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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코멘트] 무려 5시간에 걸쳐 ‘이 불안한 집’ 김정 연출 “이 드라마의 촉발제, 마초 역사 속 희생된 이피지니아”

입력 2023-08-1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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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안한 집
연극 ‘이 불안한 집’ 연습실 공개 현장(사진=허미선 기자)

 

“이 이야기를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게 의미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원작 희곡집 표지도 아기인 이피지니아 혼자만 갸우뚱하고 있고 주변의 가족들은 막 흔들려서 거의 실체가 없는 인간처럼 돼 있어요.”

고대 희랍 비극(希臘悲劇)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연극 ‘이 불안한 집’(The Restless House, 8월 31~9월 24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의 김정 연출은 제목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이 불안한 집’은 영국의 극작가 지니 해리스가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2016년 영국 시티즌스시어터에서 초연됐다. 그 해 스코틀랜드 비평가협회상 최우수 희곡상, 최우수 연출상,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무려 5시간의 러닝타임, 15명의 배우들이 표현하는 20여 캐릭터가 꾸려가는 이야기다. 

 
이 불안한 집
연극 ‘이 불안한 집’의 김정 연출(왼쪽)과 이피지니아 역 홍지인(사진제공=국립극단)

 

1부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딸 이피지니아(홍지인)을 죽인 왕 아가멤논(문성복)의 귀환과 그를 살해함으로서 복수하는 클리템네스트라(여승희)의 이야기를, 2부는 그들의 둘째 딸 엘렉트라(신윤지)가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여정을 다룬다. 그리고 3부는 어머니를 살해한 후 제3의 시공간으로 넘어간 엘렉트라가 현대의 정신과 의사 오드리(김문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김정 연출에 따르면 “1부는 왕을 살해하면서 사회를 바꾸려는, 실패했지만 혁명적인 움직임으로 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사건을 다룬다. 2부는 그 다음 세대가 부모를 살해함으로서 가족에 저항하고 내 개인의 자유를 얘기한다.

 

3부에서는 오드리가 가진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1, 2부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어요. 사실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세상을 느끼면서 동시대와 연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 김 연출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기제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긴 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부연했다.   

 

이 불안한 연극
연극 ‘이 불안한 집’의 촉발제이자 드라이브가 되는 이피지니아 홍지인(사진=허미선 기자)
김정 연출은 희랍극을 꼭 하고 싶었던 데 대해 “지금까지 2500년을 건너서도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라며 “결국 핏줄, 집안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가장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핏줄, 혈통이잖아요. 모든 인간은 거기서 고통 받고 치유 받죠. 우리 인간 전체에게 주어지는 공통된 숙명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어 김정 연출은 “그럼 우리는 무엇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나 라고 했을 때 결국 아주 작은 단위의 우리, 개인의 구원 혹은 자유 같은 것들을 어떤 식으로 우리가 감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나라 꼴을 좀 보세요!”

1부의 이 대사만으로도 ‘이 불안한 집’은 2023년 현재에 맞닿아 있다. 김정 연출은 “어느 역사 안에서나 정치적인 이슈들은 있어 왔다.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라며 “그래서 1부는 꼭 영웅서사 같은 느낌이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큰 이야기로 출발해 3부는 매우 적어서 꼬리가 너무 약하게 빠져버린다는 생각에 계속 고민을 많이 했었죠. 하지만 꼬리가 약하거나 가볍다기 보다는 극 전체에 잘게 흩뿌려진 느낌이에요. 이에 전인류에게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 시작이자 탈출구가 이피지니아라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피지니아는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첫째 딸로 엘렉트라의 언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신의 계시라는 명분으로 친부인 아가멤논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폭력으로 점철된 마초의 역사 속에서 희생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피지니아는 혼령으로 극 전체를 떠돌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가멤논이 폭력적인 이전 세대의 거의 끝물 보스 같은 느낌이라면 클리템네스트라는 그걸 끊어내려는, 실패했지만 혁명적인 인물이에요. 자기 자식을 희생당한 인물로서의 역사가 생겼고 이에 대해 정당하게 복수하고 세상을 전복하려고 했던 인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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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 불안한 집’ 연습실 공개 현장의 아가멤논 문성복과 이피지니아 홍지인(사진=허미선 기자)

이어 “혁명이 실패하면서 그 다음 세대는 아이기스투스(윤성원)가 (권력을) 잡았고 그 역시 굉장히 폭력적인 인물”이라며 “이게 꼭 이전 세대부터 우리가 겪어온 역사처럼 느껴진다”고 부연했다.

“결국 지금도 벗어날 수 없는 역사죠. 이탓, 저탓, 남탓, 세상탓, 신탓을 해도 결국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요. 이런 세상에서 이피지니아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떤 숭고함인 것 같습니다. 너무 폭력적이고 무서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지금에도 아무 죄 없이 희생당한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멈춰’가 그래서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정 연출은 “굉장히 극단적으로 몰려 있는 인간들의 표출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공권력이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 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그걸 멈출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하지 못하면 그걸 멈출 수 있는 건 누군가의 희생”이라고 부연했다.

이 불안한 집
연극 ‘이 불안한 집’ 연습실 공개 현장의 오드리 김문희(왼쪽)와 이피지니아 홍지인(사진=허미선 기자)

 

“용서나 숭고함이 없는 세상에서 숭고함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자살 뿐이라는 게 참 슬퍼요. 목을 졸라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리는데 그곳 역시 천국이 아닌 지옥이고…그렇게 끝날 것 같으면서도 더 밑으로 떨어뜨리고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게 비극의 힘이잖아요. 저는 (‘이 불안한 집’의) 3부가 그런 비극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1, 2부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면 3부는 어머니를 살해한 후 제3의 시공간으로 넘어간 엘렉트라가 정신과 의사 오드리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김정 연출은 “1, 2부에 비해 매우 짧고 느닷없게 느껴질” 3부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고 드라마와 상관없는 듯 느껴지는 이피지니아가 외치는 독백으로 구성했다”고 귀띔했다. 

 

이 불안한 집
연극 ‘이 불안한 집’ 연습실 공개 현장의 이피지니아 홍지인(외쪽)과 엘렉트라 신윤지(사진=허미선 기자)

 

“지니 해리스 대본에는 좀 흩어져 있던 이피지니아의 독백들을 하나로 모아 강력하게 뚫어버리고 싶었어요. 전쟁, 총소리, 비명소리를 멈출 수 있는 건 희생당한 아이니까요. ‘나는 복수의 혼령인 줄 알았는데 그저 멈추고 싶고 내 동생을 안아주고 싶다’라고 얘기하는 심플함, 그런 심플함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곤 “1, 2부는 연극하는 사람들 같다. ‘뭐 하러 저렇게까지 하나’ ‘도대체 왜?’ 그래서 ‘그만’을 외치게 되는 3부에서 저 사람들의 몸부림이 이걸 위한 것이었구나 하게 된다”며 “이피지니아의 어떤 드라마적인 충고라기 보단 모든 배우가 시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피지니아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고 이 작품 전체를 꿰뚫는 아주 큰 드라이브라고 생각해요. 매 장면에 등장하진 않지만 혼령처럼 떠도는 이피지니아는 드라마의 촉발제 같은 거예요. 계속 존재하면서 관통하고 오해받고 결국에는 미움 받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반전이 생기는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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