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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인생의 길이 안 보인다면, 이 영화! '행복의 속도'

[#OTT] 다큐멘터리 '행복의 속도', 이제는 단 6명만 남은 봇카의 삶
"빠르지 않으면 어때요. 다치지 않고 천천히 가기만 하면 되죠."

입력 2024-01-03 18:30 | 신문게재 2024-01-0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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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속도
일본의 봇카는 자부심이 대단한 직업군이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봇카인 아가라시 히로아키, 이시타카 노리히토, 타다 쇼헤이의 삶을 천천히 따라간다.(사진제공=(주)영화사진진)

 

만약 행복에 속도를 잰다면 결코 ‘빠름’은 아닐 것이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2021년 다큐멘터리 영화 ‘행복의 속도’는 바로 그 물음에 114분이란 시간 동안 답한다. 두 시간이 채 안되는 러닝타임 속 주인공은 일본의 오제 국립공원에서 일하는 봇카들이다.


해발 1600m에 위치한 고산습원으로 면적이 약 3만 7200ha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자연습지로 다양한 생태계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다양한 희귀 식물을 간직한 자연 박물관으로 불리며 공원의 대부분이 특별보호구역 및 특별천연기념물로 선정된 학술적 의의가 뛰어난 생태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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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11월 정식 개봉한 영화의 포스터. (사진제공=(주)영화사진진)

한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렸던 봇카는 여러 산장으로 짐을 나르는 등짐 배달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에서도 오제국립공원에만 있는 직업군으로 매일 50~100kg 짐을 지게에 지고 산장을 오간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헬기를 띄워 무거운 짐을 옮기지만 여전히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길목에 위치한 산장들이 반기는 건 봇카들이다.


주인공 이가라시는 20년차 봇카로 식재료와 생필품 그리고 산장에서 개인적으로 부탁한 택배나 편지들을 지게 사이에 넣고 ‘걸어서’ 옮긴다. 등짐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은 자동차와 철도의 발달, 인건비의 급등으로 사양길로 접어든 직종이면서 고작 6명만 남은 전문직종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사이에서 사람의 키 두 세배에 달하는 지게를 진 봇카의 모습은 늘 눈에 띈다. 천혜의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지키려는 국립공원답게 오제를 가는 길은 조촐하기 그지없다. 그 중 광활한 습지를 지나는 방법은 일방통행으로 겨우 몸만 지날 수 있는 목판으로 된 외길을 걷는 것 뿐이다. 

 

조금만 삐끗해도 습지에 빠지고 그 곳을 지나면 다시 가파른 산세가 이어진다. 산장은 등산객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이자 봇카들의 돈줄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희생과 균형 그리고 인간애가 가득하다. ‘행복의 속도’를 보면 봇카들의 일상은 꽤 단순하다. 아침에 각자 가야 할 곳의 산장 리스트를 받고 짐을 추린다.

우선적으로 배달해야 할 물품을 구분하고 쓰러지지 않게 쌓는 것은 각자의 노하우에 달렸다. 정오가 되기 전에 약속한 산장에 가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도착한 곳에서 대접받은 한끼 밥상은 도시와는 달리 소박하지만 늘 푸짐하기 그지없다. 그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돌아서는 것이 봇카의 퇴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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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적 특성상 겨울이 긴 이 곳의 봇카들은 늘 서브잡을 뛰어야 생활이 가능하다. (사진제공=(주)영화사진진)

 

영화는 이가라시의 일상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사실 젊었을 때 그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지금의 정적이고 단순한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봇카를 통해 그는 자연이 주는 힐링과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봇카는 정규직이지만 사실상 겨울에는 실업자에 가깝다. 눈이 내리면 위험하기도 하고 국립공원의 자연재생을 위해 자체적으로 문을 닫기 때문. 그렇기에 그들은 겨울이 시작되면 또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한다.

또 다른 주인공 이시타카는 정규직이면서 또다른 비정규직을 계절마다 구해야 하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파해 보려한다. 사라지고 있는 직업에 안주하지 않고 청년봇카대를 결성해 도시에 나가 영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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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이가라시의 아내 역시 몇 안되는 여성 봇카로 활동했다. (사진제공=(주)영화사진진)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단순히 산장업무가 아닌 사람이 직접 옮겨야 하는 수많은 물건들을 찾아나선다. 헬기가 뜨지 못하는 곳이나 높은 빌딩의 물건 나르기 같은 틈새시장을 공략하자는 것. 지역 방송국의 무거운 배터리를 옮기거나 같은 마음을 가진 산악회를 접촉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연출을 맡은 박혁지 감독은 2016년 7월 방영된 EBS ‘길 위의 인생’을 찍으며 봇카라는 직업을 알게 됐고 아예 작정하고 두 인물을 대립시켰다. 부상을 당하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두 가장의 대립된 일상을 통해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인간’의 시각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재미있는 건 이가라시의 엄마는 “네가 행복한 일을 하면 됐다”며 손자들과 즐겁게 노는 반면 이시타카의 아빠는 “월급은 제대로 나오는거냐?”고 걱정한다는 사실이다.

둘 다 이 직업에 대한 만족도와 자긍심은 남다르지만 한 사람은 묵묵히, 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일을 확장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 천천히 가도 된다는 베테랑 이가라시와 봇카를 널리 알고싶은 이시타카는 지금도 여전히 오제의 나무 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오가며 변치않는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행복의 속도2
이가라시가 오제로 가는 과정을 즐긴다면 이시타카는 오제에서의 결과물인 짐배달의 완벽성에 집중한다.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오제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이다. (사진제공=(주)영화사진진)

 

각자 다른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은 오제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하며 힐링 그 자체다.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일본행 항공권을 끊고 싶을 정도로 오제만이 가지진 풍경은 독특하다.

지리산 속 같다가도 갑자기 순천만의 풍경이 연상되지만 확실히 일본만의 정갈한 매력이 화면 가득하다. 무엇보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들의 깊은 울림은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위로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가지만 각자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두 사람의 모습은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직전 4K로 촬영됐다. 지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18회 EBS국제다큐영화제 공식 초청된 후 화제작으로 떠올랐으며 현재 웨이브에서 단독으로 만날 수 있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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