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비바100 > Leisure(여가) >

[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비즈니스 모멘트> EBR 제작진

입력 2021-12-11 09:00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글로벌 기업들은 누구나 지금의 성장을 이루게 한 결정적인 모멘텀 시기가 있다. 이 책은 기업 성장의 그런 결정적인 순간들을 모아 소개한다. 많이 소개된 부분들도 있으나 글로벌 기업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들 기업이 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게 된 결정의 순간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어 기업의 성장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10년 동안 ‘미운오리 새끼’ 삼성 반도체 - 한국에서 반도체 재료의 핵심 재료인 웨이퍼 가공생산을 처음 성공한 기업은 1974년에 설립된 한국반도체였다. 그런데 이 회사가 19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한 석유파동 여파로 공장 준공 2개월 만에 자금난에 부딪혀 부도위기를 맞는다. 이 때 삼성그룹 계열사인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가 사재를 털어 지분 절반을 인수한다. 이것이 삼성전자 부천 반도체공장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이후 10년 동안 ‘미운오리 새끼’였다. 당시로선 반도체 자체가 우리에겐 무리였다. 미국이나 일본과 30년 가까운 기술격차가 있었다. 나머지 지분을 인수해 1978년 ‘삼성반도체’로 이름을 바꾼 후 1982년 통신부분까지 얹어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새로 발족하기 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건희가 주도한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이병철 회장이 직접 나섰다. 1982년 10월 반도체 컴퓨터 사업팀을 꾸려 사업계획을 면밀히 검토한 후 이듬해 1983년에 이른바 ‘2.8 도쿄 구상’을 발표한다. 그리고 3월 15일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천명한다. 

 

* 공격 투자로 ‘글로벌 톱’ 오르다 - 이병철 회장은 곧이어 기흥에 부지를 확보하고 6개월 안에 공장 건설을 완료할 것을 지시한다. 첫 번째 개발제품은 D램 메모리 반도체로 정했다. 기술 제휴 없이 독자적인 개발을 천명하자 모든 전문가들이 코웃음을 쳤지만, 삼성은 반도체 도전 선언 9개월 만에 놀랍게도 64K D램을 개발해 낸다. 세계에서 세 번째였다. 삼성의 모멘트인 1983년을 계기로 정부도 적극적으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선다. 1985년 반도체 산업 종합육성 계획으로 총 연구비 1900억원 중 600억 원이 민간에 지원되어 삼성은 물론 금성 현대 등 후발업체들도 세계 주요 D램 제조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삼성은 공격적인 투자로 승부를 걸었다. 앞서가던 일본을 제치고 8인치 웨이퍼에 승부수를 던져 성공했고, 1996년에는 세계 최초로 1G D램을 개발했다. 2002년에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거머쥐고, 2017년에는 드디어 메모리와 비메모리 모두 합쳐 글로벌 반도체 1위에 올랐다. 메모리 부문의 명실상부한 절대강자로서 삼성은 비메모리 부문인 시스템 반도체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9년에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선언하며 의지를 다졌다.

 

* 잡스 없는 애플 ‘잃어버린 10년’ - 애플은 1976년 4월1일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론 웨인이 만들었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강점을 보인 애플은 1980년 말 기업공개로 충분한 재원을 확보했고, 마케팅의 귀재라던 존 스컬리 펩시콜라 사장을 영입해 도약을 꿈꾼다. 하지만 컴퓨터 공룡 IBM이 1980년대 초부터 PC사업에 뛰어들어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선도하면서 애플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진다. 1984년에 야심차게 선보인 매킨도시는 마우스로 아이콘을 클릭해 실행하는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미국 슈퍼볼 중계 때 조지 오웰의 ‘1984’를 모티브로 만든 공격적인 광고가 먹히면서 대박을 친다. 하지만 매킨도시는 메모리 부족으로 인한 더딘 속도와 내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가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곧 시장에서 외면받기 시작했다. 독선적인 잡스가 내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1985년 5월 잡스는 이사회로부터 보직을 박탈당하고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스컬리의 지휘로 뉴턴 메시지 패드 등 혁신 제품을 선보였으나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치이며, 잡스가 복귀하는 1997년까지 12년 동안 애플은 긴 암흑기를 경험하게 된다.

