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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미나리' 보다 백배는 더 현실적인 '이민자의 삶'을 보다! 왓챠 '라이스보이 슬립스'

[#OTT] 왓챠·웨이브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국적과 언어를 관통하는 정서 가득, 1990년대를 배경으로 찾아가는 기억의 습작

입력 2023-06-14 18:30 | 신문게재 2023-06-1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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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도시락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라이스보이’라는 놀림을 받지만 소년은 울지않는다. 그저 주먹으로 응징할 뿐. (사진제공=판시네마)

 

갑자기 캐나다로 날아왔다. 어린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낯선 환경에 놓여졌다. 1990년대 토론토 외곽에서 동양인은 나 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툭하면 시비를 걸고 놀렸지만 엄마는 생계를 위해 늘 공장에 가야 했다. 아빠는 없었다. 학교를 가기 싫다고 울고 매달려도 엄마는 늘 “네가 그러면 내가 더 힘들다”며 숨죽여 우셨다.

 

그런 엄마가 달라진 건 나를 놀리던 백인친구들이 나의 절친이 된 10대 후반이었다. 내가 맞고 왔을 때 엄마는 그제야 학교에 뛰어와 선생님께 “인종 차별하지 말라”고 절규했다. 폭력만큼은 안된다며 전학을 요구하는 선생님의 부당함에 드디어 본심을 드러낸 것. 사실 엄마는 괴롭힘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감싸는 대신 스스로 강해지길 원했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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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갑작스런 자살로 인해 가정이 붕괴되자 모든 인연을 끊고 아들을 위해 이민을 결정한 소영. 강인한 엄마의 모습이 가녀린 배우의 외형과 맞물려 묘한 시너지를 낸다. (사진제공=판시네마)

 

사실 동현이는 아빠에 대해 함구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을 담아 매일 도시락을 싸주는 엄마로 인해 자신은 늘 학교에서 ‘라이스보이’라는 놀림을 받는다. 몰래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는 시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자신을 비행청소년으로 모는 학교의 방침에 “얘도 자길 지키려면 싸워야죠” 라며 항의하는 엄마의 모습에 소년은 철이 든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연출을 맡은 앤소니 심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했다. 아빠의 갑작스런 부재로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던 엄마의 결단은 확고했다. 친정이 잘 살았거나 친가의 도움은 없었던 것 같다.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받는 손가락질 대신 자신의 젊음을 희생해서라도 타지에서의 교육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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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초기의 외로움보다 한글을 잊지 않고 모자간의 연대를 쌓으며 사는 평범한 일상들이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가득 채운다. (사진제공=판시네마)

 

물론 쉽지 않았다. 백인들보다 라틴계 이민자들이 많은 공장의 일은 고되고 힘들었다.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양인 이민자들과 의지하며 아들 동현을 번듯하게 키우는 게 엄마 소영의 유일한 꿈이자 희망이다.

 

감독은 “나의 뿌리인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며 각본과 제작, 편집, 연기까지 직접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극 중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자 소영의 남자친구 역할로 깜짝 등장해 독립영화다운 의외의 재미를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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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소영과 짧게 로맨스를 나누는 썸남으로 등장한 안소니 심 감독. (사진제공=판시네마)

 

사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여러 모로 ‘미나리’와 비교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이후 플래시포워드 관객상을 수상했을 만큼 ‘이민자의 삶’에 ‘미나리’와 다른 결의 감동을 안긴다.  

 

 영화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오른 모자의 삶에서 갑자기 한국으로 카메라를 돌린다.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후반부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한번도 만난적 없는 친가와 이제는 무덤으로 남아있는 외가집 식구들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로 점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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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후반의 소년이 된 동현과 그만큼 나이들은 엄마 소영의 화목한 한 때. (사진제공=판시네마)

 

엄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동현에게 ‘뿌리에 대한 소중함’을 전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난 한국에는 자신을 끝까지 외면했던 시어머니와 무뚝뚝한 시아버지, 철없는 아주버님이 있다. 며느리는 그들에게 여전히 남이겠지만 동현은 다르다. 머리를 노랗게 탈색하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만 ‘핏줄’이란 묘한 동질감으로 연대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언젠가는 돌아갈 집 그리고 늘 떠나고 싶어도 살아가야 할 공간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다. 격렬한 감동코드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일찌감치 토론토영화제의 ‘2022년 최고의 캐나다 영화’에 선정됐다. 

 

이를 시작으로 캐나다 감독조합상, 토론토비평가협회 캐나다 작품상, 미국 샌디에이고 아시안 영화제 작품상과 관객상, 글래스고영화제 관객상, 아프리카 마라케시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팜스프링스 영화제 젊은영화인상 등 트로피수집에 나서며 큰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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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현의 연기는 청소년기를 맡은 베테랑 배우 황이든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사진제공=판시네마)

 

피를 나눈 가족을 소재로 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는 ‘나 혼자’만이 인생을 살아내야 함을 이 영화는 간과하지 않는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안무가 출신의 배우 최승윤이 엄마 소영 역을,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에 출연한 배우 황이든과 아역배우 황도현이 동현 역을 맡아 사실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다.

캐나다 밴쿠버부터 강원도 양양을 관통하는 로케이션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감이 넘친다. 앤소니 심 감독은 제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받은 ‘미나리’ 정이삭 감독을 이을 실력파 한국계 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 지난 4월 개봉한 이 영화는 현재 왓챠와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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