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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고통과 망각이라는 명약

입력 2023-02-09 14:22 | 신문게재 2023-02-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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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
김시래 동서대학교 객원교수, 부시기획 부사장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액운이 찾아든 날은 마지막 날이었다. 오사카에서 나고야로 가는 신간센은 2시9분행이였고 거기서 인천가는 비행기는 5시25분발이였다. 공항까지 70분 남짓 걸리니 넉넉잡아 3시 30분경에 도착한다면 출발까지 두어시간 남아 충분했다. 아뿔싸 ! 나고야로 데려다 줄 신간센이 문제를 일으켰다. 정전으로 연착한 것이다. 6만원짜리 기차가 연착이라니. 딸은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한시간 반이 늦어져 3시 35분에 출발했다. 항공사에 물어보니 출발 한시간 전인 4시25분까지 입국수속을 끝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다. 5시경 도착할테니 그건 불가능했다. 알아보니 당일 인천가는 다른 비행기는 모두 끊겨있었다. 몰려든 구정인파가 돌아가는 날이었다.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가면 130만원이 날라간다고 했다. 숙박비와 밥값도 추가될 것이다. 장모님댁에 맡긴 강아지도 아른거렸다. 입술이 타들었다. 남은 희망은 비행기의 연착이었다.


공항열차는 4시48분에 터미널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입국심사마감시간이 지나 있었다. 저멀리 비행기가 뜨는 T2 스테이션이 보였다. 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짐 두개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아내와 딸, 딸의 남자친구는 뒤에서 쫒아왔다. (나중에 딸은 내 뒷모습이 적토마같았는데 엄마도 버리고 혼자라도 타고 갈 사람 같았다고 했다.) 10분 가량 헐떡거리며 달려가니 발권을 돕는 제주항공 직원 두분이 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릴레이주자가 바통을 넘겨주듯 카운터로 여권을 내밀며 탑승을 애원했다.얼굴과 목덜미로 흐르는 땀이 한몫을 했다. 통과가 허락됐다.5시5분이였다. 비행기표를 들고 캐리어를 끌고 검색대를 통과하고 입국심사를 마치고 비행기로 들어가니 5시10분이였다.승무원이 다가와서 물과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그제서야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비행기는 5시31분에 네개의 바퀴를 들어올렸다.

광고대행사에서 오래 일하다 연말 퇴임한 후배가 더 늙지않아 이런 일을 겪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두루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아주 작고 편협했다고 고백했다. 두어달의 시간을 감안하면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상심의 시간도 처마끝 빗소리처럼 잦아들어 그의 기억속 한켠으로 물러나리라. 못되먹은 인간의 본성은 늘 쾌락을 갈구하고 언제나 기억되길 꿈꾼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도, 죽음의 공포도 그래서 달고 산다.(강아지가 그런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인생의 명약은 쾌락이나 기억이 아니다. 고통과 망각이다. 고통은 쾌락보다 오래 남아서 배울 점이 많고 망각은 기억보다 차분해서 의지할만한 친구다. 고통은 입에 쓴 약이고 망각은 고통을 가라앉히는 진통제다. 고통과 망각이 있어 삶의 유한성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러고보면 이번 해프닝도 스릴만점의 탈출기였다. 또 혹시 아는가? 하루 더 묵었다면 나고야 뒷골목의 한 주점에서 그렇게 좋아했던 서던 올스타스(Sourdern Allstars)를 만나 엘리(Itoshi No Ellie)의 한구절이라도 청해 들었을지.

 

김시래 동서대학교 객원교수, 부시기획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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