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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브루스 리? 브루스 칸!' 한국에도 진정한 마샬 액터가 있다

[人더컬처] 브루스 칸, 영화 '더 킬러:죽어도 되는 아이'속 러시아 조직원 역할
영어로 'Martial Arts'라 불리는 무술 연기의 최고권위자

입력 2022-07-18 18:00 | 신문게재 2022-07-1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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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킬러: 죽어도 되는 아이’로 스크린을 그야말로 씹어삼킨 브루스 칸(사진=이철준기자)

 

“언젠가 액션을 못하게 된다면? 연출도 할 수 있게 틈틈이 시나리오도 쓰고 있어요.”

두 눈을 의심했다. 지난 13일 개봉한 영화 ‘더 킬러: 죽어도 되는 아이’(이하 더 킬러) 속 액션이 너무 찰져서였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영화 ‘아저씨’의 10년 후 버전이라 불려도 좋은, 전직 킬러인 의강(장혁)이 여고생 은지(이서영)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기본 스토리다. ‘더 킬러’의 매력은 솔직함이다. 개연성보다는 캐릭터의 매력에 집중해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가진 진부함보다 보는 맛이 남다르다. 다들 ‘장르가 곧 장혁’이라고 했지만 그 상대역 유리 역할이 더 눈에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극 중 최강 빌런인 유리(브루스 칸)는 러시아 혼혈 범죄 조직원이다. 군용대검인 발리스틱 나이프를 능숙하게 다루며 주인공에게 유일하게 대적 할 만큼 최강의 무술실력을 가지고 있다. 절권도 유단자이자 무술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장혁이 브루스 칸을 출연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사실은 이미 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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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액션을 4/4박자로 표현한 그는 16분 음표를 보는 듯한 평소의 무술 템포를 눈 앞에서 보여주기도.(사진=이철준기자)

 

홍콩을 거쳐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브루스 칸은 현재 ‘존 윅’의 무술팀이 된 감독을 직접 가르쳤을 정도로 실력파로 불린다. 그가 직접 각본과 출연을 맡은 ‘리벤저’는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킹덤’과 함께 ‘가장 돈 많이 번 한국 콘텐츠’로 선정됐을 정도다. 

 

무려 3개월간 캐스팅을 고사했다는 부르스 칸은 “다른 이유는 없다. 극 중 유리는 격투말고는 보여줄 게 없는 캐릭터였다”면서 “이 바닥의 관례기도 하지만 암묵적으로 무술감독이 다 짜 놓은 판에 아이디어를 얹는 건 실례라 피해 다녔던 것 같다. 출연을 결정하고는 (장)혁이의 무술스타일에 흡수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더 킬러’에서 의강과 유리는 3번의 대결을 치른다. 쫓고 쫓기는 처음 두번의 부딪힘 이후 마지막 세 번째는 그야말로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대리석과 나무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세트 내부를 초토화시킬 만큼 강력하고 색다른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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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한 장면. 그는 “이기고자 하는 욕구를 단순하게 보여주기 보다 관객들이 조바심을 느끼게끔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사진=본인제공)

 

“시사회 후 관객들조차 ‘그 장면이 더 길었으면’하더라고요.(웃음) 통쾌하고 짜릿했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아마추어들은 자신의 분량만 보이니까 다치기도 하지만 연륜이 차면 찰수록 안 다치고 찍는 법을 알죠.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브루스 칸의 본명은 김우석. 하늘의 별이 된 남동생이 무술전문 배우를 꿈꾸던 형에게 직접 지어준 예명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브루스 리, 징기스 칸 아니냐면서 둘을 합치면 어떻겠냐고 하더라”면서 “저 역시 곧 들어갈 차기작에 동생 이름인 우진을 주인공 이름으로 넣었다. 이제는 이렇게나마 다시 만날 때가 된 것 같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미술에 빠진 수줍은 소년이었다. 또래보다 키가 작았기에 지기 싫어 시작한 게 운동이었다. 낮에는 화실에 다니고 저녁엔 동네에 있는 모든 체육관을 돌았다. 

대통령이 지역방문을 하면 빼놓지 않고 초대되는 유력가 아버지와 그 당시에는 드문 의사 어머니를 둔 그는 집안의 기대를 뒤로 하고 무작정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연기를 하는 배우보다 무술을 하는 배우가 꿈이었던 그가 겪은 현실은 비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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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칸의 글로벌적인 인맥을 보여주는 사진. ‘프레데터’ 팀이 그의 촬영소식을 듣고 한국 영화 현장에 커피차를 보내줄 정도로 막역하다. (사진=본인제공)

  

20대 후반이란 늦은 나이탓도 있겠지만 무술이 특화된 배우가 없는 분위기가 팽배한 시대였다. 동료 선후배들은 스턴트맨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그 중 몇몇은 무술 감독이 되는 게 다였다. 전체 회식이 있는 날이면 액션팀이 가장 구석에 자리잡는, 이해할 수 없는 계급사회였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예술이 영화라 생각했던 그에게는 배신감도 컸다. 그는 “발차기가 특기였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 본 제작자가 홍콩행을 추천했다”면서 “도착하니 거기도 홍콩반환을 앞두고 무술영화가 사양산업이더라.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간 홍금보가 직접 전화를 해와 미국까지 가게됐다”고 말했다.

 

30대 초반 9.11테러가 터진 직후라 미국행 비자를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시절이었다. 대사관에 직접 찾아가 그동안 찍은 필름을 모두 보여주고 인터뷰를 하며 영화산업에 대한 포부를 밝혔더니 “당신은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며 비자를 내줬다. 학생비자로 들어간 미국에서 그는 ‘데어데블’의 스턴트, ‘라스트 이브’의 주연 등을 소화하며 활동영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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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견자단이 내한한 듯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는 브루스 칸은 “내 정신적 지주는 역시나 브루스 리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10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철학가이자 무술인”이라고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진=이철준기자)

 

“그때 사귄 미국 친구들한테 무술감독이나 스턴트하는 애들이 가장 많은 체육관을 소개받았어요. 거기서 주 1회 제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니 누가 구석에서 쑥덕쑥덕거리더라고요. 당시 최고로 잘 나가던 ‘매트릭스’ 무술팀이었죠. 이후 투자자를 만나 킥복싱 센터를 열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중 한명이 ‘존 윅’의 액션 멤버가 됐고요. 뿌듯함이 없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승승장구하던 30대 중반 한국행을 택한 건 임종을 앞둔 아버지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친구들이 의사나 변호사 혹은 가업을 이어 사업가로 잘 나가는 자식 자랑을 할 때 단 한번도 자신의 성공을 입밖에 내놓지 않은 분들이었다. 브루스 칸은 “서운하긴 해도 원망스럽지는 않다. 부모님이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며 엄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당시로선 드문 미인이셨다”고 눙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그는 액션전문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자신만의 차별적인 액션 스타일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일부러 운동보다 뮤직비디오의 댄스나 전시회를 가기도 한다. 무술을 잘하려면 의외로 정적인 걸 중시해야 오래 버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사진=이철준 기자 bestnews2018@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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