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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문화경] 막말과 잔혹 사이

입력 2015-05-1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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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한상덕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곤란도 겪지만 얻는 것도 있는 편이다. 얼마 전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이다. 탕에 있는데 용 문신을 등에 새긴 이가 들어오는 거였다. 덩치가 크고 깍두기 헤어스타일이 더해져 언뜻 봐도 조폭의 이미지였다. 자리를 피하려다가 엉거주춤 앉아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교도소 교화위원을 지내지 않았느냐고. 그렇다고 답하자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문신한 이유를 물어봤더니 “그래야 시비를 걸지 않죠. 아니면 별거 아닌 놈들이 귀찮게 굴거든요”라고 답했다. 이어 문신할 때 마취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선 못하고 동남아에서 했는 데요. 마취도 없이 꼬박 이틀 동안 죽을 것 같았어요”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힘들게 문신한 이유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란다. ‘문신한 사람 출입금지’라는 목욕탕 팻말을 무시할 수 있는 건 문신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열 살짜리 딸아이가 엄마를 향해 “엄마를 씹어 먹어/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이빨을 다 뽑아 버려”라고 쓴 글도 어쩌면 문신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원에 가기 싫은 아이 나름의 보호색 같은 것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너무 호들갑스럽다. 한쪽에서는 “내 아이가 볼까 두렵다”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아이가 쓴 동시를 어른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말한다. 예술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중의 무지를 탓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들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문화시장이라는 게 그렇다. 상품을 소비함에 있어 대중과 평론가의 입장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로 대중이 우위를 차지할 수도 있고 평론가가 대중을 이끌 수도 있다.

한글사전에서 동시는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동시를 읽고 이해하는 데 고도의 지적·정서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구나 쉽고 편하게 동시를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예술과 사이비 예술을 구분하는데 굳이 평론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가뜩이나 막말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개그맨이나 야당 국회의원의 막말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세상살이다. 시(詩)작업은 콩 중에서 가장 좋은 콩을 고르는 것과 같다. 하고 싶은 말 중에서 최고로 정제된 말을 고르고 또 고르는 일이다.

아마도 글을 쓴 어린이는 어린이날에 즈음해 출판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케팅을 위해 논란을 일으키려는 계산은 없었을 것이다. 입가에 피를 묻혀가며 심장을 먹는 소녀를 그린 기괴한 삽화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라거나 예술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시는 시일 뿐인데 진짜라고 받아들인 어른들이 많아 잔인하다고 하는 것 같아요”라는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인터뷰가 가능했을 것이다. 어린이가 한 말이라고 믿어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문화상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절대 다수의 대중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절대 다수의 대중이 불편하다면 불편한 것이다. 아이의 잔혹한 글을 ‘잔혹 동시’라고 명명하기에 앞서 또래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어른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때로는 잔인한 게 아이들이라며 아이들을 다 아는 듯 말하는 것 또한 어른의 관점이 아닌가. 아이는 아이의 관점이 있는 게 당연하고 어른은 어른의 관점이 있는 게 마땅한 일이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어른이다.

 

문화평론가 한상덕

 

*외부기고의 일부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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