는 이 같은 복지주의의 망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송상우 보현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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