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비바100 > Leisure(여가) > 방송·연예

[비바100] 서른 살 생일 맞은 문화대통령 서태지, 시대를 앞서간 K팝 마케터·영리치·파이어족

[Hot People] 데뷔 30주년 맞은 서태지

입력 2022-03-14 18:00 | 신문게재 2022-03-15 11면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22031411
‘문화대통령’ 가수 서태지(본명 정현철·50)가 이달 23일 데뷔 30주년을 맞는다. 1992년 3월 23일, 1집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한 그는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번갈아 갈아치우며 K팝 시대의 막을 연 장본인이다. 음악적으로 랩과 댄스음악을 처음으로 흥행시켜 K팝의 방향성을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선회했고 대중음악계 사전심의제를 폐지시키며 제도의 혁명을 이뤘다. 뿐만 아니다. 음반 발매 전후 활동과 관련된 K팝 마케팅 시스템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 처음으로 뿌리내렸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단 4년간 활동하며 일군 부로 ‘영리치’가 된 그는 1996년 20대의 나이에 은퇴한 조기 ‘파이어족’의 원형이기도 하다. 


◇K팝 마케팅 초석 닦은 문화대통령 

2022031501010005735
가수 서태지.(사진제공=서태지컴퍼니)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한국 가요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됐고 이후 H.O.T, 빅뱅, BTS로 이어지며 K팝의 기틀을 닦았다. 한국어는 랩에 적합하지 않다는 통념을 깬 1집 ‘난 알아요’, 메탈과 힙합, 국악을 접목한 2집 ‘하여가’, 얼터너티브 록 버전의 3집 ‘발해를 꿈꾸며’ 그리고 갱스터록을 접목한 4집 ‘컴백홈’까지, 짧은 활동기간 통념을 벗어난 음악을 선보이며 10대 청소년들을 신세계로 이끌었다. 

특히 가사가 주는 메시지에 주력했다. 3집 수록곡 ‘발해를 꿈꾸며’는 통일 한국에 대한 바람을 꿈꾼 곡으로 남북정상회담 환송식에서 울려 펴졌고 교과서에도 수록됐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교실이데아’는 주입식 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4집 수록곡 ‘컴백홈’은 가출청소년들에게 귀가를 권하는 곡으로 실제 이 곡을 듣고 귀가한 청소년들이 생길 만큼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4집 수록곡 ‘시대유감’으로 촉발된 음반사전심의제 철폐 사건은 서태지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당시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사전심의에서 ‘시대유감’의 사전비판적 가사를 문제삼자 서태지는 이에 반발해 가사를 삭제한 채 연주곡으로 음반에 실어버렸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 팬들을 중심으로 사전심의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결국 1996년 음반 사전심의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808041634531_P
사진제공=MBC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방식은 지금 K팝 마케팅의 시스템을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단시간 활동 뒤 재충전 기간 동안 앨범 작업 시간을 갖는 방식은 1년 365일 TV에 얼굴을 비추는 게 관례였던 당시 가요계에서는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받아 신비주의 성향이 강했고 무대 위 가수가 아닌 사인(私人) ‘정현철’로서는 시선을 받기를 원치 않아했다. 이런 신비주의 성향은 훗날 배우 이지아와 세기의 결혼 및 이혼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초창기 매니저였던 최진열씨는 “서태지는 앨범 홍보 포인트를 미리 잡고 스타일리스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가수였다”며 “당시 앨범 제작을 마치면 매니저들에게 음악 방향성을 설명해 홍보 포인트를 설정했다. 또 각 가수별 개별 스타일리스트를 도입한 최초의 가수”라고 말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활동 당시 오디션을 거쳐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고경민 현 아메바컬쳐 대표는 “앨범 제작 뒤 뮤직비디오 촬영, 방송 홍보, 언론 인터뷰 등 모든 마케팅 플랜이 서태지의 머리에서 나왔다. 가수가 아닌 마케터로서도 최고였다”고 돌아봤다. 


◇20대 파이어족…4년간 활동 뒤 은퇴해 제2의 삶

200412619817서태지-1
사진제공=MBC

 

서태지와 아이들은 4년 동안 단 4장의 앨범을 발표한 뒤 20대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 역시 서태지의 ‘계획’에서 비롯됐다. 서태지 4집 활동 당시 매니저로 일했고 이후 YG(이하 YG)에서 실무를 맡았던 이상철 현 인넥스트렌드 대표는 “당대 최고의 주가를 올렸지만 그만큼 심신이 지치기도 했다”며 “당초 2집까지만 활동할 계획으로 알고 있었다. 2집 수록곡 ‘우리들만의 추억’이 팬들과 이별을 암시하는 곡이었는데 ‘이대로 그만두기엔 아깝다’는 양현석의 설득으로 활동계획이 4집까지 이어졌다”고 전했다. 

