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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문화경] 못 믿겠다 TV

입력 2015-06-1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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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한상덕

오래전 호주 멜버른에서 있었던 일이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지인이 홧김에 길가의 쓰레기통을 걷어찼는데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겉모습은 멀쩡했다. 대신에 경찰관 7명이 회오리처럼 달려와 지인을 넘어뜨리고 손목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이후 상당한 벌금을 물어야 했고 여행일정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전 홍콩 공항에서 목격한 일이다. 새치기한 중국인 신혼부부를 거칠게 떠미는 갱단처럼 생긴 백인을 여경이 말렸지만 안하무인이었다. 곧이어 홍콩 갱스터 무비의 한 장면처럼 기관총을 멘 경찰관 십여 명이 백인의 무릎을 꿇게 했고 수갑을 채웠다. 백인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장면이 새삼 떠오른 건 종합편성채널의 토크쇼에 초대된 한 출연자 때문이다. 그녀는 15년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는 사법처리가 됐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해로 생긴 작은 사건인 것처럼 말했고 MC와 패널들은 그녀의 증인이라도 되는 듯 맞장구를 쳤다.

당시 스캔들의 핵심이었던 전직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관련해서는 “당시 해명을 할 때 뇌물이냐 불륜이냐를 선택해야 했다”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뇌물이든 불륜이든 죄가 될 것인데도 함께 출연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의를 넘어 지지한다는 식의 발언으로 일관했다.

“TV에서 봤는데 말이야”라며 방송을 인용하는 까닭은 여러 겹의 여과 장치가 있어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서다. 게이트 키핑(Gate keeping) 과정을 통해 출연자를 선정했을 것이고 출연자의 토크가 방송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문(Gate)을 통과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TV매체, 특히 종합편성채널은 이런 시청자들을 가볍게 배신해버린다. 막말을 이유로 눈물의 기자회견을 자청한 개그맨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전히 얼굴을 비추는가 하면, 한 출연자는 불륜으로 민사소송 중이라는 보도가 무색하게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하긴 누범의 절도범에 불과한 노도둑을 ‘대도’라는 수식어까지 동원해가며 토크쇼 단골 출연자로 만든 그들이기에 할 말이 없기는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자가 되는 것이 나쁜 선택이라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자가 줄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정리하면 범죄자들이 과도한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체포된다면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겠지만 자신이 체포될 확률은 1%에 불과하다고 믿는 게 범죄자다. 나만은 무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 범죄를 실행에 옮기는 거다. 교도소 교화위원을 하면서 경험한 바로도 그렇다. 영화에서는 재소자들이 후회도 하고 반성도 곧잘 하지만 실제 모습은 정반대다. 단지 그날, 그 순간에 재수가 없었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상습적인 범죄자의 성격은 15세 이전에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폭력적인 비디오게임과 TV매체를 꼽는다.

가뜩이나 적절한 멘토가 턱없이 부족하고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어른들이 많지 않은 사회구조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해서 출연하는 건 폭력적인 방송 이상으로 범죄에 대한 무감각을 조장할 수 있다. 또 청소년들의 과도한 낙관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못 믿겠다 TV’라는 이미지를 확산시켜 괴담이 판치는 사회를 만든다. 광우병, 메르스보다 무서운 괴담을 만드는 주범은 ‘못 믿겠다 TV’다.

 

문화평론가 한상덕

 

*외부기고의 일부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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