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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배추도사, 무도사가 그렇게 재미있다니… 김장할 팔자였나?

[이희승 기자의 사적라이프] 우리집 김장 비결
"절임 배추 사자"는 며느리 말에 직접 농사 짓기 시작한 시부모님
툴툴 거렸던 세대합가 초반, 이제는 베테랑 '수확' 전문 담당

입력 2023-11-16 18:00 | 신문게재 2023-11-1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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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게티이미지)

워킹맘의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아이를 키워주시는 시부모님에게 듣는 가장 무서운 말을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내일 많이 바쁘냐?”인데 지난 주말이 그랬다. 최근 급격히 떨어진 기온이 원인이었다. 평소에는 빠르면 11월 말 늦게는 12월 초에 했던 연례행사 ‘김장’을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금요일에 쉬는 게 회사의 방침이지만 문화부 출입기자에서 주말의 행복을 뜻하는 TGIF( thank God it’s Friday, 고마워라 금요일이다)는 그림의 떡이다. 되려 이날 노른자 행사가 몰려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사실상 주 6일 일하는 나를 배려(?)한 시부모님은 “담는 건 우리가 할테니 배추 뽑으러 오라”고 하신다.

배추도사무도사 대상 김치 팝업
7080 세대들의 동심을 책임졌던 추억의 만화 배추도사와 무도사.우리나라의 전래동화 이야기를 소개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제공=KBS)

 

결혼 하기 전에 김장은 그저 ‘맛있는 수육 먹는 날’이었다. 4남매의 엄마였던 친정은 약 15년 전부터 동네 아주머니들과 절임배추를 공동구매로 해결하셨다. 아침 출근길에 깨끗하게 씻겨진 배추의 포장을 벗기는 모습을 보고 퇴근하면 맛있는 김치속과 노란 배추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평균 50 포기의 김장을 담그던 엄마의 김장을 도와 드린 건 10대 시절의 짧은 기억이 전부다. 마당에서 배추에 소금을 뿌리고 남은 푸른 배춧잎을 김장 김치에 덮는다고 가져오라고 한 단편적인 추억이다. 힘든 기억은 전무했다. 

세 딸이 모두 출가한 이후에는 은퇴한 아빠가 무채를 썰었고 아직 장가가지 않은 남동생이 속을 버무렸다며 찍은 사진이 가족 단톡방에 올라왔다. 출가한 딸이 하는 거라곤 당일 수육을 먹으러 가거나(용돈 필수) 아니면 가장 작은 통에 담긴 한 포기의 생김치를 받는 것 뿐이었다. 전업주부인 둘째 언니를 제외하고선 모두 시댁에서 보내준 김치로 겨울을 보냈기에 굳이 친정에서 ‘또 김치’를 받을 일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막 담근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경남 마산 출신인 아빠의 입맛에 맞춘 친정의 김치는 굴이 필수고 무엇보다 간이 세다. 묵힐수록 감칠맛은 늘지만 막 담근 때의 비릿함은 지금까지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게 김장과의 악연(?)은 긴 고민 끝에 시부모께 아이양육을 부탁드리며 세대합가를 하고 나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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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키우는 노동도 만만치 않다. 속이 곽 차야 김장용으로 합격인데 덥거나 비가 많이 오면 속이 여물지 않는다.(사진=본인제공)

 

가장 놀란 건 규모보다 노동의 강도였다. 마트에서 파는 김장용 무와 배추도 많은데 굳이 강원도 고냉지 배추를 공수해와 전날부터 절이는 게 시어머님의 방식이었다. 다행히 그때는 햇고추가루와 무, 깐마늘은 어머님의 친정에서 시세보다 싸게 구입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최근 몇년 간 우리집 김치의 모든 재료는 직접 농사지은 결과물이다. “절임배추도 깨끗하게 씻겨 나오고 가격도 많이 안 비싸다”고 했던 내 읍소를 몇년째 듣던 시부모님은 아예 집 근처에 농작할 땅을 얻으셨다. 처음엔 주말 농장 수준이었지만 재미를 느끼곤 점점 평수를 늘려가셨다.


평생 전기회사를 다니시던 경기도 출신의 시아버지, 인삼 농사를 짓는 충청도 방아간집 딸이었던 시어머니의 공통점은 딱 하나. 어린시절부터 당연하게 돕던 농사일에 질려 도시생활을 하셨다는 거였다. 장남에게만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의 뜻이 마음에 안 들어 일찌감치 독립한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에겐 멋진 도시남자였다. 집안의 선 자리는 아무리 부자고 잘생겨도 모두 농사관련 일을 하는것 뿐이어서 싫었다고 했다.

