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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일갈 “그럼에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예술은.”

[짧지만 깊은: 단톡심화] 개인전 연 김구림 작가

입력 2023-08-28 18:00 | 신문게재 2023-08-2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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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세상 사람들도 저 싫은 건 못하잖아요.”

어쩌면 우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김구림전’(2024년 2월 12일까지)을 진행 중인 김구림 작가는 “이제 나이가 많다보니 기억이 사라져가지만 내가 참 많은 걸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90세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예술을 해야하는 이유”에 대한 우문에 “하고 싶어서”라고 현답했다.

“영화를 만들 때면 영화계에서 얻어맞았어요. 일주일 동안 입원을 한 적도 있죠. 영화를 찍고 편집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못해주겠대요. 제 작품을 편집해주면 영화계에서 발을 못붙인다고. 결국 편집기계를 갖다놓고 제가 밤을 새워가며 직접 했죠.” 

 

김구림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 ‘걸레’(사진=허미선 기자)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은 김구림에게 애초부터 경계는 없었다. 활동을 시작한 1950년대부터 장르나 매체를 활발하게 넘나들었다. 회화를 비롯해 판화, 비디오아트, 설치, 퍼포먼스, 영화 등을 거침없이 오가는 그의 예술세계는 같은 판화라도 전혀 달랐다.


‘걸레’의 경우 걸레로 닦은 자국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 기성품인 흰색 실크프린트 테이블 보 위에 설치작품으로 풀어냈다.

이때의 흰색 기성품은 판화처럼 찍어낸 기법의 것으로 판화 위에 판화로 걸레 자국을 구현하고 그 위에 더러워진 걸레를 둠으로서 평면을 입체화시키고 상업적인 영역과 예술 영역의 공존을 이뤄낸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이질적인 화면들이 모여 비디오 조각 설치작업으로 뭉쳐지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신작 ‘음과 양’, 얼음 아래 트레이싱지에 녹아내리는 속도와 시간을 기록하는 ‘현상에서 흔적으로’ 등 시간성, 극과 극의 간극, 현상 등은 고스란히 그의 예술이 됐다.

고정관념을 깨려는 그의 노력은 늘 어려움에 처했고 논란의 시발점이 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판화 작품이지만 한 신문사가 주관한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판화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출품거부를 당한 사건이다. 이 출품 거부에 대한 기사는 그에 대한 문제제기, 그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그 반론에 대한 또 한번의 반론 등으로 미술계 담론으로 떠올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신문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솔직히 미대를 다니면서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그만 두고 복합적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캔버스에 표현하는 데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그는 각 예술범주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회화나 미술 신에서도 그는 이단아였고 영화, 무용, 공연 등 장르에서도 배척대상이었다. 지금이야 장르 간 융합이 빈번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심각한 ‘영역 침범’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작년부터야 내 작품 좀 팔리잖아요. 평생 안팔리다가 팔리는데 내가 너무 괴로워요. 오히려 안팔렸을 때가 너무 행복하고 좋았어요. 조금씩 작품을 팔아 겨우 살아가는데 빚투성이에 세금을 못내고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화가 없어요. 그게 너무 괴로워요.” 

 

김구림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1950년대 후반 평면 추상부터 2020년대 ‘음과 양’ 연작까지 230여점을 총망라한 ‘김구림전’에서 작가는 전시회 기획단계부터 1970년작 ‘현상과 흔적’을 재현하고자 미술관 외벽을 흰 광목천으로 싸고 싶다는 뜻을 미술관 측에 전했다. 하지만 제도적·행정적 문제로 불발된 상황에 안타까움과 섭섭함 그리고 분노를 표했다.

“여러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반세기 전에 했던 걸 실현하지 못했죠. 당시 작품은 그때 철거가 됐어요.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는 설치 자체도 못하게 될지 제가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이번 전시회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할 말이 없어요. 고리타분한 것만 늘어놔 미안해요. 새로운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이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작가라고 얼굴을 내밀 수도 없어요.”

1970년 경복궁 국립미술관을 흰 광목천으로 감쌌던 ‘현상과 흔적’은 기성 미술계를 대표하는 미술관을 시신 염하듯 천으로 묶음으로서 기득권, 낡은 제도를 떠나보내고 새롭게 나아가자는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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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나이가 들다 보니 이것이 마지막 전시회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모든 걸 한번 펼쳐보자 했는데 결국 그것도 안되더라고요. 뭔가를 하려고 하면 이유가 많아요. 그런 규제들 때문에 모든 걸 다 버려야 합니다.”


‘현상과 흔적’의 재현 불발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 현대미술1과 류지연 과장은 “이 건물 자체가 등록문화재(375호)다 보니 외벽을 천으로 감쌀 경우 외부 도로쪽으로 보이기 때문에 문화재청 등 관련 부처와 협의해야 했다”며 “안된다는 게 아니라 이번 전시에서는 시한을 맞추기 어려웠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더불어 전시를 앞두고 한시임기직이었던 담당 큐레이터가 계약이 완료돼 퇴사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외벽 천 관련 사안을 듣지 못했다는 게 미술관 측 전언이다.

“그래도 (1969년 안무했던) 무용작품(‘무제’)을 녹화해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과거 1시간 반짜리를 15분으로 줄여서 재연해요. 예산문제로 1년밖에 못하지만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이 무용과 영화(‘1/24초의 의미’ ‘문명, 여자, 돈’), 음악(‘대합창’), 연극(‘모르는 사람들’) 네 가지를 다 합쳐서 1시간 30분 안에 끝날 수 있도록 만들었죠.”

자신을 두고 ‘총체적 예술가’라고 일컫는 데 대해 김구림 작가는 “어쩌다 보니 모든 걸 다 하게 됐다. 의상, 패션 등 안한 게 없다”며 “그렇게 하다 보니 예술은 다 같다. 미술이나 문학이나 무용이나 연극이나 그 맥은 같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예술”이라고 밝혔다.

‘실험미술의 선구자’라는 평에도 국내에서 좀체 받아들여지지도, 인정받지도 못해 해외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는 “저는 인맥도 없고 학연도 없었다”며 “그런 사회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예술가로서 감안해야할 일”이라고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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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사진=허미선 기자)

“저를 선구자라고 하지만 예술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거예요. 그저 과거 친밀했던 인간관계가 그렇게 끊어지는 게 나는 슬퍼요.”

그 누구보다 앞서갔고 파격적이었으며 열정적이고 기발했던 그를 통해 “유명한 작가가 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를 모른 척하고 도외시하는, 그런 것들이 참 슬프다”고 토로했다.

“선구자든 아니든 나는 상관이 없어요. 역사에서 옳게, 바르게 기록될 것이니까요. 모든 역사는 그렇잖아요. 세계 미술사를 한번 보세요.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아 있을 때는 지금의 평가가 아니었어요. 고갱이 그걸 받았습니까? 세잔 같은 사람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당시 국전에 입선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 당시 유명했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역사에는 이 세 사람만 남아 있잖아요. 인상주의 대표 작가들로. 그와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그냥 예술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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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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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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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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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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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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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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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전경(사진=허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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