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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문화경] 노후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입력 2015-08-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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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한상덕

변호사인 친구는 퇴근시간만 되면 허세 덩어리가 된다. 

 

늘 저녁 약속이 있는 것처럼 바쁘게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물론 갈 곳이 마땅치 않다. 귀가해서 TV를 보자니 체면이 말이 아닌 것 같고 기원에 가서 마작을 하자니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일없이 동창생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당뇨다 고혈압이다 해가며 끙끙대는 친구를 술자리에 불러내는 것도 못할 짓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친구가 대안으로 꺼내든 건 스마트폰이다. 

 

이전에 찍어둔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고는 “좋아요”를 기다린다. “좋아요”가 한 둘에 그칠 땐 심하게 우울해지고 많아도 헛헛하기는 마찬가지다.

2013년 봄, 안식년을 맞은 아내와 터키로 패키지여행을 갔다. 

 

배낭여행이 아니어서 영 내키지 않는 여행이지만 어쩌겠는가. “여성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몸이 작아서 기초대사율이 낮고 몸에서 생기는 열이 적기 때문에 추위에 민감하다”라는 미국 메이오 클리닉의 설명을 떠올리며 아내의 성향을 이해했다.

터키의 파묵칼레(목화의 성이라는 뜻)는 깨끗하고 담백하며 검소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거대한 백자 도자기였다. 

 

크고 작은 그릇에는 온천물이 넘쳐흘렀고 사람들은 맛을 보듯 기웃거렸다. 

 

산 아래 호수에는 막 일을 끝낸 붉은 노을이 양팔을 벌려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처럼 지나쳐야 했다.

이런 내 심정과는 상관없이 젊은 가이드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밤 10시 이전에는 취침에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훈련소 교관처럼 말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호텔 로비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밤 12시에 밸리 댄스 쇼가 열린다는 데요?”라며 웃자 정색하고는 단체임을 강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밸리 댄스 쇼 시간에 맞춰 로비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반쯤 취한 노인들이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노인들은 새벽 2시가 지났지만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침 6시에 기상해야 한다며 먼저 일어나겠다고 말하자 “연수를 오셨군요!”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음에는 꼭 부부가 함께 여행오라며.

요즘 매체에 소개되고 있는 인생 2막의 성공스토리와 패키지여행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어쩌면 둘 다 똑같이 주객이 전도돼 노는 게 빠져있다. 백화점 영캐주얼 매장에서 일하는 65세의 할머니,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한 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67세의 할아버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오로지 ‘일’이어야 한다는 듯 극단과 치우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노인의 일이 젊은이나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칭찬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예컨대 농사는 힘보다는 오랜 경험에 의한 직관이 우선하기 때문에 노인의 판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대신에 현재의 산업구조는 젊은이들에게 유리하다. 창조를 하건 통일을 위한 노력이건 청년이 주체가 돼야 한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못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30분만 책을 읽어도 눈이 침침해지는 노인에게 도서관에 가서 하루를 보내라 하고, 평생 써보지 않은 글을 이제 와서 쓰라는 건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자원봉사를 하건 취미생활을 하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돼야 한다. 

 

또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줘선 안 된다”식의 이론 같지 않은 이론은 불신의 다른 이름이다. 자식의 미래를 의심하고 자식 된 도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선언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영화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자동차 정비사 카터(모건 프리먼)는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았는가?”,“내 인생이 남에게 즐거움을 주었는가?”를 자문한다. 나는 여기에다 하나를 더하고 싶다. “극단과 치우침에서 자유로운가?”

 

 

문화평론가 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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