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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문화경] 수상한 인문학

입력 2015-05-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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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한상덕

“교수님 있죠, 요즘 애들하고는 말이 안 통해요.”

13학번 재학생이 올해 신입생을 보고도 세대차이가 난다는 세상이다. ‘5분 현상’을 기다리지 못하는 심리 덕분에 탄생한 게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가 말이지.

이런 세상임에도 인문학만은 오래전 그대로다. 1975년 개봉된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인문학은 위기였다. 철학도 중 한사람은 군 입대로 도피처를 삼았고, 다른 한사람은 자전거를 탄 채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다. 진짜로 전공하겠다는 신입생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교수만 살겠다고 학과명을 살짝 바꾼 인문학과도 있다. 실례로 교수는 그대로인데 철학과, 독일어과, 프랑스어과가 합쳐져 ‘글로컬문화학부’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개명한 경우다.

반면에 캠퍼스 밖에는 인문학 강좌가 넘쳐나고 있다. 덕분에 인문학 스타 강사도 탄생했고 몇 몇 인문학자들은 억대의 수익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들은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다. 명색이 교육 현장에서만 이 십 년 이상을 보냈지만 나는 아들의 전공 선택에 어떤 충고도 하지 않았다. 십대 중반의 나이에 문과 혹은 이과를 선택하라는 건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는 우리의 교육제도다. 백년 인생 중 십분의 일을 살았을 뿐인데 평생 직업을 결정하라니. 적성이나 소질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강요가 아닌가. 차선책으로 한 대학을 선택했다. 대기업식 대학 구조조정의 칼날이 인문학을 동굴에서 빠져나오게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무능한 선비보다는 장사꾼 마인드를 가진 약아빠진 선비가 낫겠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글을 쓸 때 시비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주적 절차를 위해 모든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면 된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지구상에서 ‘이해 당사자의 손해를 감수한 합의’라는 건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자신의 밥그릇에는 목숨을 걸지만 제자의 밥그릇에는 관심이 덜한 교수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북 경산에 위치한 한 대학의 설립자는 국가장학금을 횡령한 죄 등으로 세 차례나 감옥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대로다. 자신의 부인을 총장으로 세워놓고는 대학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교수들 밥그릇만은 크게 손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면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막말한 재단이사장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로 인해 구조개혁안까지 비난해서는 안 된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이들은 경쟁력 없는 학과를 폐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럴 경우 학문 간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거다. 선택할 수 없는 학생들의 소외감까지 걱정한다. 그래 놓고는 동일한 시각으로 취업이 안 된 제자들 문제 해결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반쯤 자기 자랑을 보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들은 활발한데 지금 시대에 맞는 인문학에 대한 시도는 게을리 하고 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인문학이 오늘날까지 버티어 온 건 몇 몇 스타 인문학자 덕분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체의 생명력이 있어서다.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거나 자신처럼 되고 싶어 한다고 전제한다. 인문학으로 돈을 벌고 지위를 얻은 이들 또한 인문학의 실제 위치를 모르는 듯하다. 대중의 요구는 거창하지 않다. 수상한 인문학 놀음을 그만 두라는 거다.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노력으로 자기 밥그릇을 유지시켜주는 학생들을 위해서도 힘써달라는 거다.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문화평론가 한상덕

 

*외부기고의 일부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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