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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성난 어심 돌려세운 중용의 상소… 충무공을 살리다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⑩예천

입력 2021-09-07 07:00 | 신문게재 2021-09-07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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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정탁 선생의 읍호정
약포 정탁 선생의 읍호정. 사진 = 남민

 

함께 어울리지만 편 가르지 않는다. ‘군이부당(群而不黨)’ 

 

子曰(자왈), 君子(군자) 矜而不爭(긍이부쟁) 群而不黨(군이부당)

공자께서 “군자는 언행이나 몸가짐을 조심하기에 다투지 않으며, 함께 어울리지만 당파를 형성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 약포 정탁의 ‘군이부당(群而不黨)’

 

예천 도정서원
예천 도정서원. 사진=남민

 

‘긍(矜)’은 ‘남을 공경하고 숭상하며 자신의 언행이나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중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 군자는 ‘긍지(矜持)’가 높아 가벼이 사사건건 부딪치지 않고 처신에 신중을 기한다. 정치에 나섰으면 두루 어울려 토론하지만 반드시 예를 갖춘다.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의를 추구한다. 공자는 여기에 “군자는 두루 사귀지만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소인은 한편에 치우쳐 두루 사귀지 못한다”며 ‘중용의 덕’을 강조했다.

1597년 1월 15일 정유재란 발발 직후 선조 임금이 이순신 장군 체포를 명했을 때 그를 살려낸 약포(藥圃) 정탁(鄭琢)은 ‘군이부당’을 평생 실천해 수많은 인재의 목숨을 살려내 나라를 구한 큰 인물이다. 파벌이 난무하는 조정에서 그는 늘 중용의 길을 실천했다. 앞장서서 편싸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의 보이지 않는 완충의 가교역은 위대했다.

당시 선조는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려 했다. 임금과 조정은 이미 이순신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남인인 우의정 오리 이원익(李元翼)이 바로잡으려 했지만, 일본의 계략에 휘말린 조정은 이순신에게 임금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등의 책임을 물어 ‘사형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이순신의 죽음은 시간문제였다.

이때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정탁이 72세 병환 속에서 용기를 내어 임금에게 글을 올린다. ‘죄가 없음을 아뢰어 구한다’는,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이다. 정탁은 선조의 입장을 지극히 존중하면서 나라와 국왕을 위해 이순신을 살려야 마땅함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이순신을 두둔하지는 않았다. 이 절제와 중용의 상소는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침내 이순신은 석방됐고 나라를 구해냈다. 격분한 선조의 모함으로 자칫 정탁 자신도 죽음에 이를 지 모를 상황에서 목숨 걸고 올린 ‘이순신옥사의(李舜臣獄事議)’ 상소문은 선조의 체면도 살리고 이순신을 살릴 명분도 준 것이다. 그 인연으로 이순신 장군의 후손은 경북 예천 정탁 대감의 제사에 수 백년 동안 참가해 왔고 그를 ‘약포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정탁은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 반란군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모함에 걸린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구명에도 적극 나섰다. “나라가 전란일 때는 한 명의 인재라도 아껴야 한다”고 변호했지만 그는 끝내 옥중 고문으로 사망한다. 왜적에게 빌붙었다는 혐의를 쓴 함숭덕(咸崇德) 등 6명에 대해서도 “증거가 불충분하니 관용을 베풀어 인재로 쓰자”고 건의했다.

 


◇ 위대한 조율자 정탁

 

예천 회룡포
예천 회룡포 전경, 사진=남민

 

약포 정탁(1526~1605)은 경북 예천 금당실 외가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안동 가구촌(佳丘村)으로 이사했고, 17세에 안동에서 퇴계 선생 문하생이 되었다. 20세에 다시 금당실로 돌아와 살다 22세에 예천 고평리 거제 반씨 반충(潘沖)의 딸에게 장가들면서 그곳에 터전을 잡았다. 36세에 진주향교 교수가 되었을 때 인근 초야의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스승 두 분을 모두 모신 행운아였다.

그는 오랜 관직 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벼슬에 욕심내지 않았다. 남에게 항상 관대했지만 옳고 그름 앞에선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명종이 병이 나 문정왕후가 부처에게 기도하려 향을 가져가려 하자 담당관이던 그는 “이 향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것이지, 부처에게 공양하는 향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정탁은 예천군 고평리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선조는 사제문을 내리며 “재상에 오르고 중추부에 발탁됐지만 치우침도 기울어짐도 없어, 공도(公道)가 저울처럼 공평해졌다”라고 평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정간공(貞簡公) 시호를 받았다. ‘네 편 내 편’ 당동벌이(黨同伐異) 정치판에서도 오로지 옳고 그름을 가치의 척도로 살아온 행적에 대한 국왕의 훈장이다.

