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비바100 > Leisure(여가) >

[비바100] 전문가의 시대… 팔방미인 천재들이 그립다

[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피터 버크의 '폴리매스'

입력 2023-12-09 07:00 | 신문게재 2023-12-08 11면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23120710

문화사학자인 피터 버크가 시대를 앞서 간 서양의 통합형 인재 ‘폴리매스(Polymath)’ 500인의 발자취를 추적한 책이다. 르네상스 시대 다빈치부터 현대의 수전 손택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지식의 최전선에서 인류 역사를 새로 써 온 융합형 인재들의 이야기다. 저자는 “지금처럼 지식 노동이 분업화된 시대에는 제너럴리스트, 즉 만능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열 명 이상의 몫을 할 수 있으며, 지금처럼 고도로 전문화된 시대에는 더욱 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23120801050003578
폴리매스(세상을 바꾼 천재 지식인의 역사)|피터 버크|예문아카이브

◇ 폴리매스는 누구인가

 

1
역사상 최고의 폴리매스로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폴리매스란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을 발휘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단순히 ‘천재’를 넘어 왕성한 탐구 정신으로 서로 무관할 것만 같은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약했던 인재들이다.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고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해 시대를 변화시킨 융합형 인재들이다. 연결성을 고민 않고 지식만을 축적하는 것이 분리형 폴리매스라면, 통합형 폴리메스는 지식 통합이라는 비전을 품고 서로 다른 지식들을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묶으려 노력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역사는 폴리매스들에게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다방면의 괄목할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 두 가지 업적으로만 기억되거나, 피타고라스처럼 ‘협잡꾼’ 또는 ‘지식팔이꾼’으로 비난 받기도 했다. 수학자 파스칼처럼 ‘독학으로 모든 지식을 습득한 외로운 천재들’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저자는 그러나 폴리매스들의 지식과 성실함, 호기심이 합쳐졌을 때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일러 준다.


◇ 폴리매스의 특별한 자질

 

2
수전 손택

 

폴리매스에게는 왕성한 잡식성 호기심과 탁월한 창의력 같은 유전적 기질이 있다. 여기에 양육 환경이나 살아온 이력, 시대 상황 등이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특히 높은 집중력에 감탄한다. 잠바티스타 비코는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서 읽고 쓰는데 익숙했다. 남다른 기억력도 있다. 새뮤얼 존슨은 읽거나 들은 바를 무엇이든 잊지 않았다. <실락원> 같은 책을 모두 암기한 매콜리도 있고, 존 폰 노이만은 한번 읽은 책이나 논문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능력을 과시했다.

빠른 정보 흡수 능력은 이들만의 확연한 자질이며, 풍부한 상상력은 중요한 정신적 도구다. 이들은 몽상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놓친 ‘연관성’을 알아채는 능력이 탁월했다. 한 학문에서 습득한 지식을 다른 분야 문제 해결에 남달리 활용했다. 아이디어 재사용이라는 특별한 재능도 가졌다. 사무엘 보샤르, 제임스 프레이저가 ‘비교 방법론’을 주도한 사실이 놀랍지 않다. 이들은 또 에너지 넘치는 노력가들이다. 피에르 벨은 ‘피로를 모르는 연구자’였고 뷔퐁은 하루 14시간을 일하는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였다.


◇ 폴리매스의 한계

 

5
존 폰 노이만

 

폴리매스들은 대부분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피에르 다니엘 위에나 존 폰 노이만은 하루 3시간 정도만 잤다.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 습관을 가졌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과로가 일상이던 하버트 스펜서는 신경쇠약으로 고생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사망 원인은 과로사였다. 이들은 시간을 함부로 쓰지 못해 대부분 금욕주의자로 남았다. 열정 만큼이나 경쟁심도 남달랐다. 아이작 뉴턴, 카를 만하임은 물론 <코스모스>를 쓴 훔볼트와 폴라니, 헉슬리 형제들의 경쟁은 눈부신 업적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관심사가 분산되는 바람에 작업이나 연구를 중도에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대표적이었다. 라이프니츠도 중세 독일사를 완성 못했고, 로버트 훅도 그래서 후대의 존경을 덜 받고 있다. 칼 마르크스 역시 너무 다양한 관심사 탓에 죽기 직전에야 <자본론>을 완성해 엥겔스에게 출간을 맡겼다. 공부에 방해받기 싫었기에 독신 폴리매스도 많다. 찰스 다윈은 결혼의 단점 중 하나로 시간 손실과 저녁 독서의 불가능함을 꼽았을 정도다.

 


◇ 지리적·사회적 환경과 종교의 영향

 

6
막스 베버

 

저자는 “뛰어난 기억력과 넘치는 에너지는 ‘양육’보다는 ‘본성’에 가깝다”며 출생지의 지리적·사회적 환경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 소개된 500인 중에는 독일인이 84명으로 가장 많고 영국(81명)과 프랑스(76명), 북아메리카(62명), 이탈리아(43명) 순이다. 학교나 대학, 도서관 등을 통한 지식 접근 기회가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상업도시였던 함부르크는 1529년에 설립된 ‘요하네움’이라는 학교가 근대 초기에 활약한 6명의 독일 폴리매스에게 맞춤형 환경을 제공했다고 전한다.

