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뉴스 > Culture Board

다시 올지 모를 인생의 인디안 썸머...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연극 '종일본가'

입력 2015-12-23 12:37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5
배우 이도엽 (사진제공=극단 조은컴퍼니)

 

삶의 절반은 고독이며, 또 절반은 외로움이라고 한다.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한낱 외로움일 것이다. 소란스러운 연말, 마음을 가다듬게 해주는 연극 한 편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극단 조은컴퍼니의 연극 ‘종일본가’(작 이선희, 연출 김제훈)는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삶은 두 번 살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은 이 절대 진리를 넌지시 전한다.

 

이번 작품을 쓴 이선희 작가는 1999년에 발표된 이동순 시인의 시집 『가시연꽃』에 수록된 '아버님의 일기장'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부제도 ‘아버지의 일기장’이다. 이동순 시인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한 권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빽빽한 일기장 안의 8할을 넘게 채우고 있는 글자는 ‘종.일.본.가 - 온 종일 집에 있었다‘는 내용이다. 단어 ’종일본가‘를 마주하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오늘도 집을 지키는 아버지. 과거의 습관처럼, 결벽증이 심한 아버지는 오늘도 방을 닦고 마당을 쓸고 식기들을 꺼내 닦고 마당에 한 켠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오래된 애마(자가용)를 닦는다. 그 뿐이다.

 

아내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희망이던 아들 역시 얼마 전 실족사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혼자인 것이 지긋지긋할 법도 하건만 지독히도 꼿꼿이 살아가는 아버지.실족사로 아들을 떠나 보내고, 오늘도 종일본가하는 아버지의 말상대는 마당에 키우는 물고기,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마당의 꽃과 나무들이다.

 

그렇게 종일토록 집을 지키던 아버지에게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죽은 아들과 정말 친한 사이라며 아버지 집에 찾아와 며칠만 머물게 해달라 한다.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아버지는 어린 여자와 위태로운 동거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눈물도 멈추게 하는 소리내서 웃는 강아지 인형을 들고 온 맹랑한 은실이 밉지 많은 않고,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여자는 봄이 시작될 무렵. 도망치듯 집을 떠난다. 아이와 둘이 남는 아버지. 아이를 안고 평상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때늦은 눈이 온다. 그의 인생에 뒤늦게 아이라는 희망이 찾아 온 것처럼.한가롭게 눈을 맞고 있는 아버지는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더 이상 외롭지 않으니 참 다행이라고.

9
(사진제공=극단 조은컴퍼니)

 

지극히 잔잔하다면 잔잔할 수 있는 연극이지만 관객은 몰입했다. 그것도 생생하게. 아버지 역 배우 이도엽의 열연, 아버지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주면 인물들의 힘이 크다.20~40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인생‘을, 50~60대 부모님은 ’찬란했던 과거와 현재의 일상에서 작은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극이었다.

 

아버지는 주로 방 안보다 마당 중간에 자리 잡은 평상에 앉아서 종일본가 한다. 특히 관객을 등지고 뒷모습을 주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 한 켠이 시큰해진다. 혼자 김치찌개를 끓여 먹는 모습, 김에 밥을 싸 먹는 모습, 김장을 담는 모습 등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아버지는 다시 올지 모를 인생의 인디안 썸머( 만년에 맞게 되는 행복한 성공) 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연극은 봄, 환절기, 여름, 장마, 여름감기, 가을, 만추, 인디안썸머, 겨울, 한파, 그리고 다시 봄이란 계절의 변화를 잔잔하게 그려낸다. 이는 아버지 인생이 흘러가는 모습과 어딘가 닮아있다. 아버지 집 밖에서는 끊임없이 계절이 흐르듯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급변하듯 말이다.

    

포스터가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는 점은 아쉽지만 감동을 강요하지도 않는 연극이다. 과장도 미화도 없다.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오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이 고맙게 느껴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며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는 듯 하다. 심각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보일러 수리공 박씨의 웃음은 함께 엉덩이를 살랑거리게 만든다.

 

 연극 ‘종일본가’는 오는 12월27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볼 수 있다. 김제훈 연출. 김태훈, 이도엽, 김민경, 오주환, 이선희, 황진상, 전익수, 라경민 등이 출연한다.

 

정다훈 객원기자 otrcoolpen@viva100.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