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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광화문 괴담> 박종인

입력 2022-10-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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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 미확인 괴담(怪談) 또는 가짜뉴스에 대한 이야기다. 오류와 의혹이 가득한 이야기라도 극적인 스토리가 담기면 사람들은 집단취면에 빠진 듯 홀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중에는 감동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진실을 호도하는 괴담과 가짜뉴스가 의외로 많다. 특히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권력자들이 자의적으로 부풀린 신화적 스토리가 적지 않다. 이 책은 역사 고증에 천착해 온 저자가 그런 괴담과 가짜뉴스의 허구를 파헤치고 역사적 진실을 추적한 결과물이다.


* 청와대가 예로부터 천하의 명당? - 2022년 5월 청와대가 일반에 개방되면서 뒷산 절벽에 새겨진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글자가 주목을 끌었다.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되던 이 표석은 청와대 터가 예로부터 명당이었음을 입증하는 징표로 여겨졌다. 하지만 저자는 이 글자가 구한말 19세기에 새겨진 것이라고 반론을 편다.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탄 궁궐을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 누군가 새긴 글이라는 것이다. 1990년 노태우 정부의 청와대 신축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을 때 금석학 대가 임창순이 이미 결론 냈던 사안이라고 말한다. 필체는 남송시대 명필 ‘연릉오거(延陵嗚据)’ 것이 맞지만 탁본을 떠와 새겼다는 것이다. 각자(刻字) 추정연대는 1850년대였다. 저자는 1865년 5월에 13살 고종이 창의문 근처에서 발굴했다는 구리 그릇을 어전회의에 내놓았던 사례도 소개한다. 뚜껑에 ‘동방 국태공이 을축년 4월에 국가의 큰 일을 하게 되리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동방국태공이 바로 대원군이었다. 저자는 이 두 사건이 모두 정치적 기반이 없던 권력자들이 풍수와 도참과 조작을 동원한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 풍수지리로 조선 수도 한성을 만들었다? - 조선의 수도 한성은 정도전의 ‘백악주산설(白岳主山說)’에 의해 풍수지리적으로 조성된 도시라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저자는 태종 이방원의 1417년 어전회의 발언을 근거로 이를 ‘소설’이라고 단언한다. 태종은 “도읍을 천도할 때 하륜이 ‘참서(讖書)’를 믿고 도읍을 무악으로 하자 했지만 나는 믿지 않고 한성으로 도읍을 정했다”며 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재차 지시했다. 한성 천도는 무학대사와 정도전, 하륜 사이에 풍수지리 논쟁을 거쳐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성이 오로지 실용적 기준에 따라 건설된 도시라고 강조한다. 사통팔달 도로의 거리가 고르고, 배와 수레가 통할 수 있고, 큰 토목공사 없이도 천도할 수 있었기에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좌청룡 우백호’ 같은 풍수지리적 해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일 뿐, 도시 기능과 경비절감이라는 합리적 기준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성으로 재천도한 태종은 풍수를 포함한 도참 일체를 일망타진할 것을 지시했다.

