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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한·일 상호 인식의 덫… 콤플렉스 넘어 미래로

[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박훈 '위험한 일본책'

입력 2023-10-21 07:00 | 신문게재 2023-10-2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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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비판에서 벗어나 ‘비판의 격’ 높이고 건설적인 미래지향적 파트너십 구축해야”

 

‘일본’에 관해 웬만해선 균형 감각을 지키기가 쉽지 쉽다. 시류에 편승한 ‘국뽕’ 서적들이 많은 이유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위험한 일본책>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균형적이다. 저자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경계한다. 일본에 대한 비판도 한 차원 높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이기에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를 바꿔, 이제 미래지향적으로 봐야 할 때라고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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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본책|박훈|어크로스

◇ 시대에 뒤처진 ‘민족주의’


저자는 최근 다시 만연하는 ‘민족주의’에 선을 긋는다. 더 이상 도움 되지 않는 시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예전의 민족주의가 한국인을 단결시키고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면, 지금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만들 뿐이라고 꼬집는다. 특히 과학이나 학문과 다른 쪽으로 오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특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민족주의의 한계로 ‘반일’을 든다. 일본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다소간의 과장이나 왜곡, 은폐와 날조까지도 눈감아 주는 ‘반일무죄(反日無罪)’를 성토한다. 오류를 알면서도 못 본 척 하고, 문제가 생기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빠지는 무책임을 강하게 질타한다.



◇ 비슷한 듯 다른 한국과 일본

저자는 ‘소용돌이 속의 한국, 상자 속의 일본’이라 표현했다. 조선이 역동적이고 신분제 역시 유동적이었던 반면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상자 속에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한국은 문(文)·일본은 무(武)의 나라’라는 평가도 부정한다. 젊은 사무라이들이 학문에서 돌파구를 찾아 정치화되었고,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촉매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은 ‘민란(民亂)’이 없는 나라, 한국은 ‘민심(民心)’의 나라라고 정의한다. 일본은 격동의 19세기에도 난(亂)이라 할 만한 시위가 거의 없었고, 20세기 이후로도 수 십만 명이 모인 시위는 손에 꼽을 정도였던 반면 조선은 ‘여론정치의 나라’ 답게 ‘천심(天心)’인 민심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말한다.

일본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나라다. 스모에서 시작된 ‘방즈케(番付)’가 확산되어 ‘거짓말 방즈케’나 양처(良妻)·악처(惡妻) 순위까지 나올 정도다. 근대 일본이 세계 최강국을 꿈꾸었던 것도 순위 매기기와 무관치 않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는 그런 ‘방즈케의 요술’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 일본에 대한 ‘얕은 지식’과 ‘얕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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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에 수출규제 문제로 불거졌던 한일 갈등은 4년 가까이 지난 올 4월부터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저자는 우리가 일본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일본에 관한 지식은 얕고 편견이 강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이 원래 후진국인데 어쩌다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우리를 앞서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쓰라린 식민지 역사에 대한 보상 심리가 깔린 주장”이라며 “일본은 이미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획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일본은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맡으며 떼 부자가 되었고, 눈부신 농업 발달로 안정적인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특히 메이지 이전부터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교육·출판업이 발달하는 등 어느 정도 준비된 상황에서 서양을 맞았다. 저자는 또 메이지유신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면서, 메이지 시대에 일본을 강하게 만든 힘 중 하나로 ‘국민 통합’을 들었다. 처형 당해 마땅한 적의 장수를 구명해 치안을 맡기며, 반란의 주범을 사면해 요직을 추증하고 동상을 세워 추념했다. 메이지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가쓰 가이슈도 권력욕을 내려놓고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보였다.

 


◇ 두고두고 아쉬운 만민공동회와 의회 설립 무산

저자는 한국인들이 별 근거도 없이 ‘과대평가’와 ‘자기폄하’ 사이를 수시로 오간다고 지적한다. 과대평가의 대표사례로 ‘국민 설화’를 들며 “자칫 ‘국민 마약’이 될 수 있다”고 꼬집는다. 일본과 비슷한 주장이면 ‘친일사학’으로 폄훼하는 문제도 지적한다. 자기폄하의 패배주의와 열등 콤플렉스 같은 열패감에 우리가 더 ‘위대한 역사’에 환호하는 것일 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조선이 ‘자강(自强)’을 못 이룬 것을 통탄하며 “개화파가 수구파 이상으로 분열한 탓이었다”고 비판한다. 구한 말 외교력 부재에도 아쉬움을 토로한다. 1896년 5월 모스크바에서의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 때 청과 일본이 대규모 축하 사절단을 보내 전략적 조약을 체결할 동안, 가장 러시아의 도움이 절실했던 우리는 10명 만을 보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특히 관민 개혁운동 ‘만민공동회’의 붕괴를 못내 아쉬워했다. 대한제국은 당시 니시-로젠 협정으로 일본과 러시아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확인받아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얻었다. 개혁파 정부와 독립협회는 의회 설립법도 공포했다. 하지만 고종이 의회설립을 백지화시키면서 근대화의 마지막 기회는 무산됐다. 그 때 의회가 세워졌다면 을사보호조약도, 한국 병합도 그렇게 간단하게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 ‘무시’와 ‘두려움’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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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간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간 문화교류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사진은 한일문화교류센터가 주최한 한일 지역간 문화교류 행사 모습.