 

* 1997년 잡스의 복귀, 그리고 전설의 탄생 -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는 넥스트라는 회사를 세운 후 픽사를 인수해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곤 기울어가던 애플을 1996년에 공식 인수하고 애플에 복귀한다. 복귀 초반에는 픽사의 CEO로 애플의 파트타임 고문 역할만 하다가, 관리력이 탁월한 팀 쿡과 디자인의 명인 조너선 아이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애비 터버니언 등과 함께 1998년 아이맥으로 돌풍을 일으키더니 2001년 아이팟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어 2006년 맥북과 맥북 프로,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연이어 내놓으며 대박을 친다. 하지만 2004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잡스는 2011년 CEO직을 사직하고 2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후임자인 팀 쿡은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확고한 팬덤과 높은 브랜드 충성도와 영향력을 기반으로 애플을 시가총액 2조 4000억 달러의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 현대자동차, 포니 신화 그리고 1998년의 굴욕 - 현대자동차는 1972년 포드와의 기술합작 계약 연장이 무산되자 이듬해부터 독자 모델 개발에 뛰어든다. 마침내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대차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가 탄생한다. 이로써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자체 개발 자동차를 보유한 나라가 됐다. 포니는 출시 첫 해에 1만대가 넘게 팔리면서 그 해 시장 점유율이 43.5%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였다. 자신감을 얻은 현대차는 수출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1976년 에콰도르에 포니를 첫 수출을 하게 되고 1985년에는 미국 시장 진출까지 추진한다. 미국시장에서도 기름을 적게 먹는 소형차 붐을 타고 초기에 좋은 반응을 보였으나 1990년대부터 예기치 못했던 차량 결함이 하나 둘 발생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1998년은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에서 꼴찌를 하는 등 현대차에게 최악의 한 해 였다.

 

* 1999년 ‘정몽구의 품질·현장경영’으로 모멘텀을 찾다 - 1999년 현대차 경영을 맡은 정몽구 회장은 ‘품질’에 최우선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그의 ‘품질경영’은 오랜 현장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품질과 현장을 중시하는 그의 경영 방식은 현대차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현장도 모르고, 제품도 모르는 임원은 가치없이 퇴출시켰다. 1999년에는 기아차 인수까지 마무리하면서  ‘퀀텀 점프’도 이뤄냈다. 2010년에는 전 세계에서 574만대를 팔아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자동차 톱 5에 올랐다. 정 회장은 확실한 품질이 확보되지 않으면 제품 개발과 생산을 더 이상 진행 않는 ‘품질패스제’를 밀어 부쳤다. 1차 협력사의 상위 10%에겐   ‘5스타 제도’ 인증을 부여해 부품 불량률도 잡고 협력사 품질 경영까지 확보했다. 미국에서는 ‘10년 10만 마일 무상보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한 때 현대차에 수모를 안겼던 J.D.파워는 2003년 품질조사에서 쏘나타를 중형차 1위에 선정했다.

 

* ‘운명을 건 도박’ 보잉의 1952년 상업 항공기 도전 -  수상 비행기를 만들던 보잉은 2차 세계대전 때 본격적으로 군용기를 생산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끝나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전쟁 중에 미국 정부가 발주했던 B-29 5000대, 15억 달러의 주문이 모두 취소된 것이다. 이런 위기에 CEO로 등장한 것이 맥퍼슨 앨런이었다. 그는 군용 전투기 생산에서 벗어나 상업용 항공기 시장 진출을 추진한다. 특히 상업용 제트기로 승부를 걸려 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의 모든 남은 자금을 시제품 생산에 투입했다. 이 때가 1952년이었다. 언론에선 ‘하늘에서의 도박’이라고 비판했다. 베일을 벗은 보잉 707은 경쟁사인 더글러스에 비해 2배가 넘는 고가 탓에 처음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1955년 이른바 ‘배럴 롤’이라는 곡예 비행을 시연해 보임으로써 전세는 단번에 역전됐다. 보잉은 터보 엔진을 정착해 기내 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최대 시속 900km까지 속도를 높였다. 객실 규모도 180석으로 늘려 원가를 줄이면서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기내 식사가 가능해 만족도도 높아졌다. 1954년 타임지는 빌 앨런을 표지모델로 세우면서 ‘그는 도박 할 때를 알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포춘도 2003년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최고경영자’ 열 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 도요타의 1966년 모멘텀 ‘코롤라’ -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차량 생산을 제한받았다. 그러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 덕분에 특수를 구가하며 활로를 찾게 된다. 도요타도 이 때 1955년 일본 독자 기술로 완성한 승용차 ‘크라운’을 선보이며 엄청난 성공신화를 써 가게 된다. 하지만 야심차게 추진했던 미국 수출에서 큰 실패를 맛보게 된다. 오르막길에서 엔진이 멈추는 등 엔진의 힘과 성능이 문제였다. 절치부심 끝에 1966년에 선보인 ‘코롤라’가 도요타의 모멘텀이었다. 현대적 감각과 뛰어난 배기량, 스포티한 디자인은 내수는 물론 수출 시장에서 ‘도요타’라는 이름을 널리 알렸다. 미국에서도 이번에는 ‘연비도 좋고 가격도 좋은 차’라는 호평을 받았다. 1975년에는 폭스바겐을 제치고 미국 시장 판매량 1위 승용차 회사가 된다. 1997년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가 코롤라였다. 공장장 출신의 오노 다이이치가 설계한 ‘도요타 생산방식’은 적시 생산(Just In Time) 시스템 등으로 대표되는데, 1973년 오일 쇼크와 1990년 경제 불황을 거치면서 더욱 진가를 드러냈다.