그렇게 만나 가정을 이룬 두 분이 지금은 농사에 빠져 계시다. “내가 먹을 걸 직접 키우는 재미가 이렇게나 큰지 몰랐다”며 어린 손녀보다 더 열심히 유튜브를 보신다. 대부분 배추 속 꽉 채우는 비결, 농약 안 치고 파 키우는 법 등 도시농부의 삶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주말에는 밭에서 거의 상주하시며 ‘잠’만 자러 오는 수준이다. 평일엔 며느리가 그런 삶을 사는데 주말엔 시부모님이 바통을 이어가시니 웃픈 현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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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에게 김치 냉장고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다. 차곡차곡 채워진 올해의 김장. (사진=본인제공)

 

계절마다 키우는 작물이 다양해질수록 내 육아담당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었지만 무농약 상태로 거칠게 식탁에 오르는 푸릇한 채소 그리고 방울토마토와 감자, 토란국 등을 먹으면 서운함도 사라졌다. 김장의 하이라이트인 고추와 마늘은 벼농사를 짓지않는 우리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젊은 주부들이 말린 과일티, 각종 저장용으로 산다는 음식건조기 리큅이 말린 고추의 색을 최적으로 낸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자연광에 말리는 건 아파트에 사는 사람으로선 사치다. CCTV가 있어도 양이 줄거나 가끔 민원도 들어오는 삭막한 세상이다. 

문제는 김장에 들어갈 고추를 말리는 기계가 거의 24시간 일주일 넘게 돌아간단 사실이다. 늘 검소하고 아끼는 게 당연한 시어머님이 욕심을 내는 부분이라 전기세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마늘은 또 어찌나 손이 매운지. 공중도덕을 어기거나 신호위반 말고 중범죄자일수록 하루에 마늘을 만개씩 까게 한다면 죄를 뉘우칠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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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직접 김장을 만든 추억이 평생 잊혀지질 않기를. 유치원에서 만들어온 김치도 의외로 꿀맛이었다. (사진=본인제공)

결론적으로 올해도 김장은 시작됐다. 올해도 수확 담당이다. 밭에서 실한 배추의 뿌리를 자르고 4등분 해 넘기면 다음은 무 밭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 옆 고랑의 갓은 두 종류인데 양념으로 들어가는 붉은 색 갓과 라면에 얹어먹으면 최고인 김치용으로 만들 청갓을 잘 구분해야 한다.

 

직접 소금을 뿌린 친정과 달리 어머님은 항상 소금물에 배추를 담궈놓는 방식을 쓰신다. 뻣뻣했던 배추가 한숨 죽으면 다시 뒤집어 건져놔야 잘 절여진다. 감히 김장의 기본은 배추가 얼마나 잘 절여졌는지라고 말할 수 있다. 크기가 작거나 잎이 다소 싱싱하지 않더라도 소금기에 절여진 배추만 완벽하면 양념은 그저 거들뿐이다.

사실 김장 후 3일은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뭔지모를 근육통에 일주일은 골골댄다. 하지만 물을 머금은 배추를 들으면 그 무게만큼이나 뭔가 숙연해지는 느낌이다. 결혼 18년차가 되니‘이걸 왜 직접 담그는거야’라고 욕했던 과거가 한심해진다. 이런 무게를 손이 시릴지언정 자식과 당신 입에 넣겠다는 일념으로 당연하게 뒤집고 버무리고 또 옮기고 무쳐낸 분들이 우리 부모님 세대들 아닌가.

 

잘 절여진 배추들이 축 늘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 나갔더니 오후부터 아버님이 보낸 카카오톡 알람이 속속 도착한다. 사진 속에는 매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거들던 막내가 오롯이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도 김장을 했다고 하더니 제법 전문가의 태가 난다. 올해도 시원한 새우젓을 위주로 천연 양념과 직접 키운 무, 갓, 마늘을 버무려 붉은 김치속이 사진에 선명하다. 

김치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유산균과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한국의 전통 식품으로 인정돼 오는 11월 22일은 한국김치협회가 선포한 김치의 날이다. 한국에선 2020년부터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김치의 날은 재료 하나(1) 하나(1)가 모여 22가지 효능을 내는 김치의 가치를 기억하기 위해 정해진 날이다. 올해는 김장문화가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10년째 되는 뜻 깊은 해기도 하다. 대한민국 법정기념일 중 특정 음식이 기념일의 주인공이 된 것은 최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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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앰버서더로 발탁된 호시는 케이크에도 김치를 올려 먹을 정도로 김치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제공=대상)

 

김장을 굳이 직접 담궈야 제 맛이냐고 묻는 다면 올해 재료 가격이 급증해 ‘김포족(김장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은 되려 환영할 일이다. 동시에 1~2인 가구가 늘고 젊은 세대가 묵은 김치보다 새 김치를 선호하는 것도 포장김치의 수요가 증가한 요인이다. 

GS샵이 지난 2019년부터 올해 9월까지 TV홈쇼핑에서 판매된 ‘종가 포기김치’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에도 김치 수요 증가 흐름이 읽힌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올해 18.1% 증가했다. 대상 종가는 국내 최초 김치 팝업 ‘김치 블라스트 서울’을 성수동에 열었다. 브랜드 엠버서더(홍보대사)로 세븐틴 호시를 발탁해 개점 30분 전부터 대기 예약만 200명이 넘어서는 등 연일 오픈런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김장의 꽃은 수육인데 올해는 맛 보지 못했다. 파김치가 돼 집에 들어간 시간은 자정 무렵이라 입에 넣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장 맛있는 건 역시 누군가 해주는 음식이라지만 김치 만큼은 직접 담아 먹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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