 

저자는 우리가 일본을 너무 일찍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정말로 극일(克日)을 원한다면 계속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을 더 공부하고 식견을 더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근대와 자주’라는 시대정신을 체현한 이승만과 김구, 안중근 등 1870년대 생 젊은 활동가들도 개항 이후 한 동안은 일본이 한국 개화파의 친구였음을 인정했다 “개항 후 한국 근대사의 좌절을 모두 일본 탓으로 돌리는 ‘일본 환원주의’도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한일관계 교착은 ‘해결 방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해결할 의지’가 없어서” 라고 강조한다. 한국 근대사가 모두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음모, 치밀한 기획의 산물이라는 ‘과대평가’를 교정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를 무능력자로 만들 뿐이라고 비판한다. 우리야말로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를 않고도 선진국이 된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고 말한다.

일본은 한국이 늘 자신들 밑에 있어야 한다는 묘한 심리와 함께 근대화 이후 지나치게 자국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이 스스로를 동국(東國), 동번(東藩)이라 부르며 현실적 인식을 했던 반면 일본은 자신이 세계 7대 강국이라며 ‘대국(大國) 일본’의 환상을 놓지 않았다. 그 현실적 공허함을 채워줄 대상이 조선이었기에 조선은 소국이어야 했다. 저자는 일본이 이런 한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더 성숙해져야 하며, 한국 역시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 콤플렉스를 넘어 미래로

일본 국민의 95%가 천황제에 찬성한다. 저자는 최근 국내에서의 ‘일왕’ 논란과 관련해 “적국이 아니라면 그 나라 호칭을 불러주는 것이 성숙한 자세”라고 말한다. “중국까지 황제 부활을 시도하던 때는 우리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왕정을 폐지하고 당당히 공화국을 수립했던 나라”라며 “애초에 이런 시대착오적 역사 감각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일축한다.

일제 잔재 처단의 차원에서 일본식 용어부터 몰아내자는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촉구하는 공문이나 구호에도 온갖 일본산 표현들 투성이었다. 저자는 “이런 말을 쓰면 우리의 민족정신이 훼손되는가”라고 되묻는다. 그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식민 종주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그것을 외교문제로 삼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며 “지금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라’ 보다는 식민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촉구하는 것이 훨씬 좋은 전략일 것이라고 조언한다.

 


◇ 아키히토 상황의 한국방문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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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에 전격적으로 발표된 '김대중·오부치선언'은 한일 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 오부치 게이조 수상이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e영상 역사관 캡처)

저자는 식민지 문제가 국제사회 공감을 끌어내기 쉽지 않은 이슈라고 말한다. 열강들이 대부분 과거 식민지 문제의 공범이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도 간단치 않다고 말한다. A급 전범들 위패를 빼고 국립묘지화할 경우 자칫 우리만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과 중국은 ‘전쟁 행위’만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란다.

저자는 식민 지배를 통렬히 사죄하고 미래 파트너십을 약속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일본에 거듭 상기시킬 것을 강조한다. ‘혐한(嫌韓)’ 타개를 위해 아키히토 상황의 한국 방문도 제안한다. 그는 직계조상인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 후손이라고 발언한 바 있고, 무령왕릉 방문도 희망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 관계는 논리가 증거 싸움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며 정치적으로 대범하게 풀 것을 촉구했다. 그러려면 양국과 세계 이목을 집중시킬 상징적 이벤트가 필요하다. 저자는 “아키히토 상황이 조상을 찾는 것을 계기로 두 나라가 대범하게 현안을 처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비판하되 경쟁적 협력관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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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5주년 기념식에서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회장,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착석해 있다.(연합)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일본 국회에서 “50년도 안된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연설했다. 저자는 “우리는 옛 식민 종주국에게 사과를 받아낸 거의 유일한 나라”라며 이 선언문의 핵심도 ‘자신감’이었다고 강조한다. 당시에도 위안부나 독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죽창가’를 부르지 않았다.

저자는 “김대중 계승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계승하고 있는가”라며 1998년처럼 한국이 다시 자신감을 갖고 한일관계를 리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를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지만, 그 목적은 두 나라가 자유와 민주, 법치와 평화의 세계로 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족주의 선동을 위한, 정치적 이득을 위한 일본 비판은 이제 거둘 때라고 말한다.

조진래 기자 jjr2015@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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