 

* ‘상업용 드론 절대강자’  DJI의 2013년 ‘팬텀’ - 중국의 DJI는 상업용 드론의 표준을 만든 기업이다. 전 세계 상업용 드론 시장의 76%를 점유한 절대강자다. 1980년생인 젊은 창업자 프랭크왕은 ‘드론 분야의 잡스’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자신을 알아본 홍콩과학기술대학 로봇공학과의 지도교수 리쩌상에게서 창업자금 200만 위안(약 3600만원)을 지원받아 창업을 실현했다. 처음에는 비행 제어 시스템을 제작해 팔다가 콜린 귄이라는 사업자의 제안으로, 흔들림없는 항공 영상 촬영을 목표로 완제품 드론에 도전하게 된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왕의 기술경영 덕에 DJI는 2013년 1월에 드론과 카메라가 결합된 ‘팬텀’이라는 브랜드를 선보이며 히트를 친다. DJI의 최대 장점은 제조를 아웃소싱 않고 훌륭하게 자체 해결함으로써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다는 데 있다. 이제 드론을 만들려면 DJI의 특허기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DJI는 왕의 완벽함으로 얻은 기술력 덕분에 드론 기술의 글로벌 표준이 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업계 2위가 인텔인데, 점유율이 4%에 불과하다.

 

* 다이슨의 모멘트 1986년 진공청소기 - 다이슨의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은 발명이 주특기다. 그가 사이클론 기술을 적용한 세계 최초의 ‘먼지봉투 없는 사이클론 진공청소기’를 발명한 것이 1986년이다. 제재소에서 공기 회전을 이용해 공기와 톳밥을 분리하는 기술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천재 발명가 이전에 엄청난 노력가였다. 5년 동안 좁은 마구간 연구소에서 5126번의 실패를 딛고 마침내 5127번째 시제품을 성공시켰다. 초기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일본의 에이팩스라는 기업의 도움으로 G포스라는 진공청소기를 1986년에 선보였는데, 대당 약 175만원의 고가 임에도 일본 부유층 가정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덕분에 1993년 영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다이슨’을 창업하게 된다. 그의 경영철학은 ‘기술에 대한 신념’과 ‘시행착오를 통한 개선’이다. 2012년 CEO 자리에서 물러나 수석 엔지니어로 지금도 신제품 개발에 전념 중이다. 에너지 전장과 전열기술, 로봇공학, 머신 러닝, 디지털 모터 등의 생산 및 연구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50년 가깝게 발명을 이어오면서 그는 “실수에서 성공이 나온다”는 확고한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전기차 프로젝트는 포기했지만 전기차 제조과정에서 확보한 배터리 기술을 다른 분야에 활용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어 그의 새로운 발명품이 무엇이 될 지 주목된다.

 

* LG생활건강과 2005년 ‘차석용 모멘트’ - 2005년부터 2021년까지 16년 연속 성장신화를 쓰고 있는 기업이다. 2001년 모기업인 LG화학에서 분사한 직후엔 소비 양극화 트랜드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해 고전했다. 주력인 화장품은 저가 브랜드의 선풍적인 로드숍 인기와 백화점 위주의 럭셔리 브랜드 사이에 끼어 경쟁에서 밀렸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음료시장에 뛰어들었다가 이마저도 실패해 음료부분을 아예 CJ에 매각했다. 이 때 구본무 회장은 P&G 한국총괄 사장 출신의 차석용을 구원투수로 전격 영입한다. 법정관리 해태제과를 CEO 취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경영수완을 눈 여겨 본 것이다. 차석용은 취임과 동시에 ‘세발 자전거론’을 내세우며, 기존의 화장품과 생활용품 외에 음료를 새 사업으로 추가했다. 더운 여름 화장품 매출 부진을 타개하겠다며, 음료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만에 코카콜라 인수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안팎의 반대에도 2007년 한국코카콜라를 3853억원에 인수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19년 매출이 1조 2600억원, 영업이익이 1400억원에 달했다.

