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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일제 수탈의 현장에서… 목이 메이다

[근현대사의 흔적들] ③군산

입력 2021-04-20 07:10 | 신문게재 2021-04-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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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 건립된 채만식문학관. 채만식은 일제 수탈기의 서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높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진=남민

 

◇ 군산의 ‘수탈재벌’ 시마티니

 

1903년 일본 야마구치에서 주조업으로 큰 부를 일군 시마타니 야소야가 군산으로 들어온다. 술의 원료인 쌀을 찾아 들어온 그는 광활한 곡창 호남평야의 토지를 5년여 동안 150만 평이나 사들여 거대한 농장주가 된다. 막대한 양의 쌀을 건조해 쌓아두기 위해 창고와 마당도 만들었다. 이 창고와 마당은 지금 군산 개정면의 발산초등학교로 변해 있다.

 

쌀 수탈로 거액을 만지게 된 시마타니는 조선의 문화재들이 돈이 될 것으로 간파하곤 곳곳에서 긁어 모았다. 커다란 석탑과 석등에서부터 작은 보물까지 닥치는 대로 챙겼다. 보관을 위해 3층짜리 콘크리트 금고 건물까지 지었다. 당시까지 최대 금고였던 그 건물은 지금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그 많은 문화재와 농장을 두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옛 일본 제18은행 전경. 사진=남민

 

적산가옥과 모든 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동결되자 시마타니는 “재산을 모두 두고 돌아가느니 차라리 한국인으로 살겠다”며 귀화신청을 한다. 미군정이 곱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끝내 그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군산에서 마지막으로 일본에 돌아간 일본인이 되었다.

 

시마타니가 수탈해 이곳에 남긴 문화재 중 ‘5층석탑’이 있다. 신라 양식을 따른 고려석탑으로, 현재는 1개 층이 사라져 4층 석탑으로 남아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귀한 유물로 보물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특히 눈길 끄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원통형 기둥 돌에 살아 꿈틀대는 용의 모습을 양각했다. 우리나라 유일의 석등으로 보물 제2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의 웃는 얼굴과 눈을 맞춰 아이를 낳았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인근 지역에 또 한 명의 일본인 재벌 농장주가 있었다. 23세의 야심만만한 게이오대학 재학생 구마모토 리헤이다. 그는 1935년에 현 군산간호대학 터 일대에 논 3000 정보를 확보했다. 그의 소작인이 3000가구에 달했고 딸린 가족이 무려 2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구마모토의 농장 별장은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인 쌍천 이영춘 박사의 집으로 변한다. 이 박사는 구마모토 농장의 연구원으로 부임했던 인연으로 이 집을 계속 이용하게 됐다.

 

 

당시로선 최고급 농장별장이었던 이영춘 가옥.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건축물이다. 사진=남민

 

‘이영춘 가옥’은 한식과 양식, 일식 건축을 혼합한 집으로 구마모토가 1920년대에 최고급 자재로 지은 농장별장이다. 건축비가 조선총독부 관저 이상으로 들었다고 하니 놀랍다. 일본 토지 사냥꾼이 이 땅에 지은 저택이 그러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미터(m)법’을 적용해 지었다고 해 건축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호남평야를 삼킨 고리대금업 일본 은행

 

호남평야를 접수한 일본인 지주들은 식민농업회사 이엽사(二葉社)를 통해 조선인 농민들의 소작료를 75%까지 올렸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1927년 11월 옥구농민조합과 서수농민조합, 서수청년회를 결성해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결국 악덕 일본인 농장주에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시위 주도 혐의로 간부 장태성이 구속되자 500여 명의 농민들이 몰려가 그를 구출한 후 만세를 불렀다. 경찰은 이 중 80여 명을 체포해 혹독한 취조를 했고 34명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거사는 ‘옥구농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일제의 수탈은 군산에 일본 은행이 들어오면서 더욱 기승을 부르게 된다. 일본인 토지사냥꾼들은 저리의 자금을 대출받아 토지를 사들이며, 농민에게 소작료 40%만 내면 ‘영구소작권’을 주겠다고 유인한 후 수탈해 갔다. 이후 소작료도 멋대로 높이고 비료 값이나 농자재 값까지 소작인에게 부담시켰다. 농민은 눈 뜨고 코 베이는 처지를 당했다.

 

가산을 탕진해 몰락한 수많은 농민은 만주지역으로 정처없이 이주를 떠났다. 눈물의 ‘민족 대이동’이었다. 일제는 옛 군산항 근처의 늪지대 매립지에 장미동, 월명동을 만들고 일대에 일본 조계지(일본인 거주지)를 구획해 은행과 세관을 세워 수탈해 갔다. 정미소와 쌀 창고도 대거 들어섰다. ‘쌀 저장 창고’라는 뜻의 장미동(藏米洞) 이름도 그렇게 생겨났다.

 

 

옛 군산세관 본관 전경. 사진= 남민

 

장미동의 구 군산세관 본관은 일본의 요구로 우리 자본과 노동력으로 지어 일본에 넘겨줬다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는 피눈물과 함께 치욕의 상징인 셈이다. 1908년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수입해 와 지은 서양식 건축물이다. 정면은 좌우 대칭의 설계로 한국은행 본점과 같은 양식이다. 측면과 뒷면의 캐노피는 영국풍을 따라 복합적인 양식을 갖췄다. 국내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앞쪽에 근래 지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고 그 가까운 곳에 일본 제18은행이었던 군산근대미술관이 있다. 일본 나가사키 지방은행으로 1907년 들어섰다. 근처에는 국책은행인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군산근대건축관이 있다. 서울 한국은행 본점 공사 감독을 맡았던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에 참여해 건물이 닮았다. 

 

구 군산세관 본관과 은행 건물들은 호남평야를 삼킨 주역으로 수탈의 아픈 역사와 함께 100년 전 당대 건축미, 군산 근대사를 상징하는 유산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폐경제에 익숙지 못할 때 일본의 화폐 공세에 밀려 농토를 잃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데이터 거래 경제 등 급변하는 화폐경제 이후의 시대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근현대사적 교훈의 여행지라는 점이다. 군산 적산가옥은 우리에게 그것을 암시한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군산의 명소

 

▲고군산군도(선유도) = 고군산군도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간에 몸을 맡겨 유유히 걷기에 아주 좋은 명소이다. 선유도 선착장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선유도 해수욕장은 가느다란 모래사장이 두 개의 섬을 연결한 특이한 경치가 백미다. 서쪽으로 장자도와 대장도가 징검다리처럼 떠 있고 남쪽으로는 무녀도가 있다. 유람선 여행도 좋지만 섬에서 하룻밤 휴대폰을 끄고 초연한 여행을 즐길 것을 권한다.

 

▲새만금방조제 = 군산에서 부안 변산반도로 이어진 33.9km의 새만금방조제는 드라이브만으로도 가슴을 뻥 뚫리게 해 준다. 방조제 곳곳의 쉼터와 휴게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중간지점의 신시도는 방조제로 인해 섬이 육지로 변한 곳이다. 이 섬의 대각산에 오르면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가 눈앞에 활짝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이다.

 

▲채만식문학관 = 일제강점기 세태를 풍자한 소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의 일대기를 접해볼 수 있는 곳이다. 채만식은 소설, 희곡, 수필 등 총 345편에 이르는 다작의 작가로 유명하다. 친일작가라는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그의 작품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의 치열한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글·사진=남민 여행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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