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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100년 만에 세워질 이상설 선생 기념관

입력 2017-02-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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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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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돌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한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을 기억하십니까?

이상설(1870~1917)은 25세 때 식년문과(1894)에 급제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904년 일제가 조선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했을 때 반대상소를 올려 철회시키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식년문과: 조선 마지막 과거시험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다.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다”-이상설-

일제가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날 이상설은 고종에게 조약반대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 후 돌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미수에 그쳤지만 이를 목격한 김구가 ‘백범일지’에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이상설은 계속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7년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위종과 함께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지만 일본에게 참석을 거부당했습니다.

※ 헤이그 특사: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상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집니다. 때문에 귀국을 단념하고 성명회를 조직했죠.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피력하는 성명서를 작성해 발송하며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세계정세에 밝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
-안중근 의사-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魂)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광복을 보지 못한 한을 남기고 48세로 순국했습니다.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습니다.

올해로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상설 선생의 기록은 유언대로 대부분 불태워져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 많아 100주년을 맞은 올해 4월 21~22일 이틀간 대규모 기념식을 열기로 했습니다.

7월엔 중국에 있는 이상설 항일투쟁유적지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입니다. 8월에는 광복 제72주년 기념 방영을 목표로 ‘이상설 다큐멘터리’가 제작됩니다. 기념사업회는 재중·재러시아 동포와 역사현장 기록화 작업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이상설 기념관’ 건립에도 관심이 촉구됩니다. 범국민 모금운동을 진행하기로 한 겁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에 많은 국민의 관심이 쏟아지길 바랍니다.

박민지 기자 pmj@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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