* 일제가 국가 축을 훼손했다? - 정부는 총독관저-총독부-경성부청-조선신궁에 이르는 ‘일제의 축’을 원래대로 바로잡겠다며 ‘세종광장 조성방안’을 추진했다. 600년 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도읍지와 궁궐을 북한산-북악산-관악산 축을 기준으로 설계해, 삼각산과 관악산을 잇는 직선상에 경복궁을 축으로 놓고 그 뒤로 육조거리와 남대문을 설계했는데 일본이 이 축을 틀어버렸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 건축가 승효상도 그에 동조했다. 저자는 ‘어이없는 계획’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축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반박한다. 정도전의 한양 도시계획도 괴담이라고 단언한다. 승효상도 나중에 “경복궁-육조거리로 이어지는 축은 관념상의 정축이 아닌가. 여기에 기반을 두고 광화문 광장 위치를 바로잡자고 말했을 뿐”이라며 발을 뺐다고 전한다. 저자는 기록상으로도 정도전-무학대사 신화는 임진왜란 이후 탄생한 전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일본군 ‘말 위령비’가 ‘조선왕실 제단’ 둔갑 -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홈페이지 내 ‘용산공원 10경’ 코너를 보면 조선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남단 풍운뇌우단’이 나온다. 미군기지 북쪽 캠프 코이너 지대의 얕은 구릉 끝 쪽에 화강암을 깎은 두 기둥이 누워 있고 그 사이에 자연석이 앉아 있다. 2005년에 발견된 이 터를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로 가 지정했다. 저자는 이것을 일본군 군용마 비석이라고 단언한다. 1941년 이곳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26포병연대가 세운 비석이라는 것이다. 당시 이곳 사진이 찍힌 엽서가 근거다. 당초 서 있던 비석에는 ‘애마지비(愛馬之碑)’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포 운반에 동원됐다가 죽은 군용 말을 추모한 비석이란 것이다. 옆에 길게 누워있는 화강암이 그 비석과 생김새가 유사한데도 2005년 이후 문화재청은 미군기지 내 이 구조물을 추가조사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일본군 말 비석이 조선 왕실 천제단 유구로 확정됐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 고종이 ‘고종의 길’을 따라 아관파천(俄館播遷)? - 2012년에 문화재청은 고종이 1896년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때 지나갔던 ‘아관파천길’을 복원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25억원을 들여 2018년에 ‘고종의 길’을 공개했다. 덕수궁 뒷길~정동공원 뒷문 120m 좁은 거리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안내판에는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된다’고 적혀 있다. 일제 위협을 피해 피신한 길이라던 복원 명분은 사라지고, 아관파천과는 상관도 없는 길을 거액을 들여 조성했다는 얘기다.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시절 미국공사관이 작성했다는 출처 불명의 지도에 이 길이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된 것을 근거로 법석을 떤 것이다. 게다가 1897년 미국 공사 호러스 알렌이 본국에 보낸 지도에는 이 길이 꽉 막혀 있다. 저자는 “흑역사를 나랏돈 들여 ‘선양’하고 ‘기념’하는 나라”라며 일갈했다. 그는 고종이 이곳에서 경운궁(덕수궁)을 오가며 일본공사를 만나고 1년 동안 아시아 최대 매장량의 운산금광을 비롯해 각종 지하자원 채굴권을 서구와 일본에 팔았다고 비판한다.

* 남대문, 임진왜란 때 개선문이라 ‘국보 1호’? - 1592년 5월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 2번대가 남대문을 통해 경성에 입성했다. 총독부가 이에 남대문을 전승문 삼아 ‘조선보물 1호’로 지정했고, 이를 우리 정부가 답습해 ‘국보 1호’로 삼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근거로 “대한민국 국보체계는 일본 잔재”라며 국보 번호체계가 사라졌다. 하지만 총독부의 지정번호는 주요 문화재를 고적과 보물로 분류한 뒤 지역 순으로 붙힌 관리번호였을 뿐이다. 조선 문화재 연구의 선구자였던 세키노 다다시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조선 보물 분류체계를 세웠는데 이 때도 남대문은 ‘한국적 목조건물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근거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남대문 국보 1호 지정을 둘러싼 황당 괴담이 유포된 데는 일본거류민단 단장이었던 나카이 긴조가 쓴 <조선회고록>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거류민회가 40만~50만을 수용할 대도시 건설을 계획했는데, 교통에 장애가 되는 남대문이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에 당시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낡아빠진 남대문을 파괴해 버리라”고 했지만, 나카이 긴조가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전승문”이라고 설득해 파괴를 막았고 이후 남대문이 국보 1호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부실 검증과 야사(野史)와 추론에 온 나라가 놀아났다고 비판한다.

* 총독부가 ‘경희궁’을 허물었다? - 한 동안 경희궁의 정문 격인 홍화문은 호텔신라 영빈관 정문으로, 정전인 승정전은 동국대 구내 법당으로 사용됐었다. 조선총독부가 그리 만들었다고 알려졌었다. 저자는 1899년 즈음 국어학교 프랑스어교사 샤를 알레베크가 찍은 사진, 그 전에 프랑스 언론인 비예타르 드 라게리가 동판화로 실은 사진을 근거로 “일본에 죄를 덮어 씌운 국뽕사관”이라고 맹 비난한다. 그때 이미 허허벌판의 ‘뽕나무 궁전’으로 적었을 만큼 궁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1901년 영국공사관 지도에도 ‘조선왕궁’ 표기 끝에 ‘아무도 살지 않는’이라는 설명이 달렸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1907~1910년에 일제가 강제 철거해 파괴됐다고 설명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39개월 공사 과정을 빠짐 없이 적은 ‘경복궁연건일기’에도 경희궁 전각 중 승전전과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홍정당 외 나머지는 모두 철거해 왔다고 적혀 있다. 궁을 뜯어 경복궁 공사에 썼다는 것이다. 이후 궁터를 왕실 소유 4개 궁에 나눠주고, 백성에게 개간해 농사를 짓도록 하면서 궁궐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고종 정부는 선해청 곡식 저장공간이 모자라자 승정전 일부를 창고로 전용케 했고, 1882년 임오군란 후에는 이 터에 양잠을 위한 뽕나무를 심게 했다.