 

* 차석용의 큰 그림과 M&A 원칙 - 차 부회장은 적극적인 M&A에 나서 다이아몬드생수, 더페이스샵코리아를 잇달아 인수한다. 2013년에는 에버라이프, 2019년에는 뉴 에이븐을 인수해 일본과 미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도 마련했다. 그는 M&A를 추진한 뒤 매번 단기에 적자에서 벗어나게 하는 신통력을 발휘했다.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원칙은 ‘조직 통합의 효율과 속도’다. 인수팀은 해당 회사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찾아 조직을 재정비한 후 사업 정상화에 필요한 핵심과제를 3개월 내에 80%까지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움직였다. 그의 보다 근본적인 원칙은 ‘큰 그림을 먼저 그리고 퍼즐을 맞추듯 꼭 필요한 분야의 회사를 인수한다’는 것이다. 고가와 중가 화장품 중심이던 사업구조를 저가인 더페이스샵 인수로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확보한 것이 대표적이다. 넘사벽이라던 아모레의 고가 브랜드 ‘설화수’를 제치고 ‘후’브랜드로 중국시장 판매 1위에 오른 것도 그렇다. 사드 사태가 터졌을 때도, 중국 부자들이 개별 관광으로 ‘후’를 사러 온다는 사실을 꿰뚫고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짠 것이 주효했다. 현재 차 부회장은 국내에서 업계 최장수 CEO 기록을 갖고 있다.

 

* ‘뭘 만들지 자신들도 모르는 기업’ 3M - 1902년 광산업으로 처음 시작한 3M의 120년 역사는 ‘혁신’의 역사다. 리튬이온 전지, 치아 충전재, 태양광 패널, 주택 단열재 등 6만 가지 제품과 11만개가 넘는 기술 특허를 보유했다. 샌드 페이퍼(사포) 제조를 계기로 광산업을 접은 이후 세계 최고의 접착 기술 보유기업으로 우뚝 섰다. 3M은 특히 하나의 원천기술을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해 혁신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업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모든 사업부서와 세계 각지의 연구소가 원천기술을 공유하는 덕분이다. 그래서 3M의 특허 중 80% 이상이 두 명 이상의 공동 발명가로 등록되어 있다. 1930년대부터 1966년까지 사장~회장을 역임한 윌리엄 맥나이트는 “인재를 고용해서 그냥 가만히 놔두라”고 했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실패가 용인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온다”는 지론이었다. 이런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자율적으로 뭔가 만들어내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에 우연히 개발된 ‘포스트잇’은 3M의 혁신과 창의성을 대중에 각인시킨 대표 상품이다. 실패를 새 혁신 상품으로 바꾼 포스트잇은 보급 6년만에 연간 매출 1억 달러를 넘어 3M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신제품이 되었다. AP는 20세기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최선을 다한 실패자에게도 용기를 북돋아주고,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매년 매출의 6%는 연구개발비로 투자하는 기업이다. 3M조차도 자신들이 다음에 무엇을 개발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3M의 최대 매력이다.

 

* 넷플릭스, 2007년 스트리밍을 선택하다 - 넷플릭스는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기업이다. 블록버스터의 벽을 넘지 못해 2000년 초에 5000만 달러에 매각하려다 실패하기도 했으나, 이후 자체 성장 모델을 개발해 온라인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추진해 성공했다. 특히 2007년에 주력 서비스를 DVD 대여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바꾸면서 모멘텀을 맞게 된다. 당시 등장한 유튜브는 온라인 콘텐츠 소비방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고 넷플릭스는 유튜브의 인기를 보면서 자신도 다운로드 방식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서비스 방식을 전환함으로써 양적 질적 도약을 이뤄내게 된다. 반면에 온라인 인프라를 따라가지 못한 블록버스터는 2010년 파산을 선언하고 만다. 넷플릭스는 인터넷선만 있으면 어디서든 스트리밍으로 영화와 TV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2013년에는 최초로 제작한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의 대성공으로 헐리우드와 견줄 콘텐츠 제작사로 거듭나게 된다. 양질의 오리지널 콘텐츠, 정교한 추천 알고리즘, 단일 플랫폼을 통한 서비스 제공과 편리한 접근성 등은 넷플릭스의 확실한 차별화 요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그 수혜도 톡톡히 입고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 CEO는 “넷플릭스의 경쟁자는 수면시간 뿐”이라며 큰 소리 친다.

