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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속성의 힘

입력 2023-11-14 14:09 | 신문게재 2023-11-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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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선 문화부장
모든 것이 급변하고 최첨단화되는 시대다. 이에 따른 ‘변화’도 덩달아 인류의 숙제이자 반드시 갖춰야 하는 덕목이 됐다. 그 숙제는 점점 버거워지며 강박증에 시달리게 하기도 한다. 그런 시대에 구시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한우물 파기’의 힘은 그 버거운 숙제 ‘변화’만큼이나 분명한 가치를 갖는다.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 음반을 만들지 않는다는 논리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공급이 없기 때문에 수요가 없지 수요가 없어서 공급이 없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흐름을 쫓느냐 이끄느냐의 차이가 담긴 의사 출신 박종호 풍월당 대표의 이 철학이 20년을 꼬박 월세 2000만원씩을 감수하며 한 자리를 지키게 했다. 한때는 트렌드 세터들이 모여들었고 셀럽들의 커뮤니티이며 K팝로드가 조성된, 그 핫한 압구정 한복판에서 20년을 묵묵히 존재했던 클래식 전문매장 풍월당은 클래식 애호가들, 해외 클래식 관계자 및 아티스트들에겐 ‘성지’(聖地)에 가깝다. 

더 싼 월세의 공간이 있어도 이사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의 풍월당이 첫 자체제작한 음반이 세계적인 바그너 스페셜리스트 연광철의 한국가곡집 ‘고향의 봄’이다. 애초 발매·유통을 약속했던 유명 레코드사도 손익 계산 후 손을 뗀 상황에서 풍월당의 회원 200여명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기부했고 뉴욕에서 온 나이 지긋한 이가 그 자리에서 지갑을 열어 쾌척한 1만 달러도 쓰였다. 그 커버는 故박서보 화백의 작품이다. 이 역시 풍월당의 단골인 박 화백의 아들이 작가 생전에 사용을 허락했다.

“그들이니까요!(Because they just are!)”

협연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Yefim Bronfman)이 6년만에 내한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oyal Concergebouw Orchestra)가 글로벌 최고 악단으로 꼽히는 이유를 지독히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이유는 1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연에서 여실히 증명됐다. 135년을 이어온 그들의 ‘한우물’은 영국의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 프랑스 음악전문지 ‘르 몽드 드 라 무지크’ 등이 글로벌 최고 악단으로 꼽을만했다. 

마에스트로 파비오 루이지(Fabio Luisi)를 필두로 ‘벨벳’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현악파트는 물론 유난히 활약이 눈부셨던 호른을 비롯한 관악기들은 그 대단한 글로벌 악단들의 내한 러시 사이에서도 “맨 앞자리로!”를 외칠 만큼 올해 클래식 공연 중 단연 최고라 할 만했다. 

2015년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 당시 손가락 부상으로 건반에 핏자국을 남기는 연주를 선보인 그들의 협연자, ‘FIM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예핌은 어떤가. 수십년간 글로벌 명문악단들과 연주했고 그래미상까지 거머쥔, 이미 준비된 연주가인 그는 오케스트라 보다 하루 먼저 입국해 두대의 피아노를 오가는 리허설을 이어가며 공연 당일 오후에야 연주할 피아노를 선택할 정도로 정성을 들인 것으로 알려진다.

13일 29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프로야구 팀 LG트윈스 뒤에는 그 기간만큼 인고의 세월을 견딘 ‘열혈’ 팬들이 있었다. 팀이 연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2000년대 들어‘DTD’(Down Team is Down,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탈LG효과’ ‘헬쥐’ 등으로 불릴 때도 응원을 멈추지 않고 암흑기의 정규리그 순위를 조합한 비밀번호 ‘6668587667’을 사용하며 한우물을 판 그들은 29년만에 이룬 LG트윈스 통합우승의 일등공신이다. 일찌감치 단일 시즌 100만 관중 동원,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첫 30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한국 프로스포츠 팀 중 역대 유입 관중수 1위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팬들은 그 ‘한우물 파기’를 대물림해가며 이어가고 있다.

오래 됐다고, 옛것이라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모두 없어져야하거나 무가치로 폄훼돼도 좋은 건 아니다. ‘마쓰자키 우리’의 SF단편소설집 ‘슈뢰딩거의 소녀’ 중 ‘꽁치는 쓴가, 짠가’는 사라진 꽁치 소금구이 맛을 재현하려는 근미래의 소녀가 증조할머니, 숯자장인 그리고 촉각 재현 AI 등을 이음으로서 본질을 꿰뚫고 삶을 온전히 나로서 살아내는 데 유효한 메시지들을 전한다. FIMA의 다소 무뚝뚝한 “그들이니까요!”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한 건 그래서다.

허미선 문화부장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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