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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22번의 세계 패권전쟁, 승부처는 '과학'이었다

[브릿지경제 신간 베껴읽기] 박영욱 <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

입력 2024-04-13 07:00 | 신문게재 2024-04-1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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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로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과학’이었음을 설명해 주는 책이다. 세계 패권을 뒤흔든 24개의 전쟁 속에서 과학과 기술이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그런 ‘창조’와 ‘파괴’의 만남에 과학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졌었는지를 소상하게 알려 준다. 대학교수인 저자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무렵에야 전문 직업인으로 대접받는 과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이제는 이들의 자질과 능력이 국가 경영과 군사력 강화에 상당한 쓸모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 때는 영예롭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참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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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화학의 아버지’ 앙투안 라부아지에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영국과 앙숙이던 프랑스는 미국에 엄청난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쏟아 부었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머스킷 총과 화포 등 최신 무기를 갖추었지만 화약의 품질이 문제였다. 이 때 화약국장에 임명된 사람이 근대 화학혁명의 주역, 앙투안 라부아지에였다. 공기 중 산소 원소의 존재를 처음 확인하고 ‘질량보전의 법칙’을 발견했던 그는 과학자가 전문 직업인으로 변모하는 과도기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프랑스 혁명기에 ‘민중을 핍박한 반혁명자’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 과학, 정치와 만나다

과학자들이 조직적으로 단체를 만들어 집단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1660년 영국의 왕립학회와 1666년 프랑스의 왕립과학아카데미 설립이 시작이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프랑스 과학의 전성기에 과학자들은 직업 전문인으로 국정 운영과 군대 경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과 기술에 재능만 있으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뽑았던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나폴레옹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프랑스 군대를 유럽 최고의 강군으로 키우는데 혁혁한 성과를 내며 과학과 공학 중심의 프랑스 과학 황금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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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적극 지원했던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 군대를 유럽 최고의 강군으로 키우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 근대 해군력의 진화와 군산복합체의 태동

영국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을 격퇴했다. 기술개발에 소극적이던 프랑스와 달리, 철강 산업을 키워 군사기술의 혁신과 무기제작의 산업화를 도모한 결과였다. 대규모 국가재정을 투입해 정부가 계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정부와 군부, 군수제작 기업 간 협업이 공고해졌고 이는 현대적 의미의 무기산업화와 ‘군산 복합체’ 출현을 낳았다. 저자는 “부정적 비판도 있지만, 이 유기적 관계는 현대 군사기술 발전 양상의 본질이자 방위산업의 주요 특성”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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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무기 로비스트로 ‘죽음의 상인’으로 불렸던 바실 자하로프.

 

◇ 무기 로비스트의 등장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강력한 무기 덕분에 19세기 후반에 인류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군국주의 시대가 열렸다. 경쟁적으로 군비 예산을 늘리고 신무기로 무장하며 국지전이 벌어졌다. 1세대 방산 기업과 함께 ‘바실 자하로프’ 같은 전설적인 무기 로비스트가 등장했다. 그는 신형 잠수함을 적국 관계였던 러시아와 튀르키예에 동시에 판 일화로 유명하다. 기업의 인수합병에도 탁월해, 막대한 자본력의 국제금융 세력과의 밀월관계도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이런 ‘죽음의 상인’ 들은 악마적 존재이면서도 군사기술의 혁신과 거대 무기산업을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 공포의 살상무기 ‘화학전’

독가스가 1915년 4월 22일 벨기에의 2차 이프로 전투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처음 고안한 이는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그는 1909년 공기 중에 무한히 섞여 있는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고, 이를 카를 보슈가 제품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소비료는 인류의 식량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전쟁꾼들은 유기질소 비료의 핵심 원료인 질산염을 화약과 폭약, 대량살상무기의 원료로 바꿔 버렸다. 하버 자신이 그에 앞장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암모니아 합성의 공로로 191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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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폰이 나일론 소재를 이용해 만든 낙하산 등 신무기는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EXPRESS

 

◇ 듀폰, 철보다 강한 섬유를 군수품으로

엘뢰테르 듀폰은 1802년에 미국에서 다이너마이트와 화약을 만드는 회사 ‘듀폰’을 설립했다. 남북 전쟁에서 큰 재미를 본 듀폰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급성장 했다. 1934년 합성섬유 폴리아미드 5-10 개발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나일론의 시작이었다. 1939년 나일론의 대량생산으로 듀폰은 생산공정을 아예 전시체제로 바꿔 철모 피, 총기 끈, 낙하산, 밧줄 등을 계속 만들어냈다. 원자폭탄의 핵심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원자로까지 지어 2차 대전 승리에 기여했다. 당시 그는 ‘전쟁꾼’이라는 기업 이미지가 굳어질 까 우려해 단돈 1달러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 전쟁이 키운 MIT와 칼텍

