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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뷰] 소설도 아이도 모두 'Birth'가 있는데..."난 글만 쓰고 싶어"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제시하는 '잉태'의 의미

입력 2023-11-0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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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1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제10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등 국내 주요 영화제에 이어 첫 해외 영화제인 제57회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화제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제공=(주)디오시네마)

 

“난 둘 다 잘하잖아.”

결혼과 출산 이후 제대로 된 창작활동을 하는 선배들을 본 적 없는 재이(한해인)는 요즘 주목받는 신인 작가다.늘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성실한 남자 건우(이한주)와는 비혼과 비출산을 전제로 목하열애중이다. 동기들조차 재이가 결혼과 출산을 할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뷔작으로 여러 홍보활동을 강행해야 했던 재이는 자신만의 규칙을 세웠다.

아무리 긴 시간이 걸려도 자신의 인정하는 떳떳한 작품만을 출판할 생각이다. 첫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두 번째 원고를 보고 극찬한 뒤, 차기작까지 탐내 하던 그때 덜컥 아기가 생긴다. 당연히 낳지 않으려는 여자와 가족이 되자는 남자의 실랑이가 진부해질 무렵, 관객들은 채식주의자인 재이가 (예비)시어머니가 해준 갈비찜을 몰래 뜯고 있는 장면으로 배속 생명이 태어날거란 ‘확신’을 갖는다.

사실 위의 대사는 ‘작가와의 대화’로 만난 대학교수의 말이다. 국문학 교수인 그는 촉망받는 작가의 부른 배를 보고 “힘들면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남긴다. 본능적으로 일하는 엄마이자 모성이 준비되지 않은 여성의 불안함을 눈치챘을 터. 아무도 재이의 상황보다 아이의 건강을 챙길때 그는 “책이 좀 늦어져도 괜찮다. 임신과 출산으로 쓰지 않는 작가는 뭘 해도 글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재이는 폭풍 눈물을 흘린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극중 재이와 건우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 좋아하는 낚시에 와서도 잠만 자는 남자와 내키지 않았지만 기꺼이 따라와 책을 읽는 여자의 모습이다. (사진제공=(주)디오시네마)

 

화면에 나오지도 않지만 친정엄마도 해주지 않은 말이다.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 갈거라 믿었던 임신은 쉽지 않다. 늘 데뷔가 힘들었던 후배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도 그는 부른 배를 안고 위스키를 홀짝여야했다. 약간의 알콜은 괜찮다는게 그가 믿는 유일한 산부인과 의사의 지론이지만 그의 두번째 책은 호르몬의 영향인지 뭔가 개운치가 않다.

건우의 일상 또한 새생명이 찾아오면서 바뀌었다. 각자의 삶에 충실하자는 삶의 모토가 ‘내 아이’의 존재로 바뀐 지금, 운 좋게도 근무하는 영어학원 분점의 원장 자리가 나왔다. 딱히 완장 찰 욕심은 없는데 이 곳에서만 5년 넘게 충성해온 자신의 희생을 알아준 대표가 고마울 따름이다. 상담하러 온 학부모의 등록률은 백전백승. 아이들도 자신을 무척 따르는 탓에 새 생명의 탄생을 기점으로 자신의 인생도 피려는 조짐에 내심 뿌듯하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3
극중 유독 과하게 들렸던 누군가 연필깎던 소리가 주는 울림은 꽤 명징하다. “이래서 사람 잘 써야 돼”라던 학원 원장의 푸념은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 고용의 비극을 상징함과 동시에 건우가 가진 유학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시발점이 된다. (사진제공=(주)디오시네마)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연출을 맡은 유지영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출발한 걸로 전해진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은 해당사항이 없지만 본인이 직접 당시 남자친구와 고민했던 상황을 영화로 확장한 것. 영문제목인 ‘Birth(탄생)’은 실제 재이의 두번째 소설 제목으로 등장하는데 출판사의 직원이 “공감되지 않는다. 자신의 잉태한 생명체를 이렇게 죽도로 미워할 짓인가”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사회적으로 박제된 모성애의 정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의 후반 부분이 너무 친절한 부분이 있지만 이는 배우들의 드라이한 연기톤이 상쇄한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집중해서 매 장면마다 온전히 캐릭터에 몰두하는 한해인과 이한주의 연기는 탁월하다. 조연들조차 실제 어딘가에 살고있을 법한 생생한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임신과 결혼을 포기한 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헬조선’의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봐야하는 이유는 극명하다. 그럼에도 당신은 태어났다고.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누군가의 희생을 가장 정면으로 다룬 올해의 수작이다.115분.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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