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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과일을 영화로 맛 '보는' 일 만큼은 거.부.한.다

[이희승의 영화 보다 요리] '그림의 떡' 눈으로 맛보는 과일
사과, 토마토, 복숭아...몇 년 새 가격 급등, 영화 '시'의 사과 "제대로 몇 번이나 봤느냐?"는 물음 속 비극 조우
'리틀 포레스트' 단단한 노지 토마토로 보는 사회생활의 고단함, '콘크리트 유토피아' 통조림 과육으로 본 부부의 평행선

입력 2024-03-14 18:00 | 신문게재 2024-03-15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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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
한국 영화계 전설인 윤정희가 15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해 화제를 모았던 ‘시’의 한 장면. 배우 역시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었던 사실이 나중에야 알려지졌다.(사진제공=파인하우스필름)

 

외손자의 아침밥을 챙기는 게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미자(윤정희)는 중풍걸린 노인을 간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생활은 비루해도 소박하게나마 일상을 즐기고 호기심 많은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일부러 시간을 내 동네 문화원에 등록한다. 요즘 정신이 예전같지 않아서다. 시를 외우고 쓰게 되면 매번 깜박하고 뭘 잃어버리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 사과를 몇번이나 봤어요? 1000번? 1만번?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 사과를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관심을 갖고 대화하고 싶어서 사과를 오래도록 지켜보며 무슨 말을 하나 귀 기울여 보고 주변에 깃드는 빛도 헤아려 보고 그러다 한입 깨물어 보기도 해야 진짜로 본 거예요.” 

실제 김용택 시인이 강사로 등장해 읊는 이 대사는 미자의 영혼을 울린다. 그렇게 시작된 시 쓰기는 쉽지않다. 사과는 늘 미자의 곁에 있었다. 국가보조금을 받으며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사과 한알만큼은 먹고 살았다. 중학생이 되어 말수도 적어지고 늘 퉁퉁거리던 손자의 비밀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마지막 수업까지 시 한편을 작성해 내야 하는 미자의 시상은 같은 학교의 여학생에게 한 손자의 ‘몹쓸 짓’으로 인해 처참히 깨진다.

고소와 더불어 합의를 요구하는 피해자 부모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 엄청난 일에 순하고 정 많은 손자가 연루됐다니 분명 나쁜 친구들이 시켰거나 그 역시 피해자였을지 모른다고 미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거칠고 때론 잔인하다. 손자의 범죄사실을 확인한 그는 늙고 비루한 몸이어도 수컷 본능을 주체 못하던 노인(김희라)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다. 굴욕의 순간이 지나고 돈을 요구하는 미자에게 노인은 기가 찬다. 

중풍 걸린 노인의 입장에서 미자의 몸은 돈을 주고서라도 취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보다 약자인 그를 유린하고 반항조차 못하는 상황을 보고 싶어했으리라. 하지만 미자는 달랐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합의금을 해결하고 손자의 죄는 법의 테두리 안에 맡긴다. 자신의 정신이 흐릿해져 갈지언정 세상 순리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한 인간의 자존감이 그렇게 자살한 학생의 세례명을 딴 ‘아녜스의 노래’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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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모녀 케미스트리를 자랑한 극 중 문소리와 김태리의 즐거운 한 때.(사진제공=메가박스플러스엠)

 

또 한편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기존에 보지 못한 모녀관계가 그려진다. 엉뚱하지만 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던 엄마(문소리)가 갑자기 집을 나갔다. 자신이 당당히 대학을 붙은 직후였다. 그리고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이럴수가. 혜원(김태리)는 그렇게 엄마한테 버려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고향을 떠났지만 도시의 삶은 녹록치 않다. 

졸업 후 준비하던 임용고시에 남자친구만 합격하고 혜원은 떨어진다.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오니 어린 시절 친구들이 그대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 서울에서 번듯한 회사에 취직했던 재하(류준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농사를 짓고 있다. 그를 짝사랑하는 은숙(진기주)는 읍내 작은 은행의 직원이다. 간만에 뭉친 세 친구는 어린시절 틈날 때면 혜원의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함께 추억한다.

사계절 자연 속에서 직접 만든 음식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감자빵, 팥시루떡, 겨울 배추국, 알싸한 막걸리.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힐링 음식 속 토마토는 극 중 혜원의 상황과 묘하게 닮아있다. 고등학교 시절 혜원은 나무 그늘에서 맛있게 토마토를 먹는다. 마당 한켠에 심은 토마토 가지에는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열매가 달려있다. 엄마는 다 먹은 토마토를 다시 밭에 던지며 “내년에도 또 자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쉽게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병충해를 견뎌야 하고 햇볕에 탈 수도 있으며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오면 채 열매를 맺지못하고 꽃이 떨어져 버린다. 하지만 비닐하우스가 아닌 노지 토마토는 단단하기 그지없다. 

