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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아는 만큼 보인다③] '구르미' 박보검 만나러 창덕궁 후원에 가볼까

정조·효명세자 등 왕가가 사랑한 조선 최대 후원
자연에 둘러쌓인 군자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곳

입력 2016-09-1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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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사진=김성욱 기자)

“이영이다, 내 이름.”

이 한마디로 안방극장 앞으로 소녀팬들을 끌어들인 이가 있다.

최근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효명세자로 열연을 펼치고 있는 박보검이다.

배우도 매력적이지만 천재성을 타고나 21세에 요절한 효명세자라는 그 역사적 인물 자체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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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효명세자로 열연을 펼치고 있는 배우 박보검.(구르미 그린 달빛 방송영상 캡처)

이 매력적인 세자의 내면과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창덕궁 후원이다.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들을 창덕궁 후원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후원은 단순히 드라마를 촬영한 곳이 아니라 효명세자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효명세자 외에 미남이자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 세종대왕 등 군자(유교 사회 이상향으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는 물론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임금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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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의 건물 ‘의두합’ 왼쪽부터 기오헌, 운경거 .(사진=김성욱 기자)

창덕궁 후원을 들어서서 규장각 뒤로 돌아가면 왕조의 흔적 같지 않은 건물 두 채가 나온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검소한 모습을 한 ‘기오헌’과 ‘운경거’, 합쳐서 ‘의두합’ 이라고 한다. 효명세자가 순조 27년(1827년)에 재건립해 기오헌을 자신의 독서처로 사용했으며, 여기에 딸린 건물 운경거에서는 음악과 시를 즐긴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이 거문고를 연주하며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효명세자는 거문고 연주에도 탁월했던 팔방미인이 아니었을까….

이 의두합은 왜 하필 규장각 뒤에 있을까? 규장각의 주인인 정조의 정신을 효명세자가 이어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검소한 건물의 외관도 할아버지인 정조를 닮고자 한 흔적이다. 정조는 일생을 검소하게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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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규장각과 2층의 주합루.(사진=김성욱 기자)

의두합 앞에 효명세자가 그렇게 닮고자 했던 정조의 흔적, 규장각을 살펴보자.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 핵을 담당하면서도 역대 왕들의 어제(임금이 몸소 짓거나 만든 글이나 물건)·어필(임금의 친필)과 도서 등 왕실의 문서를 보관했던 곳이다.

선대 왕의 흔적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드러나는 건물이다.

사실 창덕궁 후원의 모든 건물에는 이 같은 마음이 묻어있다. 선대 왕들의 건물을 허무는 일이 없었고, 누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건물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짓지 않았다고….

규장각 2층의 열람실 ‘주합루’는 우주와 일체된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구는 작은 우주이면서도 우주의 일부라는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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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이 가득 핀 부용지. 가운데 인공섬 위로 시짓기를 하다가 유배간 신하의 억울한 모습이 그려진다.(사진=김성욱 기자)

규장각과 주합루가 자리한 높은 언덕에서 조금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연꽃이 가득 핀 사각형의 큰 연못이 눈 앞에 펼쳐진다.

‘부용지’라고 부르는 이 연못에는 학문을 사랑하고 신하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정조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에게만 허락된 후원을 종종 신하들에 개방하고 이곳에서 음식을 대접하며 함께 놀았는데, 신하들과 시짓기를 하다가 부용지 한 가운데 인공섬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부용지 오른쪽에는 영화당이라는 건물이 하나 있다. 영화당과 그 앞의 넓은 공터인 춘당대는 과거 행사장으로 쓰였다. 이곳에서 과거를 보기도 했는데, 정조는 ‘상림십경’에서 그 광경을 열가지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로 꼽았다.

춘당대 옆으로 세워진 담장 밖에는 과거 창경궁에 딸린 넓은 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백성들이 하는 농사일을 체험했다고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백성의 일을 몰라선 안 된다고….

담장을 조금만 더 따라 걸어가면 커다란 뽕나무가 한 그루 등장한다. 이는 왕비가 여성 백성들의 일인 양잠(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는 일)을 앞장서서 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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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정에서 바라본 옥류천 근처의 풍경. 소요암과 청의정의 초가지붕, 태극정의 모습이 보인다.(사진=김성욱 기자)

녹음이 우거진 후원 길을 걸어 깊숙이 들어가면 옥류천과 3개의 정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이 나타난다. 궁궐 안팎의 정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그 풍경이 아주 훌륭해 현실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들 때 이곳을 찾아 시름을 놓는 임금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특히 옥류천을 앞에 두고 있는 소요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옥류천 한 가운데 바위인 ‘소요암’에는 임금들이 시공을 초월해 소통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인조가 남겨 놓은 ‘옥류천’이라는 글씨 아래 숙종의 오언절구 시가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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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정의 모습. 사각형의 작은 연못에 벼가 심어져 있다.(사진=김성욱 기자)

소요암 뒤로는 궁궐을 통틀어 창덕궁에 하나 남은 초가 지붕 정자, 청의정이 보인다. 이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에도 백성을 생각했던 임금의 내면을 상징한다. 이 정자의 작은 사각형 연못에서 임금이 직접 벼를 기르고, 그 벼를 베어 풍작을 기원하며 지붕을 엮었기 때문이다.

이를 생각하며 창덕궁 후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군자가 되기 위한 임금의 덕목과 고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선대 왕을 따르고 존경하며 소통하고자 했던 마음, 어떤 상황에서도 신하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모든 백성의 삶을 어깨에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야 했던 그 마음의 무게…. 창덕궁 후원이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최은지 기자 silverrat89@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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