 

* 레고 “장난감을 넘어 문화를 만든다” - 나무토막 장난감을 만들던 덴마크의 작은 기업 레고는 이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어린이 장난감을 만드는 기업’이다. 레고가 본격적으로 블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 이후였다. 창업자인 올레 키리크 크리스티안센의 셋째 아들인 고트프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 2대 회장에 올라 1958년에 원통 결합 형태의 블록을 개발해 내면서 레고 블록의 기본형을 탄생시켰다. 레고에는 ‘십계명’이 있다. 무한한 놀이의 가능성, 여아 남아 모두를 위하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기 위한 레고 등을 표방한다. 특히 품질에 관한 규칙이 엄격하다. ‘최고만이 최선’이라는 창업자의 말은 레고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덕분에 레고의 불량률은 100만 개 중 18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기도 있었다. 1980년대말 특허권이 만료되면서 후발업체들이 절반 가격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PC가 보급되면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외부 경영전문가를 영입해 아동복 시계 게임 등 사업다각화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레고는 2004년 마지막 승부수로 당시 36세에 불과한 크누스토르프를 CEO로 앉히고, 오너 일가는 모두 경영에 관여치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새 CEO는 ‘다시 기본으로’를 외치며 블록 사업으로 되돌아갔다. 대신 연령층을 다양화하는 전략을 더해 ’아키텍처‘ 시리즈로 활로를 찾았다. 2005년에 레고는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이후 10% 안팎의 안정적인 매출 증가세를 보였다. 

 

* 나이키를 다시 일으켜 세운 1985년 조던과의 만남 - 육상 선수 출신의 필 나이트와 코치 출신 빌 바우어만이 만든 나이키는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브랜드 이름을 따왔다. 단돈 35달러에 만든 ‘스우시(Swoosh, 휙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는 듯)는 현재 100조원의 가치를 자랑한다. 나이키는 1970년대 조깅 바람을 타고 단번에 글로벌 1위 기업에 등극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선 여성 레저 스포츠의 트랜드를 정확히 꿰뚫고 ‘피트니스 웨어’ 열풍을 일으킨 리복의 파상공제에 당할 도리가 없었다. 고전을 거듭하던 나이키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이 시카고 볼스 소속의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었다. 그와 손을 잡으면서 나이키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1985년에 선보인 ’에어조던‘ 시리즈 첫 제품 ’에너조던 1‘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2003년 시즌을 끝으로 조던이 은퇴했음에도 2021년에 에어조던23까지 출시될 정도로 조던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나이키의 슬로건 ’Just Do It(한번 해봐)’ 역시 나이키가 1988년 이후 시장 1위를 재탈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브랜드에 스토리를 입히는 전략, 타이거 우즈 같은 유망주들을 미리 점찍어 성공신화를 만드는 선견지명, 그리고 애플과 함께 IT 기술이 접목된 나이키 플러스 운동화를 만드는 것과 같은 열린 협업의 정신이 나이키를 세계 1위로 가능케 한 비결로 꼽힌다.

 

* 자이언트 ‘카본 섬유 자전거’로 세계 1위 거머쥐다 - 자이언트는 50개 국가에 1만 2000여개 매장을 보유하고 연간 2조 2000억원을 올리는 대만의 글로벌 자전거 브랜드다. 유럽과 미국 지역 OEM 업체로 출발해 1981년부터 자체 브랜드인 자이언트를 앞세워 독자 성장을 시작했다. 때 마침 정부도 적극적으로 자전거 산업의 육성을 도와, 지방정부들은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는 등 각종 인프라 구축에 도움을 주었다. 자이언트가 세계 톱 브랜드가 된 것은 머리카락보다 얇고 가벼운 카본, 즉 탄소섬유 덕분이다. 4년 여의 대규모 투자와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초경량 소재인 탄소섬유로 자전거 프레임을 상용화 및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첫 제품으로 미국에 수출한 1000대가 문제를 일으키자, 큰 구덩이를 파 모조리 던져 묻어버리는 결연함을 보이는 등 품질 개선 의지가 남달랐다. 기존의 수평 탑튜브 대신, 무게 중심을 엉덩이 쪽으로 낮춘 슬로핑 탑튜브를 세계 최초로 선보여 글로벌 표준으로 만든 것도 자이언트다. 2015년에는 대만 정부와 함께 공유 자전거 전용모델 ‘유바이크’를 전역에 무료 배포함으로써 “최고급 국민차”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전 세계 자전거 프레임의 61%를 대만이 만들고, 자이언트가 그 90%를 담당한다. 전 세계 자전거의 절반은 자이언트가 원산지인 셈이다. 자이언트를 글로벌 기업으로 이끈 킹 리우 회장과 토니 로 CEO는 2016년에 나란히 은퇴를 선언하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