결국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6년 1월 31일 은퇴 기자회견을 발표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뒤 귀국해 각자의 길을 걸었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제작자로, 서태지는 1998년 솔로 가수로 복귀했다. 세 사람 모두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서태지는 인디레이블 ‘괴수인디진’을 설립해 록밴드 피아와 넬을 발굴했고 양현석은 YG를 설립해 빅뱅, 투애니원, 블랙핑크 등을 키워내며 K팝 대표 기획사로 성장시켰다. 이주노 역시 영턱스 클럽 등을 제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단 4년 활동한 뒤 은퇴하고 당시 수익을 시드머니 삼아 솔로가수로, 제작자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최근 젊은이들이 꿈꾸는 ‘영리치’ ‘파이어족’을 이미 20세기에 이룬 셈이다. 서태지의 재산으로는 저작권과 논현동 서태지 컴퍼니 사옥, 서울 압구정동 건물 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태지의 사람들이 말하는 서태지 

 

서태지
가수 서태지 (사진제공=서태지컴퍼니)

 

최진열 대표 “K팝은 서태지와 이수만(SM 대표프로듀서)이 있기에 가능했다. 고교 중퇴 학력이지만 공부를 많이 했고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였다. 고교생 신분으로 시나위 합류할 정도로 출중한 베이스 실력을 갖춘 준비된 아티스트였다.”

이상철 인넥스트트렌드 대표 (서태지 4집 매니저) “프로페셔널의 끝판왕이다. 1995년 12월 24일, 과천 서울랜드에서 SBS 라디오 공개방송이 잡혔다. 하필 서태지가 심한 감기몸살을 앓아 도저히 무대에 설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팬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에 몸을 일으켰다. 4집 앨범 ‘필승’으로 활동하던 시기라 기타를 쳐야 했는데 매니저인 내가 깜박 잊고 기타 줄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자 서태지 자신이 벤의 안전벨트 줄을 잘라 기타줄로 대체했다. 매니저인 내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무대를 위해 임기응변을 발휘한 에피소드다.”

고경민 아메바컬쳐 대표 (서태지 4집 스타일리스트 담당) “스타일리스트의 정의를 처음으로 내렸고 조직화된 팬덤 문화 및 K팝 마케팅의 시스템을 일군 사람이다. 오디션을 통해 스타일리스트를 채용했는데 당시 내가 준비했던 ‘스노보드’ 패션을 마음에 들어했다. 멤버별로 따로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했고 각 멤버별 PPL을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고재형 전 MBC PD(서태지 1집 ‘난 알아요’ 뮤직비디오 촬영)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조연출로 일할 때 데뷔 전 서태지와 아이들을 만났다. 처음 음악을 들었을 때 문화충격을 받았다. 이후 ‘난 알아요’ 뮤직비디오를 찍은 게 인연이 돼 ‘발해를 꿈꾸며’까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일했다. 서태지는 많은 사람들과 두루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여긴다.”

김민석 스포트라이트 대표 및 안성환 현 서태지 컴퍼니 대표 “합리적인 CEO다. 평소 이메일로 소통하지만 이해될 때까지 꼼꼼히 챙긴다. 결정을 내릴 때는 직원들의 의견을 두루 경청한다. 좋아하는 음식은 맥심 커피. 여전히 팬들에게 선물을 많이 받는다. 동안의 비결은 타고난 것 같다.”

이진영 뉴오더 대표 (서태지 9집 ‘콰이어트 나이트’ 홍보담당) “시대를 앞서가는 크리에이터, 트렌드에 민감하다. 9집 타이틀곡 ‘소격동’ 콜라보레이션 파트너로 아이유를 추천한 것도 서태지 자신이다. 트렌드를 파악하는 깊이 있는 사고에 놀랐다. ”

밴드 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생각했던 대로 엄청 프로페셔널 한 사람, 넬로서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처음으로 우리 음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사람. 시간이 지나도 늘 고마운 사람이다.”

밴드 피아 “음악밖에 몰랐던 순진한 다섯 청년에게 꿈과 열정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은인이자 대중음악의 망망대해를 자신만의 나침반으로 거침없이 가로질러 신대륙을 개척한 위대한 선장이다.”

조은별 기자 mulgae@viva100.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