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비바100 > Leisure(여가) > 영화연극

[비바100] 강길우가 걷는 길, 무조건 적으로 보고 싶은 이유

[人더컬처] 영화 '비밀의 언덕' 강길우, K부성애 "누구나 아빠는 처음일 것...직업적으로 접근 안해"
"배우로서의 충만함 만끽 할 때까지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다"

입력 2023-07-17 18:00 | 신문게재 2023-07-18 11면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강길우2
극 중 강길우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아내 경희의 젓갈 장사와 집안일을 돕는 명은의 아빠 성호 역할로 생애 첫 부성애 연기에 도전했다.(사진제공=(주)엣나인필름)

 

딸이 반장이 됐다. 언제부터 그런 재주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곧잘 글짓기 상장까지 타온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이 명은이를 무척 따른다”고 칭찬일색이다. 아내는 새벽부터 시장에서 젓갈장사를 하느라 바쁘기에 아빠인 내가 뭐라고 해야 한다. 나 승호(강길우)는 내 아이들이 기죽는 것 만큼은 견딜 수 없다. 친구들이 모두 전문직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처가신구들이 속을 썩여도 나는 춤 출 줄 아는 대인배니까. 

 

지난 12일 국내 개봉한 ‘비밀의 언덕’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문승아)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강길우6
영화 ‘비밀의 언덕’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 아역 배우 문승아와 함께한 현장에서의 모습. (사진제공=(주)엣나인필름)

 

영화 ‘비밀의 언덕’은 신예 이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케이플러스(Kplus) 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한 화제작이다. 강길우가 연기하는 아빠는 이 감독이 캐릭터 이름인 ‘성호’를 시나리오에 따로 명시할 만큼 ‘평범한 가장이지만 그렇다고 묻히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로 빛나길 바랐다. 10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니 무턱대고 튀지도, 그렇다고 조연으로 머물지도 않는 그런 연기톤을 발휘해야 했던 것.

 

“극 중 짧게나마 변호사인 친구를 만나서 명함 대신 ‘난 줄게 이것밖에 없다. 영수증’이라며 ‘가게에 오면 잘해준다’고 능청스럽게 말하잖아요. 그 표정을 보면 정말 해맑아요. 저는 가장의 무게를 진 성호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인간관계에 대해 계산을 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봤어요. 배우가 된 후 첫 아버지 역할이라 그런지 실제 제 경험을 반추하기도 했고요.”

 

강길우5
영화 ‘비밀의 언덕’의 강길우가 브릿지 경제와의 인터뷰 시작 전 사진촬영에 임하고 있다. (사진제공=(주)엣나인필름)

 

집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늘 미술만 하는 아들이었다. 엄했던 아버지는 감정표현을 많이 하지 않고 잘못을 하면 회초리를 드는 게 당연한 전형적인 K부성애의 표본이었다. 영화 속에서 차키와 집 열쇠를 비롯해 가게의 각종 열쇠까지 바지 허리춤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콘셉트도 실제 그의 아버지 일상에서 따왔다. 

 

그는 “사실 무섭기도 하고 한땐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내 나이가 그때 아버지의 나이더라. 이 영화가 연기를 하며 맡은 첫 아빠 연기였는데 ‘아버지도 부모 경험이 처음이었을텐데’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극 중 성호는 게으르고 본 것만 많아서 늘 아내의 타박을 받는다. 가게에서는 늘 잠만 잔다. 하지만 딸이 반장이 된 후 아이들에게 돌릴 간식으로 바나나를 정할 정도로 철이 없다. 사실 명은이는 회장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햄버거를 원했지만 성호 스스로는 적은 가격으로 생색낼 수 있는 과일을 선택한 자신이 뿌듯하다.

 

 그리고 영화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자식들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하는 것도 눈치챈다. 이는 회사원 아빠에 가정주부인 엄마가 행복한 가정의 표본이었던 1996년도가 배경인 ‘비밀의 언덕’이 가진 잔혹함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동심의 계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강길우4
중앙대 10학번이라는 그는 앞 뒤로 쟁쟁한 동문들을 뒀다. 강하늘, 류경수 등이 함께 학교를 다닌 선후배들이라고. (사진제공=(주)엣나인필름)

  

“감독님께서는 성호가 가게에서도 자는 ‘척’을 하는거지 사실은 모든 걸 다 보고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당시 아버지들이 그렇듯 무조건적인 칭찬보다도 ‘최우수상을  탔어야지’라는 말도 나름의 애정표현일 거라는 말에도 동의하고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없지는 않은데 그냥 속이 없는 남자랄까. 서툴지만 귀여운 부성, 누구에게나 아빠는 처음이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어요?”

 

강길우는 오랜 시간 꿈꾸던 화가의 길을 접고 연기자로 전향한 케이스다. 군대를 다녀온 20대 초반 무작정 홍대 앞 원룸을 얻어 수능준비를 했다. 문제는 늘 예체능만 준비했던 경험에서 발생했다. 수학을 보지 않은 채 시험장을 나왔기 때문이다. 연극영화과는 미대와 달리 수학점수가 필수였다. 그해 그가 입학할 수 있는 데는 중앙대 무대미술학과가 유일했다. 

 

그는 “오직 연기만을 위해 갈고 닦은 친구들이 많아서 주눅이 많이 들었다”면서 “대신 신문방송학과에 유서깊은 연극학회가 있어서 그곳에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자신의 전공과 더불어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친구들까지 4년 내내 그가 맡은 캐릭터는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운 좋게 주인공을 맡을 때면 조명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객석에서 눈빛으로 받는 에너지가 강길우를 숨쉬게 했다

 

이후 박근영 감독의 데뷔작 ‘한강에게’로 눈도장을 찍은 뒤 ‘파도를 걷는 소년’ ‘더스트 맨’ ‘정말 먼 곳’ 등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존재로 우뚝 섰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몸값’에서 원작에 없던 알콜중독자 민씨의 섬뜩함, JTBC드라마를 기사회생시킨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역술인 비서 캐릭터를 맡으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강길우3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 놈팡이 같고 잠만 자지만 생각이 많은 캐릭터다. 과거의 우리들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아닐까”라며 처음으로 맡은 아버지 캐릭터에 애정을 보였다. (사진제공=(주)엣나인필름)

 

“감히 밝히자면 ‘비밀의 언덕’은 제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불호’가 적은 작품이라 자부합니다. 별점으로 치자면 3개 이상 정도? 연기를 할 때마다 제 경험이 최고의 스승임을 느껴요. 보고 들은 걸 기초로 캐릭터를 구상합니다. 솔직히 모든 관심사가 배우의 삶에 집중돼 있어서 충만함을 느끼기 전까진 지금같이 열심히 달려볼 생각입니다.”

 

최근 몇 년간 연예인들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그림공부’는 강길우에게 당분간 거리를 둘 존재다. 연기를 하며 그림을 그리고 휴식을 하거나 소질을 발견해 전시회를 여는 아트테이너들이 넘쳐나는 때에 그는 “겸손한 게 아니라 연기로서의 성취감이 아직 멀었다. 그게 채워지면 모르겠지만…”이라며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었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