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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바다' 나는 늘 그곳을 항해한다

4대째 선재도 지키는 김연용 작가

입력 2014-12-0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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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바하가 누비는 바다는 기면용 작가 저서명과 같은 ‘아버지의 바다’였고 그의 바다다.(사진제공=자우 김연용)

 

“바다에서 뛰어 놀고 있는 아들 바하를 보고 있으면 제가 보이기도 하고 가끔 아버지인가? 하기도 해요.”

아들 바하가 누비는 바다는 김연용 작가 저서명과 같은 ‘아버지의 바다’였고 그의 바다다.

4대째 선재도의 같은 바다를 지키고 있는 김연용 작가를 만나는 과정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같았다. 원래 만나기로 한 일주일 전에는 억수같이 비가 내리더니 이번에는 길이 막혔고 날은 추워졌으며 그의 연로한 외할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그리고 서해안에는 폭설주위보가 내려졌다.

뭘 해도 꼬이는 운수 사나운 길, 그럼에도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에는 그를 꼭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스멀거렸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대장장이였고 목수였던 아버지가 시력을 잃고 새로 지은 집과 어부로 살던 바다는 김연용 작가에게 아버지와의 추억과 궁핍한 삶이 서린 곳이며 현재 삶의 터전이다.

“아버지가 시력을 잃고 어부가 되면서 지금의 ‘바다향기’를 지었어요. 굴다리 뒤쪽 ‘당너머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어장이 있는 바다는 눈 먼 아버지가 오가기엔 너무 먼 거리였죠.”

한 가닥 줄에 의지해 바다로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늘 불안했다. 그래서 모래밭 위에 집을 지었다. 군 제대를 앞둔 그는 잡석을 깔아 집터를 다지면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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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첫 공간은 ‘자우 팩토리’란 이름으로 보존 중이다.(사진=허미선 기자)

 

바다에서 갓 잡은 어류를 회쳐주고 찜쪄주던 소박한 가게를 열었다. 2000년의 일이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3시면 일어나 나무며 쇳덩이 등을 퉁탕거리다 바다로 나갔고 그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배에 올랐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 그가 머물던 가족의 첫 공간은 ‘자우팩토리’란 이름으로 보존 중이다.

“저 곳은 마지노선 같은 데예요. 오른쪽 방이 아버지, 왼쪽 방이 어머니가 머물던 방이에요. 저는 마루 같은 가운데 공간에서 생활했죠.”

아버지의 손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사진도, 목수 일도 꽤 잘 해낸다. 사진 전공자도 아닌 김 작가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분노와 억울함이었다. 줄을 잡고 뒤뚱거리며 바다로 향하는 아버지를 보며 깔깔거리고 손가락질을 하는 손님들에 사진을 찍어 사연을 남기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대장장이였고 목수였어요. 백내장으로 눈이 멀었지만 유쾌하고 재주 많은 분이시죠. 앞으로 보시면 많이 도와주세요.”

그렇게 매일 사진을 찍고 쪽지를 남기다 보니 ‘인간극장’과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도 사연이 소개됐다. 사람들은 더 많이 찾아들었고 그의 사진과 사연도 다닥다닥 횟집 벽면을 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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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따라 배에 오르며 매일 사진을 찍어 사진을 벽에 붙였다. 아버지에 대한 김연용 작가의 사랑은 그렇게 빼곡히도 채워졌다.(사진제공=자우 김연용)

 

“예전에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밖으로 나돌며 촌놈 티를 벗기 위해 염색이며 브랜드 옷 등에 집착했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전 아버지의 발끝에도 못 미치게 살고 있어요.”

인천에서도 그의 아버지가 만든 호미를 사겠다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대부도의 어떤 이는 집을 짓는데 그의 아버지를 초빙하기 위해 분섬을 내어줄 정도였다.

“아버지는 선재도, 대부도에선 최고 대장장이였고 목수였어요. 늘 긍지를 가지고 계셨죠. 그 긍지를 제가 아빠가 된 후에야 이해했어요. 직접 가르침을 주시진 않았지만 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걸 배웠죠. 저도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어졌어요.”

요즘 그는 부쩍 어떤 아버지가 될까를 고민 중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유물처럼 두고 간 집 짓는 장비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바다향기’를 조금씩 바꾸고 꾸미며 아버지의 바다와 집에 ‘아빠’ 김연용의 삶을, 그리고 ‘아들’ 바하의 어린 시절을 덧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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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김연용 작가 그리고 그의 아들. 아버지의 바다는 그의 집이며 아들 바하의 놀이터다.(사진제공=자우 김연용)

 

해변에 그네와 미끄럼틀을 만들었고 현재는 그가 목공 작업을 할 때 옆에서 함께 놀며 돕는 바하의 공간을 ‘공방’으로 꾸미는 데 한창이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일벌레였지만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분이셨어요. 저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목공 도구함을 열고 용접 마스크를 써요. 아버지도 힘들 때 대패질을 하시고 용접을 하셨거든요.”

가보처럼 손재주며 목공 도구함이며 바다며 집이 대물림된다. 그는 2년 동안 이곳을 떠나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때였다.

“늘 꿈꾸던 지중해로 떠났어요. 지중해는 신기루 같은 막연한 동경의 바다였어요. 처음엔 좋았죠. 제가 꿈꾸던 이미지 그대로였거든요. 하지만 이미지가 사라지고 삶이 눈에 들어오면서 아버지도 없는 그 바다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어디나 삶은 비슷하다. 그래서 2년 만에 돌아왔다. 스스로 꿈꾸는 이미지를 고향 바다에 만들고 살면 늘 여행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와 가게에 회칠을 시작했다. 망치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다 맥주 한잔, 시 한 줄을 즐기는 아버지의 바다는 그에게 곧 여행지다.

“작지만 저만의 바다에 여행자들이 찾아오고 이야기를 나누는 삶이 정말 좋아요. 같은 이야기도 다른 생각으로 풀어내는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니 그들을 통해 몰랐던 저를 발견하곤 하죠.”

아버지는 그에게 그런 삶을 남기고 가셨다. 매일 상상하고 그 상상을 제 손으로 만드는 공간, 그곳은 즐거운 아버지의 바다이며 김연용 작가의 집이자 바하의 놀이터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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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김연용 작가의 바다는 그와 아들의 바다이기도 하다.(사진제공=자우 김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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