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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세상을 바라보는 심도 깊은 만화경, 토마스 루프 ‘d.o.pe.’

[문화공작소] 독일 사진거장 토마스 루프

입력 2024-02-26 18:00 | 신문게재 2024-02-2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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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한국에서 개인전 ‘d.o.pe.’를 연 사진거장 토마스 루프(사진=허미선 기자)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사진이라는 것이 현실을 포착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어요. 현실을 찍거나 창출하는 그런 사진을 만들고 싶었죠. 그렇게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사진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1985년 뒤셀도르프 아트 아카데미를 졸업할 즈음에 스스로 깨달았어요. 사진이 보여주는 진실이라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요.” 

 

20년만에 여는 개인전 ‘d.o.pe.’(4월 13일까지 PKM갤러리) 개막에 맞춰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사진거장 토마스 루프(Thomas Ruff)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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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한국에서 여는 토마스 루프 개인전 ‘d.o.pe.’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이어 “당시 ‘여권사진’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작업을 하면서 카메라 앞에 놓인 것을 포착하지만 이는 미리 구성된 진실임을 깨달았다”며 “누구를 찍을지부터 의상, 조명, 포즈, 표정, 고개의 위치까지 제가 선택하고 완전히 통제한 이미지였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그래선가 2024년에 만난 그의 작품들은 스스로도 “1970년대 후반 뒤셀도르트 아트 아카데미에서 베른트·힐라 부부(Bernd and Hilla Becher)에게 수학을 하던 당시의 저로서는 45년 뒤에 이런 작업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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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한국에서 여는 토마스 루프 개인전 ‘d.o.pe.’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움직임에 따라, 바라보기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만화경과도 같다. 얼핏 캔버스 혹은 종이인가 싶지만 대형 카펫 위 매우 심오한 색감의 다채로운 프랙털(Fractal) 패턴들은 언뜻 세상을 바라보는 깊고도 다양한 시선을 담은 만화경 속 풍경을 연상시킨다.  

 

“1988년, 89년 당시 저의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칸디다 회퍼(Candida Hofer), 토마스 슈트루트(Thomas Struth),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같은 작가들도 거의 대부분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그런 사진도 좋지만 그 너머의 세상에는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고 인지조차 못한 더 많은 사진이 있지 않을까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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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한국에서 여는 토마스 루프 개인전 ‘d.o.pe.’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이에 토마르 루프가 한국에서 20년만에 여는 개인전 ‘d.o.pe.’ 작품들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현실 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세계를 보이게 하는 매체로 진화한 사진과 시대의 변화에 대한 탐구과정을 담는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매체죠. 이 기술이라는 건 항상 개선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결과적으로 디지털화됐습니다. 제 은사이신 베른트 베허(Bernd Becher)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 중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매체로 작업을 한다면 그 매체가 네가 만드는 이미지에도 반영돼야 한다’고 하셨죠. 동시대 예술가, 사진가 혹은 사진으로 작업을 하는 예술가로서 기술적인 이슈들을 사진으로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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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한국에서 개인전 ‘d.o.pe.’를 연 사진거장 토마스 루프(사진=허미선 기자)

그렇게 오롯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던 토마스 루프는 몽타주, 인터넷에 떠도는 포르노 이미지 중 누드를 재료로 활용한 작업들, 일본 만화책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을 블러 처리해 색상만을 남게 한 후 인화지에 인화한 추상 등 변화를 꾀하며 스스로의 표현처럼 “지난 20여년 간 사진과 사진이 아닌 것 사이를 끊임없이 도는 사이클을 겪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프랙탈 패턴을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생성한, 해저 혹은 우주 풍경인지, 피부의 조직인지 아무리 확대해도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디지털 이미지를 카펫에 프린트한 작품들이다.

 

기계적이고 디지털적인 이미지는 어쩌면 그 정반대의 재질인 부드럽고 깊은 색감을 표현하는 융 카펫을 만나면서 ‘변화’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고 탐구해온 그의 예술여정만큼 깊은 품격을 지녔다.  

 

2000년경 시도했었지만 기술의 발전이 그가 바라는 정교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20여년이 흐른 2022년에서야 그가 바라는 수준의 프랙탈 패턴을 생성할 만큼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들어낸 이 작품들을 토마스 루프는 “기술적 이미지라고 부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기술적 이미지라는 것은 카메라로 촬영한 것일 수도, 카메라 촬영 후 후반 작업이 들어간 것일 수도 있어요. 비록 카메라로 찍었더라도 후반작업이 들어간 이미지들 자체도 더 이상 사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다른 존재로 변화했거든요.”

 

이어 “사진을 찍고 나서 소프트웨어의 도움을 받아 보정을 한다면 그 또한 기술적 이미지”라며 “어떤 렌즈를 거쳐 아날로적인 인화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통한 랜더링을 거친 가상의 이미지들”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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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한국에서 개인전 ‘d.o.pe.’를 연 사진거장 토마스 루프(사진=허미선 기자)

 

“지금 시대는 예전에 사진이라고 생각했던 이미지와 기술적 이미지의 정확한 경계를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아이폰만 하더라도 그래요.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기계적인 렌즈의 품질, 노출 등이 아니라 스프트웨어에 의한 결과물이죠.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등의 이미지들 역시 필터를 거친 것들이에요. 과연 그것들이 사진이냐고 물어보면 저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직접적으로 촬영한 사진(Straight Forward Photography)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낸 것이니까요. 오늘날 만들어지는 이미지 대부분이 그렇죠.”

 

이는 비단 이미지 뿐 아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들 혹은 본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무엇이 현실이고 인공적인 것인지 역시 모호해지고 있다. 움직임에 따라 혹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만화경처럼. 

 

그가 제목에 차용했고 인간이 화학적 촉매제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지각의 문’(The Dodors of Perception)이 전하는 메시지처럼. 그렇게 찾아진 우리 인식 너머의 그 세상처럼.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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