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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곧 일흔? 정신은 청년"… 배우 기주봉의 진짜얼굴

[人더컬처] 서울국제노인영화제 홍보대사 기주봉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이 진짜 어른"
연극 영화 100편 넘는 필모그라피 쌓았지만 "가장으로서 무능한 점 후회"
"기회되면 카메라 잡으며 감독데뷔 하고파"

입력 2023-05-15 18:30 | 신문게재 2023-05-1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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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사단’으로 불리는 그는 오는 22일 프랑스 칸 영화제로 출국한다. (사진=이철준 기자)

 

‘작은 거인’. 배우 기주봉의 첫인상이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불렸던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기주봉이 나오는 영화와 아닌 영화’로 나뉘었던 충무로가 세계를 접수한 이때, 그는 2023 서울국제노인영화제의 홍보대사로 조용히 대한극장을 찾았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산업을 이끌고 세계적인 팬데믹을 겪으며 몸짓 줄이기에 나선 작금의 시대에 다시금 충무로의 심장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때마침 올해로 15회를 맞이한 서울국제노인영화제의 주제 역시 ‘일상의 회복,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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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50년 가까이 ‘연기’만을 해 온 배우 기주봉. 그는 “솔직히 드라마도 하고 싶었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더라. 부탁하면 되는 시기도 있었는데 고개 숙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한 일”이라면서도 슬쩍 아쉬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사진=이철준 기자)

 

극단76 창립 단원으로 연극과 영화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기주봉은 “솔직히 ‘내가 노인이라서 들어온 건가?’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제안이 왔을 때 ‘할 수 있는 건 하겠다’는 생각으로 맡게 됐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곧 일흔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현역인 그는 “정신은 여전히 청년인데 세월만 간 것”이라 눙치면서 “이 영화제의 얼굴이 된 것 자체가 감사하다. 물론 노인이라는 말보다 다른 표현도 있겠지만 영화제의 지향점과 가치는 예술적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15일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2023 서울국제노인영화제는 대한극장과 영화제 전용 온라인 플랫폼 ‘온피프엔’을 통해 장편 작품 14편, 단편 작품 57편으로 구성된 총 71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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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회에서 노인이 갖는 역할, 어른으로서의 정의를 묻는 기자에게 “솔직히 내가 현실에서 어른스럽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숙이고서라도 자본사회에 적응하라고 말하고 싶다”면서도 “언어가 아닌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도리다. 책임감을 갖는다면 좋은 어른으로 불릴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이철준 기자)

 

“10대부터 배우를 꿈꾸고 평생 연기만 하며 살아왔습니다. 뭔가 원대한 꿈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내 길’이었던거죠. 나이 들어서 의무감이나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조차도 못했어요. 아쉬운 소리 못하는 성격이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임감 없는 가장으로 산 건 지금도 후회스럽지만요.”

연극 ‘관객모독’을 시작으로 그가 출연한 114편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은 조연이지만 주연으로서의 활약은 영화제에서 터졌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강변 호텔’과 독립영화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로 들꽃영화상 남우주연상을 품에 안은 것. 작고 단단한 외모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탓에 조직의 보스 혹은 검은 세계의 일원으로 소비된 연기 초반을 제외하고는 기주봉이 보여주는 연기의 결은 꽤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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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직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우 기주봉.(사진=이철준 기자)

 

영화 ‘69세’에서 맡은 서점주인이자 동거남의 꿋꿋한 모습은 극 중 치욕스런 일을 당한 효정(예수정)이 끝까지 자신을 지키게 만드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최근 ‘대무가’에서 보여준 평범한 모텔주인 역시 예사롭지 않다. 어딘가 실제로 존재할 법한 무시무시한 개인감옥을 천연덕스럽게 관리하는 이웃 아저씨의 모습으로 기괴함을 더한다. 영화 ‘공작’에서 보여준 김정일 연기는 분량은 짧았지만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후배들의 존경심이 대단하다.

상대배우였던 황정민은 “분장도 한몫 했지만 선배를 보자마자 실제 김정일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로 위축됐다. 밧줄에 묶인 느낌이었다. (이)성민이 형이랑 나눈 말이 ‘힘은 들지만 연기가 절로 된다’고 했을 정도”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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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 대해 기주봉은 “평소 좋아하는 찰리 채플린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 끌렸다. 내 영화적 취향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정의했다. (사진제공=인디스토리)

 

“사실 굉장히 까불까불한 성격인데 진중한 캐릭터만 맡게 된 계기가 있어요. 형(기국서 연출가)과 함께 극단을 만든 게 1970년대 중후반인데 나이는 어린데 할 일은 많고 정말 힘들었거든요. 단원들 뽑고 중간에서 이야기 전달하고 후배들 가르치는 것 등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른데 형이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그러더라고요. ‘너나 잘 해’라고. 가족이 그러니까 더 큰 비수가 되어 꽂혔죠. 그 이후 모든 게 진지해졌고 그게 연기로도 이어지더군요.”

형제라는 프레임에서 기국서와 기주봉은 늘 함께였지만 정작 일적으로는 ‘놀지는 못하는 사이’가 됐다. 중학교 때부터 남들 앞에 나서고 무대에 서는 게 좋았던 그가 국문학과에 다니던 형에게 해석을 부탁한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한편이 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후 책벌레인 형은 연극에 빠져 연출가로, 기주봉은 연기를 하며 ‘같지만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아버지가 연극을 하셨는데 일찍 돌아가셨어요. 당시 혜화동에 살았는데 거기서 목장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집 뒤에 산이 있어서 학교 갔다오면 산양을 몰고 풀 먹이고 젖을 짜는 생활을 했어요. 한마디로 목동이었던거죠.(웃음) 그때 바위에 누워있거나 자연과 시간을 보내며 사색을 했던게 큰 힘이 됩니다. 연기할 때 에너지의 원천은 늘 자연에서 얻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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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말 먼 곳’의 한 장면. 실제 딸인 배우 기도영이 캐스팅돼 부녀 케미를 뽐낸다.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이어진 예술가 기질은 딸이 물려받았다. 아들도 군 입대 전까지는 무대에 올랐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그는 “내가 평생 연기를 해왔기에 그 길을 엄청나게 반대하거나 별다른 지원사격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볼 따름”이라면서 “단지 뭘 하든 그 분야의 일만 하지 말고 전혀 다른 판에 나가 경험하는 걸 아버지로서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자본주의사회에 충실한 가장의 역할은 실패했기에 내린 결론이다.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방송국 PD를 하는 친구들에게 출연 부탁을 하지도 못했고 자존심이 강해 주변에 힘들다는 말을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기주봉은 “그저 내 자신만 지키며 살았다.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많이 미안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삶이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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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우리의 하루' 스틸컷.

그는 곧 홍상수 감독과 단 둘이 영화 ‘우리의 하루’를 들고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른다. 제76회 칸국제영화제 칸 감독주간의 폐막작으로 초청된 이 작품은 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후 올 하반기 국내 개봉 예정이다.

“이상하게 어제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TV를 켜니 때마침 홍 감독님의 ‘하하하’가 재방송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이제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어요. 이번에 (칸 행 비행기에서) 긴 시간 함께 앉아가니 조언 좀 얻어야겠어요.(웃음)”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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