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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에 취하다] 연인들의 설렘·일상탈출의 짜릿함… 낭만을 싣고 달리는 기차

입력 2015-05-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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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는 낭만이 있다. 현실에서 멀어진다는 짜릿함, 잠시나마 지금의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설레임. 일이든 여행이든 기차에 몸을 싣는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기차는 곧 새로운 도전이었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는 학생도 있었다. 

 

그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X세대로 불린 지금의 40대에게 기차는 MT를 위한 관문이었다. 새학기의 어색함이 사라진 5월에는 각과 마다 신촌이나 청량리 기차역에 모여 1박2일의 여행을 가는 대학생들로 넘쳐났었다. 

 

캠퍼스를 떠나 그동안 마음에 담아뒀던 짝사랑이 이뤄지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첫사랑이 결실을 맺기도 하는 이 짧은 여행을 위해 기차 안은 무수한 눈빛 교환으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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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코레일)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을 한 무리들이 떼지어 내린다. 이곳은 1호선과 열차가 동시에 서는 동두천역. 소요산이 도보로 10분거리에 있어 주말마다 사람이 넘쳐난다. 

 

평화열차(DMZ트레인) 노선인 서울역· 도라산역·동두천역은 코레일이 5대 철도관광벨트 지역으로 묶어 계절에 어울리는 꽃길을 조성할 정도로 공을 들인 구간이다. 이 노선에는 수레 국화와 금계국이 만발해 창밖으로 만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시간에 한대 간격으로 운행되는 경원선은 신탄리역의 고대산에 가려는 트레킹 여행자들과 백마고지역으로 향하는 6.25 비극을 겪은 노인들의 경유역이기도 하다. 이에 평일에도 제법 좌석이 찰 정도로 입소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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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초반의 두 어르신이 동두천역 철길 건널목에서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성된 경원선 철도는 용산에서 원산까지 이어진 223.7km의 남북철도였다고 한다. 이 길을 통해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대단했다고 하니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젖줄인 셈이다. 

대부분 역들이 연천군에 속해 있어 서울 근교임에도 아날로그적 건축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도 인기 요인이다. 경원선 철길의 묘미는 건널목이다. 사람과 자동차가 잘 지나다니게 돼 있어 어느 역에 내려도 걷는 재미가 있다.

 

동두천역 철길에는 60대 초반의 두 어르신이 ‘땡땡땡’거리는 경고음과 함께 붉은 깃발을 들고 나선다. 곧 지나갈 기차에 대비해 건널목의 안전바를 내리고 수신호로 사람과 차의 보행을 막는 게 주임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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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철길을 찾은 한 시민이 철길 위를 걸어보고 있다.
통근 열차를 포함해 하루에 140대가 지나가는 통에 쉬는 시간은 5분이 채 넘지 않는다.

3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이기성(63)씨는 “지나가는 기차 사진을 찍는 사람은 외지인,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현지인이라고 보면 된다”며 웃는다. 매일 6명이 돌아가며 24시간 3교대로 근무하며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고.

다섯살 난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황영주(43)씨는 “이렇게 가까이 기차를 보는 것은 거의 20년만이다. 기차가 지나가고 철길을 아들과 함께 걸었다. 대학 시절 이 길을 함께 걸었던 여자친구가 지금 와이프”라며 쑥스러워했다.

근처에서 수입상품점 ‘기브미쪼꼬렛’을 운영하는 한 상가 주인은 “지역 특성때문인지 밀리터리 용품을 찾는 젊은 세대들이 자주 온다. 대학생 커플들이 30% 이상”이라면서 “샴푸부터 소시지, 콜라, 신발, 군복까지 다양한 품목이 갖춰져 있고 전국 택배가 가능해 한번 찾은 고객들은 단골이 된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분단국가의 아픔을 담은 간판과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 때문인지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대부분 신촌역에 대한 추억이 한두개쯤 있기 마련이다. 사실 신촌역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 건물’로 유명하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과의 구분을 위해 열차가 뜸하게 있는 이 역은 습곽적으로 신촌기차역 등의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옛 신촌역사는 1921년에 세워졌는데 이는 1925년 세워진 옛 서울역보다 5년이나 앞선 것으로 등록문화재 제 136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지난 2006년 7월 12일 기존의 역사 후편에 민자역사를 신축하면서 기존 역무실을 부분 철거하고 반대편으로 이설해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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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오래된 역 건물인 옛 신촌역사. 역사는 서울역보다 5년이나 앞선 1921년에 세워졌다.

 

지금의 신촌역사는 여행안내센터로 용도가 변경되어 신촌 일대 맛집, 숙박시설, 볼거리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 내엔에서는 경의선 기차가 다니던 시절의 서울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신촌역 이계원 역장은 “하루에 340회 열차가 통과하고 기차는 한시간에 한대가 지나간다. 신촌이라는 지역 특성상 이대와 연세대 등 학생들은 물론 수색과 행신에서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까지 합해 하루 이용객만 2200여명”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빠르고 쾌적한 KTX가 있지만 기차 여행의 참재미는 느리고 다소 불편한 경의선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간표를 확인하고 내친김에 백마역행 기차에 올랐다. 신촌에서 30분 남짓, 백마는 70년대와 80년대 통기타와 막걸리의 추억, 90년대부터는 연인들의 데이트 필수코스인 카페 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그때의 한적함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번화가다. 금요일 오후 한적해 보이는 카페에 들어서니 이 곳에서 2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장이 반긴다. 


이름을 한사코 밝히길 거부한 그는 “내가 백마역에 터를 잡았을 때는 서울행 막차가 끊기는 9시를 노리고 술을 더 시키는 늑대들도 많았다. 철길에 앉아 별을 보며 밤을 지새는 연인들도 몇 커플씩 있었던 곳이 바로 백마역”이라면서 “지금은 새벽 2시까지 운영하는 광역버스며 총알택시 등이 당연한 시대다. 그래서인지 기차를 타고 오는 손님들이 더욱 반갑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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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코레일)


백마역이 연인들의 성지라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간 남이섬 MT는 80번대 이전 학번에게는 당연한 필수 코스였다.

 

이곳은 1970~80년대에는 젊음의 상징인 ‘강변가요제’가 열렸지만 한류 드라마의 주역인 배용준·최지우 주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예전엔 관광버스가 넘쳐났지만 지금은 기차를 타고 이곳을 찾는 외국인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남이섬에 가기 위해 용산에서 ITX청춘 열차를 예매해 탔다는 홍콩 관광객 에이미(28)씨는 능숙한 한국말로 “기차 정말 최고!”를 외쳤다. 넓고 깨끗한 좌석도 마음에 들지만 2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색다른 경험이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ITX를 처음 타 봤다는 그는 관광에 특화된 기차칸이야말로 외국인들이 좋아할 ‘잇 아이템’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지켜든다. 에이미는 조만간 정동진 바다열차에도 도전할 예정이라고. 기차의 추억은 이렇게 한국을 넘어 글로벌 인류의 추억거리로 확대되고 있었다.


글·사진 =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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