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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발레리나에서 '희망전도사'로 제2의 삶 시작… "일단 도전하세요"

[열정으로 사는 사람들] 최혜영 한국장애인협회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장

입력 2016-0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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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으로 사는 삶도 만족해요. 장애를 얻음으로써 조금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매사에 감사하게 됐으니까요. 오늘도 제 일을 할 수 있는 하루가 감사해요.”

휠체어에 몸을 맡긴 작은 체구에서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두 눈에 자신감이 가득하고 인사를 거네는 입매가 참 야무졌다.

최혜영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장(37)은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개선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강동대학교 사회복지 행정학과 조교수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최혜영 센터장
최혜영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장.

 

◇ 발레리나에서 장애인식개선 명강사로… 제2의 삶을 살다

“장애인을 무조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어요.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저를 비롯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땀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는 장애를 당하기 전에는 꿈 많은 발레리나였다. 지난 2003년 공연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태풍으로 빗길에 차 사고가 나면서 사지 마비 장애를 얻게 됐다.

가벼운 몸짓과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무대를 날아오르던 그는 장애를 입고 난 후 한동안 극심한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제가 다치고 난 후 부모님이 마음고생으로 몸이 심하게 아프셨어요. 당시 만삭이었던 언니도 우울증에 시달렸고요. 나 때문에 가족이 아프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어 무작정 고향인 부산에서 홀로 서울로 상경했어요. 아무런 준비 없이 홀로 생활하니 물건 하나가 떨어져도 주울 수가 없어 구급대원이나 경비아저씨의 도움을 받곤 했죠.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고난도 잠시, 그는 강단 위에서 희망의 끈을 붙잡았다. 우연한 기회에 국립재활원에서 장애 발생 예방 교육을 위한 강사로 서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자신의 이야기에 울고 웃는 학생들을 보며 다시 사회로 뛰어들 용기를 냈다.

“제 이야기에 울고 웃는 친구들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한다는 것은 참 좋구나’를 느끼며 위로를 받았어요. 그리고 다치기 전에 발레 강사로 일을 했기 때문에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가르치는 것 또한 적성에 잘 맞았고요”

하지만 교육 주제가 장애 발생 예방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장애 발생 예방이라는 것이 결국 장애를 입지 말라는 말이잖아요. 하지만 저는 장애를 지녔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왜 장애가 무섭다고 이야기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09년 한국척수장애인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를 직접 설립해 장애인도 열심히 살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을 알리고 있어요”

그가 설립한 센터는 현재 강사가 36명이나 되는 알찬 센터로 성장했다. 강사 모두 장애를 극복하고 현직에서 명강사로 활약 중이다. 제2의 시련을 극복하고 이를 다시 성장의 계기로 삼는 이들이 늘어날 때마다 정말 뿌듯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최 센터장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강의를 위해 일반 학생들 틈에 섞여 사회복지학 석·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남편의 조언과 지지가 큰 보탬이 됐다.

그는 2011년에 같은 사지 마비 장애인이자 휠체어 럭비선수로 활약 중인 정낙현씨와 결혼했다. 정씨는 다치기 전까지 수영 선수였는데 다이빙 사고로 사지 마비 장애를 얻게 됐다. 동갑내기로 여느 커플처럼 싸우기도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가장 큰 버팀목이다.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재활원 선생이었고 남편은 당시 신발도 못 신는 찌질이였죠. 하하. 그러다 저를 만나 재활 차원으로 럭비를 시작해 지난 2014년 장애인 아시안 게임에서 휠체어 럭비팀 은상까지 받았어요”


◇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용기내세요”

그는 사고 전에도 “미친 것처럼 일했다”고 이야기 했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지런한 성격 덕에 그는 한동안 까맣게 잊었던 무대 복귀의 기회를 잡았다.

2012년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뮤지컬을 하자는 제안을 받은 이후 지난해까지 무대활동을 쉬지 않았다.

“무대 위에 오랜만에 서니 정말 찌릿찌릿한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과거처럼 다리를 못써 조금 아쉽긴 했지만 감회가 새롭고 ‘아직 죽지 않았구나’ 했죠.”

장애인식개선 강사부터 교수, 뮤지컬 배우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장애인들 또한 사회 일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따라서 장애가 마냥 불쌍하고 가난한 것이 아니며 그런 인식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들 역시 ‘거지근성’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들 또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양보를 바라서는 안돼요. 예를 들면 누구나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인데 ‘비장애인들은 계단을 이용해. 이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야’라는 식의 태도를 버려야 해요.”

일 벌이기 좋아하는 그는 요즘 장애인강사협회 설립도 준비 중이다. 이를 통해 장애인 강사가 더욱 활성화되면 장애인에 대한 권익을 옹호와 함께 비장애인들의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장애인이 되고 난 후 항상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어요. 먼 훗날 인생의 끝자락쯤에는 장애인 최혜영이 아닌 인간 최혜영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래요. 전 일반인과 다르지 않고, 세상을 변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긍정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어요. 최종 꿈이라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한데 어우러져 살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불의의 사고로 현재 칩거 중인 장애인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애인 뿐 아니라 시련으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두에게 전하는 말이라고 이야기했다.

“사회가 꼭 무섭거나 삭막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도와주시는 분도 많고 홀로 일어설 수도 있으니 먼저 나와서 도전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럼 당신의 인생의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김민주 기자 stella25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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