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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사라진 말의 품격

입력 2022-09-28 14:05 | 신문게재 2022-09-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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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길청 국제투자전략가/국제투자리서치포럼 회장

원래 말에는 우리가 지켜오고 바라는 세상이 담겨 있다. 금융현장에서는 그런 말들이 오래 전부터 이어 내려온다. ‘신탁(trust)’에는 사람들 간의 공동의 신뢰가, ‘신용(credit)’에는 서로 간의 인격적인 믿음이 담겨 있다. 거래를 뜻하는 trade는 ‘성전(tradition)에서 하는 교환’이란 뜻의 다중의 신성한 믿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신용제도는 돈 장수가 대출을 부풀리고 소비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고객 돈을 맡아 더 불려주는 것이 신탁의 목적이기보다, 손님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내심의 목적이 크다. 그래서 갈수록 선택과 가입이 쉽도록 지수선물이나 테마펀드나 ETF나 집합상품들을 만든다. 초면에 대 놓고 돈을 빌려가라는 비대면 금융회사도 허가 받아 사업하고 있다.

‘변동성’은 원래 ‘위험’이란 단어다. 그런데 요즘은 전문가들이 단기투기의 초과수익 공간으로 고객에게 설명한다. 혼자 살려는 술책이다. 무언가를 매일 사고파는 트레이딩 기술(?)을 평생 연구하며 어둠 속 같은 삶을 사는 매매중독자들도 있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카드든, 달리는 말이든 매일 짜릿한 승부에 자신을 습관처럼 내던지려 한다. 진지하고 건전한 삶의 결은 안 보인다.

돈을 컴퓨터 게임이나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빗나간 정보과학기술 현장도 우려스럽다. 돈이란 현실(currency)의 실물로 교환되어 사용되지 않으면 하등의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라마다 법정화폐만이 엄격히 규정되고 발행된다. 그래서 금리가 필요하고, 통화량이 정해지고 환율이 사용된다. ‘결제’도 행위이지 본원가치가 아니다. 결제시스템에만 의존해 온 사람들은 저축이나 주식을 모을 수 없다. 돈은 벌어 모으는 자를, 빌려서 쓰는 자가 평생 넘을 수가 없다.

미국 프로그래머들이 유독 너른 토지를 많이 산 사실을 아는가. 애리조나에만 3000만 평을 가진 빌 게이츠도,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도 모두 땅 부자다. 지식소프트웨어 회사에 유상증자로 돈을 모아주면 사옥을 산다. 유명 코스닥 벤쳐기술회사도 창업자 전문성과 기술력을 보고 투자했더니 강남에 큰 사옥을 사고는 3년도 안돼 파산했다. 작금의 살인적인 물가와 다락 같은 고금리·고환율은 돈 앞에서 빗나간 행태의 역사 속 고지서들이다. ‘징벌적 인플레이션’이다. 미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을 원망할 수 없는 이유다.

정치인들의 가벼운 말 습관들이 문제 되고 있다. 사회관계망(SNS)을 탓 할 건 아니지만, 누군가와 수시로 가벼운 소통을 하는 세상이 된 뒤로 말의 ‘품격’이 없어졌다. 대통령도 그 구설에 올라 있다. 정치인이 출사하려면 ‘신언서판’이라 했고, 사업가는 ‘한 마디 말로 천량 빚도 갚는다’고 했다. 지금 저 무책임하고 추레한 정치인들의 말솜씨들을 보라. 나쁜 기업의 사악하고 거짓된 상술언어를 보라. 국민과 소비자가 두 눈 부릅뜨고 회초리 들어야 할 일이다. 언론의 ‘본’이 필요한 때다.

9월 말에 들어서니 이제 밖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들인가. 그동안 각자가 겪은 마음의 그림자를 누가 알겠는가. 누구라도 반갑게 맞아주고 밝게 인사해주고 보듬어 위로해 주자. 모두 다시 털고 일어서야 한다. 부디 몇 마디라도 믿을 수 있는 말, 격려의 언어, 좋은 뜻과 선한 표정으로 이웃과 다시 진하게 껴안고 만나보자.

 

엄길청 국제투자전략가/국제투자리서치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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