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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느릿한 떨림’ ‘한없이 미세한 박동’을 찾아서…‘끝’이면서 ‘리부트’ 에르베 르 텔리에 ‘아노말리’

[책갈피]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

입력 2022-06-02 18:39 | 신문게재 2022-06-0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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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는 전대미문의 기묘한 비행기 사건으로 또 다른 나와 대면하는 이들의 이야기다(사진출처=픽사베이)

 

그야 말로 작품제목처럼 ‘아노말리’(Anomaly), ‘이상 현상’이다.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의 장편소설 ‘아노말리’는 아무리 “수상작 판매가 보장돼 상금이 10유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공쿠르상 수상작이라지만 그 판매부수가 남다르다. 프랑스에서만 11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다.  

 

그의 8번째 장편소설 ‘아노말리’는 한국을 비롯한 미국, 영국, 독일, 중국, 스페인, 이스라엘, 일본 등 전세계 45개국에서 번역출판됐고 독일에서는 10만부가 팔려나가며 ‘슈피겔’ 베스트셀러 1위, 미국에서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기도 했다. 

 

노벨상, 부커상과 더불어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공쿠르상은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 유언에 따라 1903년 제정된 프랑스 문학상이다. 매년 12월 첫주, 그해 발표된 작품 중 가장 우수한 산문을 선정해 수여한다. 평균 판매고 30~40만부인 공쿠르상 수상작 중 밀리언셀러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1984) 이후 ‘아노말리’가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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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에르베 르 텔리에(사진제공=민음사)

에르베 르 텔리에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희곡작가다. 더불어 과학전문기자로 활동했고 수학자이며 언어학 박사이기도 하다. 

 

1960년 프랑수아 르 리오네, 레몽 크노 등에 의해 창시된 실험문학운동으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실험 문학 집단인 울리포(Ouvroir de Litterature Potentielle 잠재 문학 공동작업실) 회원으로 2019년부터는 는 회장직을 수행 중이기도 하다. 

   

블레이크는 살인청부업자다. 채식요리 배달기업의 CEO인 조를 비롯해 그의 또 다른 이름, 성, 여권 등이 몇개인지도 모른다. 요리, 전자공학, 프로그래밍을 좋아했고 언어적 재능도 뛰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열한살 때의 교통사고로 개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고도 큰 느낌을 받지 못했던, 그 스스로의 표현처럼 ‘기질’이자 ‘능력’인 살인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좀 기운 넘치는 카프카를 닮은 빅토르 미젤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두편의 소설이 있고 문학상도 받았지만 판매부수는 몇천부에 그친다. 생계는 번역으로 이어가고 결국 그는 7번째 소설이자 유작 ‘아노말리’ 탈고 후 발코니에서 투신했다. 클레망스 발머는 그의 담당편집자다.

 

뤼시는 영화적 본능의 소유자로 많은 감독이 선호하는 영화편집자다. 노년의 건축가 앙드레 바니에와 한때는 연인이기도 했다. 파리-뉴욕 간 여객기의 기장인 데이비드는 갑자기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의식이 없는 상태다. 소피아 클레프먼은 애완 개구리 베티의 주인인 소녀다. 발데오사 CEO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유능한 미국인 변호사 조애나는 임신 중이다. 슬림보이는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 중인 나이지리아 뮤지션이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8명은 비행기 조종을 위해, 출장을 위해, 동반 여행을 위해, 투어 콘서트를 위해 오른 비행기에서 겪은 전대미문의 기묘한 사건으로 꿰진다. 몇몇은 빅토르의 유작 ‘아노말리’가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아노말리’는 킬러 블레이크의 또 다른 분신인 조가 아내 플로라에게 추천받은 책이고 이별의 순간 앙드레가 뤼시에게 내민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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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Francesca Mantovani(사진제공=민음사)

  

6월 24일 보잉 787기에 탑승한 이들은 이미 3개월 전인 3월 10일 에어 프랑스 006에 탑승했다 폭풍우를 뚫고 착륙했던 이들이다. 작품 전반부는 그들의 이야기가 이름을 테마로 이어진다. 이들의 이야기 사이에는 간헐적으로 ‘난기류’ ‘장난’ ‘처음 몇시간’ 등이라는 제목으로 기묘한 비행 상태가 묘사된다. 

 

3월과 6월 동일한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 동일한 기착지를 향해 날아가 착륙한다. 그렇게 106일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어떤 장소를 스캔해 다른 곳에 출력한 것”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의 자신들을 대면한다. 

 

6월 비행기 탑승자들이나 그리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던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난기류를 만나 똑같은 곳에 착륙했던 3월 탑승자들이나 황망하기는 매한가지다. 6월 비행기에서 내리니 이미 100일 넘게 다르게 살아온 내 분신이 있다면 어떨까. “나라면 어떻게 반응할까를 8가지로 가정해두고 인물들을 매치시켰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누군가는 스스로를 죽이고 또 어떤 이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끝에서 인물들은 또 다른, 어쩌면 진짜 나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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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Francesca Mantovani(사진제공=민음사)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한 ‘아노말리’는 울리포 소설을 창시한 문학가 중 한명인 레몽 크노의 시에서 따온 ‘하늘처럼 검은’ ‘삶은 한낱 꿈이라고들 하네’ ‘무(無)의 노래’라는 제목의 1, 2, 3부로 나뉜다.

 

각 부는 기묘한 비행사건 전 인물들의 삶, 미국 정부를 비롯한 세계 주요 정상들이 대책을 강구하는 동안 억류된 승객들의 사흘 간 이야기, 이 사건으로 진짜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저마다의 선택을 하는 승객들과 사회 현상을 그린다.

 

작가는 ‘아노말리’에 대해 “장르소설이 아닌 다양한 장르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릴러, 미스터리, SF, 철학, 멜로, 가족소설 등 다양한 장르들이 인물들에 매치되며 혹은 곳곳에 숨어 있다가 얼굴을 내밀곤 한다. . 

 

기묘한 경험과 기억을 공유한 인물들은 숨기고 있던 혹은 인식하지 못하던 또 다른 나를 대면한다. 누군가는 순응하고 또 누군가는 기꺼이 인정하고 부둥켜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기혐오로 괴로워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3개월 동안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와 운명을 마주한 이들의 이야기 ‘아노말리’는 삶의 불확실성,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약함 등을 묘사하며 저마다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모두에게 필요할지도 모를 ‘느릿한 떨림’ ‘한없이 미세한 박동’은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모양의 글자들로 마무리된다. 이를 두고 에르베 르 텔리에는 “세상의 소멸, 소설의 소멸을 나타낸다”며 “끝인 동시에 시작, ‘리부트’(Reboot)를 나타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가설의 끝, 그 소멸하는 ‘세상’은 저마다의 선택에 달렸다. 3월부터 살아온 나 혹은 어디선가 나타난 6월의 나. 그 선택과 마무리의 주체는 결국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스스로일지도 모른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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