그 고난을 겪으며 열매를 맺은 토마토의 단 과즙처럼 세상에 나와 실패와 상처를 겪어도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이 듬뿍 담겨있다. 개봉 당시 임순례 감독은 “최대한 촬영 기간을 줄일 수도 있었지만 각 계절의 정수를 정확하게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사계절 촬영을 주장했다. 배우들과 스태프 모두 우리 영화만 찍는 것은 아니니 어려움이 많았지만 특수한 사정에 적극 동의해줬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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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제 과일은 ‘혀가 아닌 눈‘으로 보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13일 기준 사과 도매가격은 처음으로 10kg당 9만원대를 기록했다. 1년 만에 2배 넘게 뛰었다. 지난달 사과 물가 상승률은 71.0%, 역대 세 번째로 70%를 넘는 수치다. 배는 61.1% 상승해 1999년 9월(65.5%) 이후 24년 5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과·배 등의 과일을 대체할 수 있는 참외, 토마토 등 과채류 공급이 풍부해지면 과일 수요가 분산돼 가격이 다소 낮아질 가능성도 있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에그플레이션(기후 변화나 전쟁, 국제 유통질서의 혼란 등에 의한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체적인 물가 상승을 선도한다는 뜻)은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최근 ‘농업관측 3월호’ 보고서에서 일조 시간 부족으로 주요 과채류 출하가 감소함에 따라 가격이 작년 같은 달보다 오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농경연은 이달 토마토와 대추방울토마토 도매가격이 2만 3000원(5㎏)과 2만 4000원(3㎏)으로 1년 전보다 43.9%, 11.2% 각각 상승할 것으로 전망한 상태다.

‘사과가격 얼마까지 오르나…’(연합)

 

과일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상황에서 떠오르는 건 통조림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황도 통조림은 지구멸망의 시대, 과일을 구할 수 없는 설정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생명을 구하는 직업을 가진 명화(박보영)는 모든 건물이 무너진 상황에서 남편 민성(박서준)과 살아남는다. 현실에서는 그저 복도식 서민 아파트로 무시받았지만 그들이 사는 황궁 아파트는 살아남은 부자들이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지상낙원이다. 

다들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 때 바리케이트를 치는 건 영탁(이병헌)의 몫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분배하고 생존룰을 제시하는 인물로 입주민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대표가 됐다. 명화는 추위에 떠는 한 소년과 모피로 온 몸을 휘감은 엄마를 몰래 집안으로 들인다. 이 모자의 눈을 피해 민성은 시계를 팔고 물물교환으로 어렵사리 황도 통조림을 구해온다. 이번 한번만 눈 꼭 감고 우리끼리 먹자는 민성과 그래도 외부인들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명화의 실랑이도 잠시 화면은 국물까지 들이켜는 소년의 모습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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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민성 역시 저 황도가 먹고 싶었을텐데 기회는 없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급하게 캔을 따고 아내의 입에 한입 넣어준 순간 눈치없는 아이가 방문을 열며 명화를 부른다. 얼마전 아이를 잃은 명화는 본능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생명과 공존을 최우선하는 캐릭터다. 살기 위해 점차 변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 끝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배우 엄태구가 뜯고 있는 뼈다귀를 슬쩍 훑는다. 운 좋게 배회하던 돼지를 사낭했을 법도 하지만 엄태화 감독은 브릿지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관객의 상상에 맡기겠지만 시나리오 상에선 동물은 아니었다”는 말로 섬뜩함을 더했다.

본론으로 돌아와 복숭아는 그냥 먹어도 맛있는 과일이다. 6~8월 여름에 주로 생산되며 수분이 많고 당분, 유기산, 비타민 A, 펙틴 등 영양 성분도 풍부하다.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우고 식욕을 북돋아 주며 위·장·눈 건강, 독성 제거 등의 효능도 탁월해 통조림, 주스, 잼 등으로 가공해 섭취하기도 한다. 모든 과일은 제철에 생으로 먹는 게 제 맛이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치솟는 과일 값에 통조림 과일만큼 반가운 존재도 없다. 더이상 비싸지지 않고 마음 놓고 과일을 집어드는 그 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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