* 원나라가 고려왕을 강제로 사위 삼았다? - 우리는 고려가 몽골에 의해 ‘결혼동맹’을 강요받고 살아 남았다고 안다. 저자는 싫다는 몽골 황실을 설득해 부마국 지위를 얻은 것이 고려라고 반박한다. 당시 몽골은 고려 고종에게 공물과 인질에 입조(入朝), 즉 왕이 공식 항복하고 속국이 되라고 압박했다. 21년째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고종은 둘째 왕자 ‘왕창’을 보내혀 했지만 무신정권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신 ‘최의’가 죽자 고종은 1259년 태자 ‘왕전’에게 화친 문서를 들려 몽골로 보냈지만 곧 자신은 죽고 만다. 이때 몽골 황제 현종까지 죽고 왕자들 간 내분이 일어나는 황당 사태가 발생한다. 태자 일행은 무슨 연유에선지 당시 남송을 정벌 중이던 현종의 넷째 동생 쿠빌라이를 찾아가 항복 한다. 세를 얻은 쿠빌라이가 5대 황제에 오르면서, 태자(고려 원종)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나중에 원종은 직접 몽골로 가 무신 잔당 소탕을 빌미로 군사를 요청하면서 자신의 아들 태자를 사위로 맞아 달라고 요청한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왕은 황실 부마 자격을 얻게 되고, 황실회의에 서열 7위로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하게 된다.

* 호찌민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 -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호찌민에 보낸 한 개막식 축하 영상메시지에서 “베트남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가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약용의 기일에 그가 제사까지 지냈다는 얘기도 나왔다. 소설가 황인경이 1992년 <소설 목민심서> 머리말에 ‘호찌민이 일생 동안 머리맡에 목민심서를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고 쓴 이후 유흥준이 이듬해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호찌민이 부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목민심서가 필독서라고 했다’고 베꼈다. 박석무 이사장이 이끄는 다산연구소의 홈페이지에도 이런 내용으로 소개돼 있다. 심지어는 2009년 <박헌영 평전>에는 1929년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호찌민을 만나 ‘친한 벗’이라는 뜻의 붕우(朋友)라는 서명을 해 목민심서를 선물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 책자가 호찌민박물관에 있다고도 전해졌다. 저자는 모두가 괴담이라고 일축한다. 박헌영과 호찌민은 만나지도 않았고, 박물관에 목민심서도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다산이 태어난 남양주시는 호찌민의 고향인 베트남의 빈시와 2005년 자매결연을 맺고, 2017년 빈시에 10억원을 들여 ‘남양주다산로’까지 개통해 주었다.

* 류성룡도 말리지 못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 행각 - “명나라로 내부(內附,망명)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임진왜란 한 달도 안돼 함락위기에 빠진 한성을 탈출한 선조 임금의 말이다. 이 때 좌의정 류성룡이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라고 말려 선조가 마음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하지만 선조의 요동 망명을 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망명을 어전회의 안건으로 처음 올린 이도 선조였다. 선조는 북경이나 남경까지 피신할 것까지 고려했다.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놈 손에 죽을 순 없다”고 했다. 세자를 놔두고 혼자 망명할 생각까지 했다. 급기야 류성룡은 선조를 요동으로 보내고 광해군에게 왕위를 돌릴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사실은 명나라 황실이 선조의 망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망명 거부 통보를 받고서야 비로소 선조가 망명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선조의 간절한 망명 요청에 명나라는 ‘압록강 건너 100리 북쪽의 여진족 땅 폐기된 건물에서 지내라’며 답을 보내 왔다. 수용인원도 100명 이내로 제한했다. 그러면서 “동방의 대국이 어찌하여 왜가 한번 쳐들어오자 멀리서 보기만 하고는 달아났는가”라고 조롱했다.

