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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문화경] 슬픈 영화가 그립다

입력 2015-07-0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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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한상덕
지난 5월 필리핀 세부로 패키지여행을 갔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스무 명의 일행 중 어린 아이 둘이 원인 제공자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순간부터 아이들은 웃으며 떠들었고 각각의 젊은 부모는 대견하다는 듯 따라 웃었다. 이후 참다못한 일행 중 한 사람이 노골적으로 싫어함을 표시했지만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사람은 아이의 부모였다.

나 또한 인내력의 한계를 느꼈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성직자를 처벌’하는 한 수도원의 규칙을 떠올리며 수련하듯 여행을 마쳤다. 수도원의 규칙은 이랬다. “만일 우리 형제(성직자)가 아이들과 웃고 떠든다면… 세 차례의 경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성직자)가 행실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가장 엄중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심리학자 바실리스 사로글로는 종교와 웃음은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웃음은 장난을 좋아하고, 모순을 받아들이며, 불확실성을 수용하는데 반해 종교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란다. 부연하여 농담보다는 진지함,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 무의미보다는 의미, 충동보다는 자기규제, 혼란보다는 권위, 유연성보다는 엄격성에 가치를 두는 게 종교라고 설명했다.

예전의 광고는 종교적 근본주의와 맥락이 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감성보다는 이성, 이미지보다는 설명하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해서 코미디언을 광고모델로 기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린이가 주요 소비자인 과자류나 소비자가 가볍게 선택할 수 있는 기호품에 국한해 웃음을 소재로 한 광고가 만들어졌다. 교육이나 금융 같은 상품은 코미디는 물론이고 코미디언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요즘은 ‘웃기는 광고’가 주류다. 상품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웃음이 최고’라고 여기는 광고주의 지레짐작 탓이겠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일관성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장면마다 강력하게 요동치기만을 고집하는 문화상품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결과다. ‘감정의 동요’를 모든 문화 창작품의 목표로 삼는 문화시장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울고 싶을 때 울어야하고 웃고 싶을 땐 웃어야한다. 웃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란 소리다. “웃기는 영화를 본 환자들은 심각한 영화를 본 환자들보다 진통제를 60퍼센트 이상 적게 투여해도 되더라”는 실험결과도 있지만 “선택권 없이 코미디영화를 보게 했더니 훨씬 많은 진통제를 필요로 하더라”는 실험결과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던가.

가뜩이나 화가 나는 세상살이다. 범죄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노인은 노인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화가 나있다. 그럼에도 이런 대중의 정서를 보듬어야 할 대중문화는 ‘호호 하하’ 웃기만 하고 있다. 시시때때로 트렌드를 반영하는 최고의 적임자라는 광고마저 웃음을 강제하고 있다.

‘웃음 상품’은 소비자가 우월감을 느껴야 소비될 수 있다. 등장하는 인물이 바보스럽고, 상황파악을 못해야 소비가 배가된다. 그런 못난이가 힘센 사람을 조롱하고 권력에 항거할 수 있어야 웃음이 만들어지는 거다. 그런 역할을 중세에는 난쟁이와 곱사등이가 맡았고, 성격은 다르지만 뚱뚱하거나 못 생긴 외모를 가진 코미디언이 인기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웃음과 눈물을 결정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내가 하수구에 빠지면 눈물이고 다른 사람이 하수구에 빠지면 웃음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내가 하수구에 빠진 형국이다. 웃고 떠들기보다 대놓고 울고 싶은 ‘나’다. 나는 울고 싶은데 상대방이 웃으면 화가 나는 게 당연지사다. 화가 난 나를 진정시키는 데는 ‘웃기고 슬픈’ 것 말고 제대로 된 슬픈 창작품이 있어야한다. 슬픈 영화라는 안전판 위에서 마음 놓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어야한다. 나는 인간이니까.

  

문화평론가 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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