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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영의정만 여섯번 80세 재상의 초가살이에 王도 탄복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③광명

입력 2021-07-20 07:00 | 신문게재 2021-07-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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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감당
인조가 후대들에게 이원익을 보고 배우라며 특별 하사한 ‘관감당’ 전경. 사진=남민

 

◇ 군자불기(君子不器)

 

子曰(자왈), 君子不器(군자불기). 공자께서 “군자(리더)란 한 가지 일만 할 줄 아는 단순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기(器)’는 용도가 단순한 그릇으로, 사람에 비유하면 ‘한 가지밖에 할 줄 몰라 편협되고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 된다. 공자는 군자의 덕목으로 다재다능과 문무겸비를 꼽았다.

 

 

◇ 이원익의 ‘군자불기(君子不器)’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은 공자의 가르침 ‘군자불기’의 표상인 인물이다. 행정·외교·국방·경제·예술 등 다방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벼슬길 5년 차인 27세의 이원익은 선조 때 성절사(聖節使) 권덕여의 질정관(質正官) 자격으로 명나라로 향했다. 벼슬이 낮은데다 초년생이라 역관들조차 그를 업신여겼다. 당시 역관들은 제 할일은 뒷전이고, 상행위로 잇속 챙기기에 바빠 일이 진전이 더뎠다. 이때 햇병아리 외교관 이원익이 명나라 예부상서를 직접 만나, 누구도 예상 못했던 유창한 중국어로 압도한다.

첫 벼슬이던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에서 부정자, 정자를 거치며 통과 의례로 배우는 중국어를 악착같이 터득한 덕이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것과 매번 남의 머리를 빌려야 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는 생각에서였다. 예부상서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잘 알았습니다”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원익의 중국어 실력은 나라를 구하는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평안 감사 겸 도순찰사로 일할 때 명나라 장수들과 통역 없이 직접 소통했다. 특히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에게 평양성 지도를 건네며 작전을 수립하면서 말이 잘 통하니 평양성 탈환에 큰 도움이 됐다. 이 무렵 이원익은 명나라 군에게 염초(화약) 제조법을 배워 화약무기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도 했다. “역관이 할 일”이라고 제쳐두고 경학에만 매달렸다면 국난 극복에 이렇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원익은 행정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다방면으로 능통했다. 예술에도 능해 칩거 시에는 집에서 거문고를 타며 국정을 구상하곤 했다. 그의 집에도 거문고를 타던 탄금암(彈琴巖)이 남아있다. 150년 후 정조는 “내가 이 사람을 재상으로 쓸 수 없어 아쉽다”라고 토로했다.


◇ 백성만을 바라본 위민 행정가

 

관감당 탄금암
이원익이 거문고를 타던 관감당 탄금암 터. 사진=남민

 

이원익은 23세에 첫 벼슬길에 올라 88세까지 장수하며 60년 공직생활을 했다. 그 동안 무려 40년을 재상(宰相)으로 지냈다.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6차례나 영의정에 부름을 받는 전무후무한 이력을 남겼다. 그만큼 시대가 그를 필요로 했다. 마지막 영의정은 1625년 8월이었다. 그해 2월 21일 3년 간의 영의정 자리에서 하직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46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원익의 활약은 눈부셨다. 평양성 탈환은 물론 권율 장군을 제치고 4도 평안·충청·호남·영남 도체찰사가 되었고 심지어 우의정을 겸하기도 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전략을 공유하고 그의 요청으로 병사들에게 소를 잡아 회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에 한산도에 ‘정승봉(政丞峰)’이라는 봉우리가 탄생했다. 이순신이 사형으로 내몰릴 때는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이원익이 생각한 국가 경영의 핵심은 ‘백성의 생활 안정’이다. 41세이던 1587년 평안도 안주(安州) 목사로 임명됐을 때 그는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의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고는 평안 감사에게 조곡 1만석을 긴급 요청해 백성부터 살렸다. 급한 불을 끈 다음, 뽕나무를 심고 양잠업을 일으켜 주민 생활안정을 도모했다. 당시 백성들은 뽕나무밭을 ‘이공상(李公桑) 즉, ‘이원익 공의 뽕나무밭’이라 불렀다.

훗날 평안 감사 시절에는 주민들이 평양에 이원익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를 기렸다. 보통 죽은 후 추모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사당인데, 그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대동법은 백성을 향한 이원익의 결정판이다. 1608년 광해군 즉위 즉시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했다. 많은 백성은 환호했지만 기득권의 반대에 폐지됐다가 인조 때 조익(趙翼)과 효종 때 김육(金堉)으로 하여금 다시 명맥을 잇게 된다.


◇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시대의 재상’

 

관감당 영우당
관감당 영우당. 사진=남민

 

이원익은 1547년 지금의 서울 동숭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태종의 12남 익녕군 이치의 4세손이다. 부인은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7세손이다. 영의정 동고 이준경(李浚慶)은 물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본받았다.

선조 때 두 번에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첫 영의정으로 발탁됐고 이후 한 번 더 기용됐다. 특히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즉위하면서 ‘광해군의 영의정’인 이원익을 또 첫 영의정으로 앉혔다. 오늘날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인사였다. 인조 등극 후 죽음을 맞게 된 광해군을 구한 사람도 이원익이다. 제 목숨을 내놓지 않고선 감히 나설 수 없는 용기이자 소신이었다.

이원익은 인조에게 눈물로 호소함으로써, 광해군에 의해 혈육이 몰살당하고 자신도 10년간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의 처절한 복수심을 굽히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목숨을 건져 강화도로 유배 갔다. 중요한 점은 그가 자리를 지키려 정권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사람의 목숨을 쉽게 처단하는 것을 그는 일평생 반대해 왔다.