* 정조가 조선 학문 부흥을 이끌었다? - 정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개혁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정조가 정작 서양 서적 수입을 금하고 중국과의 학문 교류도 금지했던 군주라고 반박한다. 그가 청나라에서 들여온 신문물 중 가장 먼저 취한 것은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 품계석을 세워 관직 질서를 잡은 일이었다고 꼬집는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즉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달의 주인이라 자부한 정조는 북학파 박제가의 통상 확대와 상공업 진흥 제안을 거부했다. ‘백학파’를 이끌던 박지원은 ‘청나라 패관잡기를 퍼트린 인물’로 매도됐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물은 법으로 금지했다. 저자는 “정조가 통달한 학문은 성리학 일변도였으며, 그가 진흥한 학문 역시 오로지 성리학이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개혁사상을 대표했던 북학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첩 자식들을 차별 없이 뽑았음을 남들에게 보여주려 등용한 것이란 말까지 남겼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학문의 자유를 희생시킨 것이 정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의 시대가 ‘조선 문예 부흥기’였다는 것은 가짜 뉴스라고 단언한다. 그나마 정조 아들 효명세자가 박제가의 <연암집>을 빌려 읽는 등 개혁군주의 탄생을 기대했으나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 실학은 조선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 이제까지 우리는 현실 모순 해결을 추구한 개혁적 학문이 실학(實學)이며, 영정조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배웠다. 하지만 저자는 당시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비이성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목숨까지 위협받을 정도로 정치적 불이익을 받았다고 전한다. 실학이나 실학자라는 개념도 훗날 1930년대 식민시대 학자들이 만든 용어라고 주장한다. 18~19세기 국가 정책에 전혀 쓰인 적이 없으며 특히 관련 서적은 전혀 출간되지도 못했다고 전한다. <목민심서>등을 쓴 정약용과 농업서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이들도 나중에 긴 유배 생활을 경험한다. 1930년대 연희전문 교수 정인보와 전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조선학운동’을 개창하면서 문화건설론과 다산학을 내세우면서 비로소 ‘실학’이 태동했고 1938년 정약용의 책과 글을 모아 <여유당전서> 76권이 출간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임원경제지>는 그나마 해방 후인 1966년에야 빛을 보았다. 정조의 학문 탄압으로 지하로 숨어 들었던 백탑파(북학파)도 명맥을 잇지 못했다. <연암집>이 세상에 나온 것도 그가 죽고 95년이 지난 1900년이었다. 실학과 실학자가 조선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 의병장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아사순국(餓死殉國)? - 최익현은 고종 즉위 10년이던 1873년 호조참판 때 “대원군의 권력을 회수하고 고종이 친정체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다음날 21세의 고종은 ‘친정(親政)’을 선언한다. 최익현이 킹 메이커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로도 그는 각종 위정척사 상소를 올려, 나라 문을 잠그고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하라고 외쳤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명나라가 망할 때 ‘의종’이 사직을 위해 죽은 의리를 듣지 못하셨는가”라며 사실상 고종의 자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후 나이 80에 제자들과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4개월이 넘게 단식투쟁을 벌이다 죽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의 단식이 사흘 만에 끝났으며, 그의 사인은 ‘풍토병’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최익현을 ‘백이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다 죽은 충신’이라고 치켜 세우는 과정에서, 사실과 달리 신화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의 남다른 우국충정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 괴담을 만들어선 안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가 할복자살? - 우리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됐던 ‘이준’이 회의장에서 할복자살해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다고 배웠다. 그래서 ‘열사(烈士)’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 괴담은 대한매일신보의 오보 탓이었다. 이준은 호텔방에서 급사했다. 당시 기자회견에도 참석 못할 정도로 그는 종양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런데 항일독립단체 결집에 열중하던 대한매일신보가 ‘이씨가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 만국을 경동케 했다’는 호외를 날렸다. 급히 황성신문도 확인 않고 ‘자기 복부를 칼로 잘라 자살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는 설이 있더라’라고 보도했다. ‘카더라 식’ 보도가 경쟁적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우국충정 자살로 받아들여졌다. 일본 외무부는 단독(丹毒), 즉 상처 감염이 사인이라고 이미 보고뒨 상태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듬해 ‘분사(憤死)’라는 표현으로 슬쩍 바꿔 버린다. 1956년 사학자 이병도가 <국사대관>에서 병사설을 공개하기 전까지 국민들은 자살을 믿었다. 그 해 조사위원회가 꾸려지자 이준 열사 추모단체인 ‘일성회’는 “국민 사기 앙양을 참작해, 분사라 해도 자살로 해 두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를 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결국 자살이 아니라 분사, 즉 울분에 못 이겨 죽은 것이라고 공식 결론을 내리고 순국(殉國)이라는 표현을 쓰도록 결의했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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