약포를 대변하는 말은 선조가 내린 사제문의 한 구절 ‘일절이험(一節夷險)’이다. ‘편안할 때나 위기일 때나 한결같이 절의를 지켜 실천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배려했고, 남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성품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와 이름의 내용처럼 똑같은 삶을 살았다. 자신을 다듬고 연마(琢, 탁)했으며 ‘약초를 심는 밭(藥圃, 약포)’처럼 살아왔다. 파벌의 모함을 받은 사람을 살리고,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는데 ‘약(藥)’이 되었던 위인이다.

 


◇ 나아가고 물러남에 더러움이 없다

 

예천 정탁 선생 신도비
예천 정탁 선생 신도비, 사진=남민

 

“호성공(扈聖功)으로 숭품(崇品)에 오르고 얼마 후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했으니… (중략)작위를 탐해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선조실록> 약포의 졸기(卒記)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한 치의 더러움이 없었다. 물러나 고향에서 지낼 때도 그가 재상이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한번은 은퇴 후 내려와 지내던 고향 고평리 내성천에서 어느 초립동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약포 선생을 찾아뵙기 위해 가던 중, 무례하게도 강 건너편까지 업어달라고 하자 묵묵히 업어주었다는 일화는 약포의 삶 그대로다. 등에 업힌 초립동이가 “요새 약포는 뭘 하고 지내는지 아는가?” 하고 묻자 태연하게 “요새는 낚시하다 초립동이를 업어 물을 건너게 해 준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업힌 이가 깜짝 놀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예천 정충사
예천 정충사 전경. 사진=남민

 

약포의 향기가 고향인 경상북도 예천에 남아 있다. 그는 예천 읍내에서 동남쪽으로 3~4km 떨어진 고평리에 망호당이라는 초가를 짓고 살았다. 어느 때인가 없어지고 후손 역시 흩어져 살면서 종가고택은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는 1980년 국비로 지은 정충사(靖忠祠)가 있다. 조현명이 지은 신도비와 보물로 지정된 약포의 영정,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400여 년 전 선생의 기풍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마을엔 약포가 젊은 시절에 팠다는 우물 ‘중간샘’이 남아 있다.

내성천 건너편에서 상류로 2km 정도 올라가면 냇물이 ‘S’ 자로 휘감아 도는 곳에 약포가 직접 지은 ‘읍호정(揖湖亭)’이 있다. 옆엔 유림들이 세운 도정서원(道正書院)도 함께 있다. 휘돌아 가는 물길이 잔잔한 호수로 여겨졌던지 정자 이름에 ‘호수 호(湖)’ 자를 붙였다. ‘읍(揖)’은 ‘물 위에 뜨다’라는 의미와 함께 ‘인사하는 예를 갖춘다’는 뜻으로, 두 손을 맞잡아 얼굴까지 올리고 허리를 굽혀 갖추는 예를 말한다. 읍호정 정자 이름에서 사대부의 예스러움과 풍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예천 도정서원
정탁 선생을 모신 도정서원. 사진=남민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예천의 명소

 

용문면 금당실마을은 약포 선생의 고향마을이다.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서 사람이 살아남을 안전한 피신처 마을로 꼽은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옛날에는 외부에선 들어갈 수 없는 땅이었다. 전쟁과 기아, 전염병이라는 ‘삼재(三災)’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이런 곳을 정감록에서는 십승지(十勝地) 마을이라 칭했다. 

 

실제로 금당실에는 정치적 위기를 겪던 명성황후가 몰래 은신할 궁을 짓기도 했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 전통의 한옥과 담장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관광 마을로 발전하고 있다. 5월의 장미가 빨갛게 흙담장 위로 필 즈음 경치는 도연명의 전원이 부럽지 않을 곳이다.

 

예천 금당실 마을
예천 금당실 마을 모습. 사진=남민

 

내성천을 따라 읍호정에서 하류로 가면 풍양면 삼강리가 있고 2005년까지 영업을 했던 ‘삼강주막’이 나온다. 우리나라 최후의 주막으로,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많은 이들이 대포 한 잔 즐기는 곳이 됐다. 

 

회룡포(回龍浦)도 가까운 곳에 있다. 여름엔 초록의 농경지와 마을, 하얀 모래사장과 휘감아 도는 푸른 강물, 주변을 에워싼 신록의 산이 고요하게 펼쳐진다. 마을 건너편 비룡산 회룡포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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