그의 나이 79세에 인조가 또 한번 영의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가 노쇠해 차마 걷지를 못한다며 사양하자, 왕은 가마까지 내려 모시고 오게 했다. 그렇게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그는 비바람도 막을 수 없는 금천(衿川, 지금의 광명시와 서울 금천구 일원)의 두세 칸 초가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듣고 인조는 집을 지어주고 옷을 내렸다. 죽어서도 만세에 잊히지 않을 청백리의 표상이다.

옛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고,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으나 차마 속이지 못하겠다.”


◇ 인조가 하사한 관감당… “이원익을 보고 느껴라”

 

관감당 오리종택
관감당 오리종택. 사진=남민

 

이원익은 선조 때 임진왜란 호성공신 2등급에 녹훈됐다. 하지만 사패(賜牌)를 받지 않았기에 전답이나 노비도 없이 지냈다. 광명에는 1627년 1월 인조가 그런 청백리 재상의 노후 생활이 너무나 안쓰럽다며 그에게 특별히 하사한 집이 있다.

인조는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 초옥에 살며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이야말로 옛날에 없던 일이다. 맑고 검소한 삶의 자세를 여러 관료들이 본받는다면 백성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며 ‘관감당(觀感堂)’이라고 이름까지 내려 주었다. 그의 충정을 모두가 ‘보고 느끼라’는 뜻이었다.

이때도 이원익은 백성들의 노고가 심하다며 극구 사양했지만 왕은 오히려 백성이 기뻐할 것이라며 지어줬다. 우리가 꼭 만나보고 싶은 정승이다.

관감당은 그의 일생을 함축한 공간이 됐지만, 아쉽게도 그가 사망하고 2년 뒤 병자호란 때 소실됐다. 오래 방치돼 오다 1916년에 다시 지었다. 비가 새는 두 칸 초가가 있었던 그곳, 지금의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충현박물관, 좌측에 이원익 종택이 나란히 있다. 종택 왼쪽에 관감당이 있다.

 

관감당 충현서원 터
충현서원 터. 사진=남민

 

한양 출신인 오리 선생이 이곳 금천으로 내려온 것은 부모의 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후 3년이 지난 1630년 그는 84세의 나이로 부모의 묘소 아래에 초가를 짓고 홀로 살았다. 그리고 4년 후, 병자호란이 닥치기 2년 전 그는 88세의 인생 역정을 마무리했다.

뜰의 넙적바위가 탄금암이다. 그 옆에는 오리 선생이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수령 400년이 넘은 측백 고목이 이 집의 내력을 말해준다. 관감당 뒤편의 사당 오리영우(梧里影宇)에는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작자 미상의 이 영정은 1580년에 평양의 백성들이 제작해 그곳 생사당에 모셨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른손에 홀(笏)을 들고 있는 모습이 선비의 기상을 품긴다.

사당은 숙종이 1693년 짓고 현판을 내렸다. 17세기 후반 사당의 건축 양식이다. 오리영우가 있어 이 마을이 영당(影堂) 마을로도 불려왔다. 효종 9년(1658년)에 지은 ‘충현서원’은 철거됐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오리영우 뒤편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다. 둘 다 표석만 남기고 사라졌다가 1993년에 복원했다. 이 중 삼상대(三相臺)의 ‘삼상’이란 우의정·좌의정·영의정 삼정승(三政丞)을 의미하고 왼쪽의 풍욕대(風浴臺)는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논어>의 구절에서 온 말이다.

충현박물관에서 보이는 앞산에 이원익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전주 이씨 묘역에 함께 있다. 정경부인 연일 정씨와 쌍분으로 조성됐다. 묘역 아래쪽에 있는 신도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다투는 모습이 생동감 넘친다. 묘역 아래 대로변에는 2001년에 건립한 오리서원이 있다. 생애와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자 선생을 사표로 삼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인성 교육 시설이다.

 

 

◇ 광명에 가볼 만한 또 다른 곳들

 

광명동굴
고품격 문화관광 지원으로 탈바꿈한 광명동굴. 사진=남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보필하며 평생 생사를 함께한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 있다. 이름의 한자가 다르다. 양녕대군 후손의 왕족인 무의공은 충무공 휘하로 옥포해전 등 숱한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는 전사한 충무공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했다. 그의 묘가 KTX 광명역 근처, 광명시 일직동 서독산 동쪽 기슭에 있다. 망주석 하나가 파손되었고 묘소 진입로가 비좁아 다소 방치된 듯해 아쉽다.

 

폐광산에서 고품격 문화관광 자원으로 탈바꿈한 광명동굴은 광명의 대표적 여행지다. 1912년부터 약 60년간 금·은·동·아연 광산으로 이름 날렸고, 1970년대에는 소래포구의 새우젓을 숙성시키던 공간이 되었다가 2011년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동굴로 변모해 역사 문화 여행지로 손꼽힌다.

 

안터생태공원
도심 속 자연 생태계 체험장인 안터생태공원. 사진=남민

 

안터생태공원은 도심 속 자연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고구려 주몽 설화에도 등장하는 행운과 복의 상징, 멸종위기 금개구리가 사는 안식처로 소중한 습지다. 

 

광명스피돔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자전거 문화 메카다. UFO를 연상시키는 건물 안에서는 경기 관람은 물론 자전거·롤러 등 각종 체험도 할 수 있다. 

 

인조 독살의 모함을 받고 죽은 광명 출신 비운의 여성 신지식인 민회빈 강씨(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빈)의 무덤이 능원영회원이다. 낚시터로 유명한 노온사지라는 작은 저수지를 끼고 비포장도로 숲길로 들어간 곳에 있다. 이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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