미국에 비해 낙후되었던 미국 대학들은 19세기 후반부터 과학과 공학 연구중심 대학으로 거듭났다. 특히 20세기에는 존스홉킨스와 시카고, 메사츄세츠 공과대학(MIT), 칼텍을 중심으로 성장 발전했다. 그 가운데 1865년 남북전쟁 끝에 엔지니어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MIT는 미국 대학과 산업계 연구개발 시스템의 축소판이었다. 때 마침 터진 1차 대전으로 산학협력 대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연방정부까지 설득해 전기·항공 공학 등의 중심지로 완전히 뿌리 내렸다. 칼텍도 기업과 연방정부의 든든한 지원 속에 아인슈타인 같은 최고의 과학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 상대성 이론과 원자핵분열


강력한 군·산·학 복합체가 성장하면서 드디어 원자폭탄이 개발된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상대성 이론’은 그 기초가 되었다. 우라늄으로 폭탄을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된 독일 출신의 망명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미국 정부의 무기 개발과 연결시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맨해튼 프로젝트’ 출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후에 “내 인생의 한 가지 큰 실수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개발을 권고하는 편지에 서명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독일이 먼저 만들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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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의 설계자 아인슈타인(왼쪽)과 완성자 오펜하이머.

 

◇ 오펜 하이머의 ‘맨해튼 프로젝트’


암호명 ‘프로젝트 Y’의 총 책임자는 육군 공병의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 연구 책임자는 38세의 젊은 물리학자 오펜 하이머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닐스 보어,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 당대의 과학자들이 총 동원되었다. 급사한 루스벨트의 후임 트루먼이 처음 보고받고 기절했을 정도로 엄청난 비밀 프로젝트였다. 공학적 난관들을 이겨내고 원폭 제조에 성공했지만,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 “이제 나는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고 자조했다. 히로시마 등에 폭탄이 투하된 후 연구에 참여했던 상당수 과학자들도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 핵이 만든 또 다른 무기 ‘수소폭탄’


수소폭탄은 원자핵 융합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한다.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했던 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한스 베테와 에드워드 텔러가 처음 발견했다. 1950년 초 트루먼의 수소폭탄 개발 승인, 때 마침 터진 한국전쟁은 수소폭탄 개발을 가속화시켰다. 1952년 11월 1일 텔러의 주도아래 태평양 마셜 군도에서 행해진 지상 실험에서,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의 1000배 이상인 10메가 톤의 위력을 입증했다. 1954년에는 폭격기에 탑재한 최초의 실전 투하시험도 성공했다. 소련 역시 1955년에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해 인류는 거스를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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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 ‘노틸러스’.

 

◇ 최고의 전략자산 ‘핵 잠수함’

육군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성공하고 공군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미군을 대표한다 자부하던 해군에 비상이 걸렸다. 대세가 된 핵개발을 둘러싼 군벌 경쟁에서 뒤쳐진 해군으로선 타개책이 필요했다. ‘핵 잠수함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먼 리코버 대령이 그 돌파구를 열었다. 그는 당시 디젤 엔진과 납 축전지를 쓰던 잠수함에 원자로를 장착해 1955년 1월에 인류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 ‘노틸러스’ 건조에 성공했다. 이로써 핵 잠수함은 미국 최고의 전략자산이 되었고, 미국과 소련 간 전략자산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 우주로 쏘아지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원자폭탄, 수소폭탄도 운반 수단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인류 최초의 핵 투하 전력 폭격기 B-29 이후 관련 기술이 진화를 거듭해,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고더드가 액체 연료를 이용한 최초의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그의 연구는 1960년대 NASA 달 탐사 계획의 밑거름이 되었다. 독일 히틀러가 그의 이론을 차용해 베른헤르 폰 브라운에게 V-2라는 로켓을 개발케 해 성공함으로써 연합군에게는 ‘공포의 무기’가 되었다. 다행히 그 기술들을 가지고 브라운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미국은 아폴로 계획은 물론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도 성공한다.

◇ 정밀 유도 무기부터 인공지능까지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의 실질적인 억제력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너무 위험해 서로를 공격할 수 없었다. 핵보다 정밀유도무기가 훨씬 더 가성비 높은 전력임을 확인한 미국은 정밀 타격 중심의 전장 운영 시스템으로 전환했고, 한 동안 ‘네트워크 중심전’은 미국의 대표 국방전략이 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를 필두로 엄청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 미국 최상의 국가안보전략은 실리콘밸리의 벤처와 스타트 업 같은 산학연의 혁신 동력을 최대한 국방분야로 끌어들여, 사이버 영역에서 위협 요인으로 부상한 중국 등과 ‘미래전’을 대비하는 것이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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