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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잘 걷는 게 무슨 죄라고… 경보까지 하게 된 '걷기왕' 소녀, 현실은?

[#OTT] 당시 '최연소 흥행퀸'이라 불린 심은경의 첫 독립영화 도전작, '걷기왕'
'노오력' 강요하는 사회, 만화같은 화면에 묵직한 연출 더해

입력 2024-02-14 18:30 | 신문게재 2024-02-1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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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 CGV아트하우스의 배급망을 탔던 ‘걷기왕’은 웨이브와 왓챠에서 볼 수 있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영화의 내용대로라면 제목은 ‘경보왕’이 돼야 한다. 하지만 지난 2016년 개봉한 이 작품은 주인공의 멀미 때문에 ‘걷기왕’이 됐다. 집에서 키우는 자식(?)같은 소를 비롯해 모든 이동수단을 타면 심한 멀미를 하는 만복(심은경)은 왕복 4시간을 걸어 등하교를 하는 여고생이다. 무조건 ‘빨리’ ‘열심히’를 강요하는 세상,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선천적 멀미 증후군을 지닌 주인공은 자신의 삶에 울린 경보를 통해 자신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에 나선다. 

‘써니’ ‘수상한 그녀’ 등을 통해 ‘최연소 흥행퀸’ 타이틀을 거머쥔 심은경이 블록버스터 출연을 마다하고 ‘선천적 멀미증후군’과 ‘경보’라는 독특한 소재를 탁월하게 버무린다. 순 제작비 5억원을 들여 한달여만에 촬영한 독립 영화를 선택한 그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내게 초심을 찾아줬다. ‘내가 다시 예전처럼 연기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행복하더라”며 “무엇보다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기 때문에 구분 짓지 않는다. 현장도 다를 게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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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고등학교 졸업 전, 걷기 여행을 나서는 주인공을 통해 각자의 ‘인생속도’에 대해 묻는 연출이 8년이 지난 지금에서 더욱 와닿는건 무엇일까.(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걷기왕’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시대가 가진 현실성을 더한다. 극 중 매번 지각하는 만복이를 걱정하던 담임선생님(김새벽)은 사연을 알고 그 피곤함에 수업시간마다 조는 만복이의 상황을 간과하지 않는다. 차를 못 타는 제자를 위해 실제 집까지 같이 걸어가는 열정을 불태우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학부모의 환영 속에 마당에 뻗어버리고 만다. 다행히 가정은 다복하고 부모님의 믿음으로 점철돼 있다 데 안도하는가 하면 자신만이 숨겨진 만복이의 능력을 안다는 쾌감도 느낀다. 다음날 제자가 가진 걷는 능력을 마음껏 꽃피워주기 위해 그는 체육교사에게 만복이를 추천한다.

학교에서 운영 중인 경보팀을 훈련시키지만 체육 선생의 손에는 늘 성공에 관련된 책이 들려있다. 말로는 늘 최선을 다하라고 아이들을 격려하지만 사회에서 말하는 현실적인 성공이 가늠되는 대목이다. 누가 봐도 평범한 만복이를 보고는 “선수출신이냐?”고 되묻는 그에게 믿을 거라곤 육상부 출신의 에이스 수지 (박주희)뿐이다. 부상으로 경보를 하는 학교 선배 수지는 뭔가 타고난 듯 보이는 만복의 등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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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인 멀미의 모습은 을 겪는 단순히 ‘지방러’의 공감이 아니다. 늘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현대인의 트라우마를 건들이는 묘한 지점이 있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공무원이 되어 칼퇴해서 맥주 한 캔 마시는 게 꿈”이라는 짝꿍 지현이는 자신과 달리 확고함을 탑재한 인물이다. 지현이는 늘 “힘들어 죽겠는데 어른들은 뭘 자꾸 이겨내랴고 하느냐”며 툴툴댄지만 뭔가에 휘둘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다. 삶의 즐거움이라곤 집에 배달오는 중국집 배달원 오빠를 짝사랑하는것 뿐인 만복은 친구의 단호함에 자극받아 큰 결심을 한다. 

열정과 패기를 소재삼아 ‘노오력’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걷기왕’은 그런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다. “꿈없이 사는 인생은 걷기와 똑같아. 멀리뛰기와 달리기를 해야지”라고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경보를 통해 일상생활에 팽배한 ‘노오력’을 풍자한다. 만복은 경보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고 곧 대회에 출전하지만 경기가 열리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아이러니에 놓인다. 자신의 멀미로 인해 같은 팀이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뻔하자 운동 역시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고 빠르게 포기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게 지탄을 받을 일인지 ‘걷기왕’은 되묻는다.

연출을 맡은 백승화 감독은 “한참 시나리오를 쓸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대세였다”면서 “청춘영화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는 방황하던 주인공이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고 그것을 열심히 해서 이뤄내는 서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치열한 경쟁의 세계 속 완주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연출의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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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벽은 이 영화 이후 ‘벌새’에서도 선생 역할을 맡아 명실상부 교직원 연기의 지존을 여실히 보여줬다.(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어쨌거나 주인공은 평소 자신의 모습을 던지고 ‘투혼’을 발휘한다. 만복이는 약물로 탈락한 선수들이 발생해 운 좋게 전국 대회에 출전하게 되고 과도한 연습으로 발가락 부상을 입지만 티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경보를 통해 소속감과 그동안 못 느꼈던 장대한 꿈을 설계하지만 속도가 기준이 있는 경보의 세계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영화의 말미 무리하게 속도를 낸 만복이는 넘어지고 만다. 잠시 하늘을 본 그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평소처럼 걸을 것인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더이상 시간을 쓰지 않겠다”는 각성을 할까. ‘걷기왕’은 배우들이 가진 특유의 장기가 빛을 발하는 영화다. 심드렁하면서도 개그감을 잃지 않는 심은경의 연기와 스스로 “영화를 보니 이 영화의 유일한 빌런이 나였다”고 고백한 김새벽, “본업보다는 다른 일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120% 끌어내는 걸 요구받는 사회에서 이 영화는 ‘아니다’를 외치는 작품”이라고 말한 허정도.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면 ‘걷기왕’의 재미는 배가 될 것이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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