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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에 취하다] 만우절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난 '영원한 청춘의 우상' 장국영

[아날로그에 취하다] 장국영

입력 2015-04-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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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를 잊을 수 있을까. 매년 만우절에 생각나는 이 남자. 전세계를 놀라게 하며 '발 없는 새'처럼 정착하지 못한 채 끝내 팬들 곁을 떠난 장국영(張國榮 장궈룽)을 말이다. 

 

장국영은 지난 2003년 4월 1일, 홍콩 센트럴 호텔에서 투신, 마흔 여섯 자신의 삶에 안녕을 고했다. "장국영이 죽었다고? 오늘 만우절이야!"라며 속지 않겠다고 한껏 큰소리를 쳤던 기억도 어느 덧 12년이란 시간 속에 퇴색돼 가고 있다. 

 

하지만 '천녀유혼' 속 해사했던 영채신의 미소와 '아비정전' 속 고독했던 아비의 뒷 모습은 여전히 팬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씨네21' 주성철 기자가 자신의 저서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에서 언급했듯 레슬리 청이란 이름으로 시작해 장국영을 거쳐 외국어표기법 장궈룽으로 불렸던 남자. 

 

그는 액션스타도, 느와르의 달인도 아니다. 그러나 '장국영의 시대'에 함께 호흡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영원한 청춘의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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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소년

 

장국영은 1956년 9월 12일, 홍콩의 대가정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양복점을 운영해 집안 살림은 제법 윤택했고 장국영 역시 가풍을 따라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부모의 금슬은 좋지 못했고 수많은 형제들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나 어린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부와 함께 지냈다. 바람둥이 같아 보이는 그의 매끈한 외모 뒤 드리워진 허무와 우울의 그림자는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국영은 생전 인터뷰에서도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항상 외로웠고 조금은 이상한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졸업하지 못한 채 귀국한 장국영은 1977년 홍콩 ATV 아시아 뮤직 콘테스트에서 2위로 입상하며 본격적인 연예인의 길을 걷게 된다.

초창기에는 배우가 아닌 가수였다. 1977년 첫 번째 앨범 ‘데이드리밍’을 발표했고 1979년에는 첫 광둥어 앨범 ‘정인전’을 발표한다. 

 

지금은 가수의 연기 겸업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엔터테이너’란 수식어는 일부 인기 홍콩스타들만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당년정’, ‘유수공명’ 등은 지금도 널리 불리는 장국영의 히트곡들이다.

1986년 아시아를 강타한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 출연은 가수 장국영이 아닌 배우 장국영으로 거듭난 계기였다. 홍콩느와르의 정석처럼 비쳐졌던 저우룬파(주윤발)의 버버리코트와 이쑤시개를 문 모습에 가리긴 했지만 송자걸 역은 장국영을 연기파 배우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이듬해 왕쭈셴(왕조현)과 출연한 ‘천녀유혼’은 장국영을 아시아 스타로 거듭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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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장국영은 1990년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당시 장국영의 은퇴배경에는 동경가요제 참석 당시 천안문 사태 지지설, 홍콩 중국반환에 대한 대비책, 라이벌 알란 탐과의 과도한 경쟁에 지쳤다는 의견 등이 분분했다.

은퇴작은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다. ‘발 없는 새’ 마냥 정착할 수 없는 1960년대 홍콩 청년 아비의 허무한 정서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장국영의 모습에 투영돼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국내 개봉 당시에는 ‘영웅본색’이나 ‘천녀유혼’을 기대했던 관객들이 ‘아비정전’에 공감하지 못해 기물을 파손하기도 하는 등 왕가위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린다.

조용한 캐나다 생활이 지겨워졌는지, 아니면 그의 재능을 아껴 캐나다까지 날아간 감독들의 설득에 감복했는지 장국영은 은퇴 1년만에 ‘가수활동을 배제한’ 배우로 조건부 복귀했다.

1993년작 첸카이거 감독의 경극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은 군벌시대부터 문화혁명까지 이르는 중국의 격동기, 한 경극예술가의 동성애적 사랑과 비극연기를 통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리 샤오룽(이소룡)같은 쿵푸스타도 아니고 저우룬파 같은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었지만 장국영은 이 시기 영화들을 통해 상처받은 자의 고독한 내면을 연기해내는 자신만의 세계를 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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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가위

 

왕가위 감독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으로 국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던 장국영이지만 1980년대에는 저우룬파(주윤발)에 밀린 2인자였고 홍콩의 흔한 잘생긴 배우 겸 가수였다. 그런 그가 연기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된 건 1990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 출연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아비정전’부터 ‘해피투게더’까지 이르는 왕가위 감독과의 작업은 매번 갈등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왕가위 감독은 장국영 사후 “장국영은 종종 전설이 되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그가 전설이 될지는 몰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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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

장국영은 1996년 ‘패왕별희’ 콘서트에서 자신의 연인 ‘당당’의 존재를 소개하며 동성애 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유서에도 등장하는 연인 당당은 그와 17년 이상을 동거해온 은행원 출신의 당학덕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당당’에게 물려준다는 장국영의 유서내용이 공개되면서 두 사람의 애정관계와 자살원인을 놓고 무성한 추측과 루머가 나돌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연예인의 가십을 주로 다뤘던 홍콩 스포츠지들은 장국영의 양성애에 대해 집중조명했다. 

 

일부 팬들은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과거 장국영의 인터뷰를 언급하며 장국영이 커밍아웃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장국영은 1997년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도 동성애 연기를 서슴지 않았다.

물론 장국영의 일부 팬들은 그의 사후에도 동성애를 부인하기도 했다. 2003년 장국영의 갑작스런 죽음 역시 수많은 의혹과 루머를 남겼다.

우울증, 타살설 등이 제기됐고 심지어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분명한 건 우리가 사랑했던,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의 눈망울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조은별 기자 mulga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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