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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세습과 자유

입력 2023-02-08 14:06 | 신문게재 2023-02-0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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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익 경영 컨설턴트

윤석열대통령이 당선 전후 ‘자유’를 여러번 외쳤다. 여러 가지 논평이 뒤따랐지만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원래 자유라는 단어만큼 상처투성이인 경우도 드물다.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 이것이 자유의 법칙이다.” 칸트의 말이다.

“자연의 꿩은 십보를 가서 겨우 한번 모이를 쫀다. 또 백보를 가야 한 번 물을 마시는 부족한 생활을 한다. 그래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새장 속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 장자의 은유다.

“자유는 책임을 의미한다. 이게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버나드 쇼의 쓴소리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가지 기본적 자유 위에 세워진 세계를 이루려 했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에서의 자유, 전쟁과 같은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그만큼 자유를 얻는 게 힘들다.

원시시대에는 무당 같은 부족장이 다수의 자유를 유린했다. 별과 달의 운행을 점치면서 주술로 병을 고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랬다. 국가 형태가 되자 황제와 공신들이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칼과 창을 갖고 있다는 위세였다. 원래 세종대왕처럼 지혜롭고 성실한 왕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확률상 낮은 탓이다.

중세에는 신의 사제들이 인간을 구속했다. ‘살아서는 자유와 평화, 죽어서는 영생’을 약속하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십자군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그들과 적(?)들을 죽음으로 내 몬 학살극이었다. 죽은 후 천국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재산을 헌납(?)해야 했다. 뿌리가 같으면서도 기독교도들은 유태인을 증오했다. 이로 인해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태인은 죽임을 당했다. 카톨릭 교회가 ‘유태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죄가 없다’고 선언한 것은 1965년에 이르러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6년에 다시 선언한바 있다. 또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도 인류에게 사과했다. 이슬람의 코란에는 유태교든 기독교든 모두에 대해 부정적 기록이 있다. 하루도 편치 않는 중동의 현실이다.

자본주의 발전은 자유를 한껏 고양시키는 듯 했다. 20세기 한 때 공산주의라는 역풍을 누르고 자유의 시장은 날개를 달고 21세기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러나 월가의 거품이 일시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인 쌍둥이 적자에도 미국은 이상하게 망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의 과소비를 신흥국인 중국의 과생산이 떠받쳐 주었다. 그래서 미국의 붕괴는 당연히 중국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요즘 러·우크라전쟁통에 세계 각국이 경제위기에 대처하고 있다고는 하나 전에 없던 새로운 공황이 어떻게 다스려질지 불안하기는 매일반이다. 그래서 자유와 책임의 조화를 꾀해야 한다. 그것이 그린(Green)이고 환경정화이고 지속성장이다. 교량국가이자 통상국가인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에 있다. 투명성 강화만이 살 길이다. 비자금과 CEO라는 막중한 자리의 세습이라는 불투명이 자유의 신장을 가로막고 있다. 오너의 세습을 본따 재벌기업의 노동자들도 노동세습을 하는 판이다. 가관들이다. 세습은 정보의 독점과 기회의 독점이라는 반 자유적 요소이면서 불평등이다. 한반도의 북쪽도 마찬가지다. 하루속히 개혁이 이루어지고 환해져야 한다. 한반도 생존조건이기 때문이다.

 

이해익 경영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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