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심화]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가 전하는 마지막 “엑스플리시트이자 인시피트”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의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사진제공=민음사)

“세상의 소멸, 소설의 끝을 나타내지만 완전한 파괴가 아니라 사라짐 혹은 지워짐으로서 리부트되는,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죠.”

8번째 장편소설 ‘아노말리’(Anomaly)로 2020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는 마지막 “모래시계처럼 지워져 흩어지는 단어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며 “시스템 리부팅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소설가, 시인, 희곡작가이자 수학자·언어학 박사이며 과학전문기자로도 활동했던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는 프랑스에서만 11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밀리언셀러로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독일, 중국, 스페인, 이스라엘, 일본 등 전세계 45개국에서 번역출판됐다.

106일의 격차를 두고 동일한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 동일한 기착지에 착륙한 전대미문의 비행기 사건을 다루는 울리포(Ouvroir de Litterature Potentielle, 1960년 프랑수아 르 리오네, 레몽 크노 등에 의해 창시된 실험문학운동으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실험 문학 집단) 소설이다. 

아노말리｜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이세진 옮김(사진제공=민음사)

2021년 3월 10일 에어 프랑스 006과 106일 후인 6월 24일 보잉 787기에 탑승해 난류를 만나 같은 기착지에 착륙한 이들은 “어떤 장소를 스캔해 다른 곳에 출력한 것” 같은 전혀 다른 모습의 자신들을 대면한다. 그 3개월 동안 누군가는 임신을 했고 또 누군가는 극단적 선택을 했으며 어떤 이는 췌장암 4기 판정을 받고 의식이 없는 상태다.

자신이지만 3개월여 동안 다른 삶을 살아온 전혀 다른 자신을 대면한 8명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저마다의 선택을 한다. 살인청부업자 블레이크는 자신을 죽이고 임신한 자신을 대면한 미국인 변호사 조애나는 스스로를 희생시킨다.

전세계 45개국에서 번역출판된 ‘아노말리’의 마지막은 나라마다 번역가들의 선택에 맡긴 단어들로 구성된다.

이에 대해 “소멸이지만 리부팅”이라 정의한 에르베 르 텔리에는 “원래 텍스트는 있지만 지워서 모래시계 모양으로 흘러내리는 글자들은 의도적으로 몇몇 단어로,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게 했다”고 귀띔했다.

“그렇게 읽힐 수 있는 단어들은 이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죠. 예를 들어 존재(Existence), 모래(Sable) 등이 있어요. ‘Sable’과 ‘Fin’을 조합하면 고운 모래가 되죠. 그리고 ‘Fin’은 가능, 끝의 뜻도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모래시계 모양의 위쪽에 ‘F’, 아래쪽에 ‘인’(In)을 배치해 맨 마지막 남는 단어가 ‘In’이 되게 했죠.”

이에 대해 에르베 르 텔리에는 “여기서 ‘In’도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며 “정보화(Informetic)인 동시에 ‘들어간다’(In)로 읽히며 ‘정보화시대로 들어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더불어 문학에서 소설의 시작을 의미하는 라틴어 ‘인시피트’(Incipit)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소설의 끝을 알리는 ‘엑스플리시트’(Explicite) 자리에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말인 ‘인시피트’를 배치한 거예요. 애초에 ‘아노말리’ 첫 머리에 ‘인시피트’라고 써서 처음과 끝을 맞추고 싶었어요. 너무 실험적인 것 같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지만요. 이같은 마지막 장치는 세계의 소멸인 동시에 ‘다시 시작’을 의미해요.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면 이 (소설 속)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갈래로 뻗어나가는 그런 시작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그 선택의 주체는 독자라는 의미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