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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3·1운동 기폭제 된 부치지 못한 한 통의 편지

입력 2017-06-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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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1
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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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1886~1947)이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작성한 편지가 발굴됐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려 했던 건데요.

그는 링컨의 노예 해방에 감명 받아 모든 노비들의 문서를 태우고 해방시켜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독립과 인권을 위해 목숨 받쳐 투쟁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1918년 윌슨의 친구인 찰스 크레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해 피압박 상황을 설명하라는 내용이었는데요. 크레인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권유한 데 대해 용기를 가졌고, 몽양은 상하이에 체류하고 있던 장덕수를 만나 청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억압적 통치 아래 놓여왔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편지 내 ‘신한청년당’ 총무라고 쓰여 있었는데요. 몽양이 만든 ‘신한청년당’이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1918년 8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우리나라 청년들의 항일독립운동 단체

크레인은 편지를 들고 미국으로 들어갔지만,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시도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톈진에 머물던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청해역사적으로 처음, 대표를 파리에 파견했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러시아로 넘어가기도 했죠.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는 해외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도쿄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역시 몽양의 업적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독립 이후에도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싸우던 그는 1947년 7월 암살을 당하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의리를 지키려면 불리할 때 지키는 것이다. 유리할 때 의리를 말하고 불리할 때 배반하는 것은 불가하다. -몽양 여운형 선생-


박민지 기자 pmj@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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