종교적 지형도 관련이 깊다. 막스 베버가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루터교와 칼뱅주의, 성공회를 막론하고 프로테스탄트 성직자 출신의 19명의 폴리매스를 낳았다. 유대교도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18년 이후 태어난 250명의 폴리매스 중 55명이 유대인이다. 저자는 “유대계 폴리매스들은 대개 본인이 망명자이거나 망명자의 자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다른 문화를 바라볼 수 있었던 덕분에 사고의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폴리매스의 가정 교육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나 훔볼트 형제, 토머스 영, 존 스튜어트 밀, 버트란트 러셀 등 많은 이들이 유년기에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독학파도 의외로 많다. 앨런 튜링은 교과서보다 자신만의 방법을 선호했고, 데이비드 흄은 “책에서 만날 수 없는 지식은 교수에게도 배울 수 없다”고 했다. 잠바티스타 비코와 새뮤얼 존슨은 서적상의 아들이었기에 마음껏 혼자 책을 볼 수 있었다. 1만여 권 장서를 소장한 교수를 아버지로 둔 오트 노이라트는 자신의 첫 계산이 서재의 책이 몇 권인가 세어 본 것이었다고 전했다.

폴리매스 가족도 있다. 빌헬름과 알렉산더 본 훔볼트 형제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학자 집안인 레나크 가족 중 폴리매스는 조제프, 살로몽, 테오도르 3형제의 이름 첫 글자인 J.S.T는 프랑스어로 ‘나는 모든 것을 안다(Je sais tout)’를 의미할 정도다. 여섯 형제가 모두 뛰어났던 프로디 가족도 조르조와 파울로 두 명이 폴리매스에 이름을 올렸다. 나머지 4명도 수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민족학’의 선구자인 아우구스트 폰 슐뢰처처럼 부녀 폴리매스도 나왔다.


◇ 단독 연구에서 ‘학제’ 융합 연구로

 

7
오토 노이라트

 

폴리매스 한 사람이 맡던 연구를 이제는 집단이 수행한다. 18세기부터 ‘학제’라는 용어가 나왔다. 19세기 들어선 제너럴 일렉트릭, 스탠다드 오일 같은 큰 기업들이 후원한 산업연구가 이런 형태로 이뤄졌고 두 차례 세계대전 후에는 각 나라 정부가 자금을 댄 집단 연구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융합연구는 전 세계적인 학문통합 운동 바람 속에 특히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사회과학계에서 융합연구소가 설립되어 활성화 기반이 다져졌고, 잇달아 고등 연구기관들이 생겨났다.

체계적인 학문 통합 운동은 1930년대에 본격 등장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폴리매스 오토 노이라트에서 시작된 ‘빈 학파’는 경제 영역의 토론 때에도 철학의 일반 개념을 반드시 함께 다루도록 의무화하기도 했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는 “지식 통합 시스템이 미래에 가장 생산적인 연구 주제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 대학의 역할과 책임

 

8
알베르트 아인쉬타인.

 

대학들도 경계를 넘는 학문 통합의 길에 함께 나섰다. 대표적인 곳이 192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다. 이곳은 마르크스 학자들로 구성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요람이었다. 미국에서는 특히 자선 재단과 대학들, 정부까지 가세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모두에서 학제간 융합 연구가 크게 장려되었다. 시카고 대학에서는 로버트 허친스가 불과 30세 나이에 총장에 취임해 사회과학 분야에서 특출난 학재간 융합 연구회를 만들어 이른바 ‘시카고 학파’ 탄생에 기여했다.

대학의 고등연구소는 학문간 교류 혹은 협업의 상징이 되었다. 1931년에 세워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는 초창기에 알베르트 아인쉬타인, 존 폰 노이만과 함께 미술사가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있었다. 포드 재단이 후원해 1954년에 캘리포니아 팰토앨토에 세워진 행동과학 고등연구소는 기존 학문 분류 체계를 따르지 않아 주목 받았다. 파리인문학연구소(1962년), 빈 고동연구소(1963년), 베를린지식연구소(1980년), 런던 고등연구대학(1994년),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소(2008년) 등이 줄을 이었다.


◇ “지금은 지식 위기의 시대”

저자는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폴리매스의 ‘맞춤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는 “그나마 소수의 박학다식한 학자들이 살아남았다는 점을 위안 삼는다”며 작곡가 조지 스타이너,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와 슬라보예 지젝을 ‘현존하는 폴리매스’라고 추켜 세웠다.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론의 여지 없는 ‘우리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공언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사회생물학’으로 통섭의 경지를 보여 준 미국인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을 높이 평가했다.

저자는 폴리매스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지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1950년대부터 폴리매스의 수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낙관론자라면 디지털 세대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며 “폴리매스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는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