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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메르켈 리더십> 케이티 마튼

입력 2021-10-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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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 쯤 장장 16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그녀는 통일독일 최초·최연소 장관을 거쳐 격변기의 독일 유럽의 맹주로 키워낸 정치인이다. 그의 특장점은 ‘합의’에 이르는 힘이라고 한다. 어떤 상대든 좀처럼 싸우려 들지 않고, 참을성 있게 얘기를 듣고 이해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 바닥에는 사려 깊음과 보편적 인간애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끊임없이 진심으로 유대인들에게 잘못을 사과한 독일 총리. 그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전범’ 독일을 송두리째 바꾸고 전후 정치에 새 지평을 열었다.

 

 

* ‘프라이버시’를 끔찍히 중시한 총리 - 메르켈은 무신론을 신봉하던 동독에서 목사의 딸로 성장했다. 당시 동독은 국민 6명 당 1명 꼴로 정보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됐다. 주변의 팀도 그렇게 운용했다. 2016년 베를린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이래로 메르켈 팀이 전혀 바뀌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무리 가까운 동료라도 그의 사생활과 관련한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외부에 공개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에게 헌신적인 참모들 조차도 베를린의 사저라든가 브란덴부르크에 있는 안식처가 됐든 그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가족들도 메르켈의 사생활을 존중해 일체 외부와 인터부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했다. 특히 예술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 이중 삼중의 아웃사이더 - 푸틴과 트럼프 등 권위적인 지도자들에 맞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메르켈만큼 맹렬하게 지켜온 지도자는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이중 삼중의 아웃사이더였다. 동독 출신에 과학자이자, 여왕이 없었던 희귀한 유럽 국가의 여성이었다. 지적 능력과 고된 업무 수행만이 그의 장기 집권 비결 중 일부였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인신공격을 일삼는 기존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단조로운 연설 스타일로 장점으로 부각됐다. 상대방이 쏟아내는 날조된 주장을 무시하고 자신의 어젠다로 상대를 압박하는 힘이 있었다. 지도자가 자기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를 그는 실증해 보였다.

 

* 메르켈 정치적 장수의 비결 - 그가 정치적으로 보여준 천재성 가운데 하나는, 좋은 아이디어라면 출처를 따지지 않고 인정하는 넓은 도량이었다. 그는 에너지 아동 보육 평등 결혼 등 라이벌 정당의 프로그램을 가져다가 정책으로 삼았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영리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장수 비결은 끊임없는 호기심이었다. 그는 자신을 롤 모델로 해 부단히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인생에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해할 것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 퀴리 부인을 삶을 동경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재능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성인이 된 이후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마치 사진을 찍듯 선명한 기억력과 문제를 가장 작은 부분까지 해체하도록 훈련한 과학적 사고능력, 그리고 일을 향한 엄청난 열망이었다. 최대 수면 시간이 5시간에 불과할 정도로 건강 체질도 한 몫 했다.

 

* ‘프라하의 봄’의 아픈 추억 - 1968년 러시아군이 체코의 프라하를 침공했다. ‘인간이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체코의 진보적인 실험을 소련이 짓밟은 것이다. 이상화된 사회주의에 환상을 갖고 있던 메르켈은 “창피하고 슬펐다”고 회고한다. 앙겔라는 템플린 김나지움 졸업반을 수학과 물리학 러시아어에서 1위를 차지하며 마쳤지만 졸업을 못할 뻔 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성공을 다룬 촌극을 무대에 올리려다 공산당의 공식 노래인 인터내셔널가를 영어로 부르며 마무리한 것이 이유였다. 그는 이미 라이프치히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둔 상태였다. 가벼운 장난을 전도유망한 한 사람의 앞날을 가로막는데 서슴없이 쓰려는 잔혹성에 그는 공산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2014년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 개혁 운동을 짓밟았을 때, 그가 주변국 정상들보다 더 신속하고 강력하게 반응한 것도 여기에 뿌리를 둔다.

 

* ‘홀로코스트’ 진실에 눈 뜨다 - 1985년 메르켈은 서독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연설을 듣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40주년 기념식이었다. 그는 이날 전율했다. 서독 대통령은 독일 동포들에게 “역사에 길이 기록될 집단학살로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 600만명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외쳤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그의 직설적인 심판은 메르켈을 전율케 했다. 이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동독은 자신들을 전쟁범죄의 피해자로 간주했다. 유대인은 거의 언급한 경우가 없었다. 혹 있더라도 보통은 ‘(몸쓸) 공산주의의 친구’로 묘사했다. 메르켈은 이후 ‘독일은 유대인에게 영원토록 빚을 졌다’는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고 그의 리더십의 핵심이 되었다. 나중에 총리가 된 후 이스라엘을 자주 방문했고 나중에는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현장도 방문해 무릎을 꿇었다.

 

* “조포르트” 한 마디에 무너진 베를린장벽 - 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 대변인이 내뱉은 “조포르트(Sofort)” 한 마디에 무너졌다. TV 기자회견 중 ‘서독 여행에 아직도 허가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사무적인 말투로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재차 “그럼 언제부터 그렇게 되느냐”고 묻자 건성으로 “조포르트”라고 답했다. 이 말은 ‘즉시’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긴 단어가 되었다. 메르켈은 처음으로 서베를린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동독 출신들은 모두 갑자기 자신들이 세련되고 부유한 서독 사람들에 비해 어설프고 굼뜨고 촌스러운 가난뱅이 친척이 된 느낌을 받았다. 메르켈은 특히 새로운 자유의 시대에, 실험실에서 공동연구를 하며 보내는 것이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패잔병’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직업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 ‘동독 출신 여성’ 후광에 성공적 정치 입문 - 메르켈은 1989년 12월에 조용히 정치 입문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실험에 질려했던 그는 우경화된 정당을 찾았고 곧 동독의 신생정당 ‘민주적 각성(DA)’을 택했다. 이 당은 이후 유력 정당인 서독기독민주연합(CDU)에 통합된다. 1990년 메르켈은 과감하게 학교를 포기하고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동독 출신 여성이라는 신분 덕에 엄청난 혜택을 받게 된다. 헬무트 콜 총리가 새로 탄생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지도층에 편입시켜야 할 ‘동독 출신’, 그리고 ‘여성’이라는 두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것이다. 게다가 DA의 대변인인을 맡았을 만큼 언변도 뛰어났다. 그는 언론을 상대로 과학적인 느낌을 풍기는, 정밀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구사해 호평을 얻었다. 콜은 36세의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의 최연소 장관에 임명했다. 나중에는 키신저 미국 전 국무장관까지 유대인에 우호적인 그에게 호감을 갖고 적극 도와 글로벌 무대에서 통할 인맥을 쌓는 데 도움을 준다.

 

* 온실가스 감축을 이끌며 친구들을 얻다 - 메르켈은 여성부장관에 이어 환경부장관으로 4년 동안 일하게 된다. 이 때 온실가스 문제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게 된다. 당시 UN 기후변화회의가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대회 호스트인 그는 160개국 참가자들과 타협해 ‘베를린 위임사항’이라는 합의를 탄생시켰다. 이 합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구체적 목표와 시간표 확립을 각국 정부에 요구했다. 2년 후 이 합의는 ‘교토의정서(Kyoto Protodol)로 이어진다. 이 경험은 메르켈에게 많은 친구를 사귈 기회도 주었다. 특히 개발도상국들이 메르켈을 자신의 특별한 친구로 인식시키게 해 주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 “합의를 도출하려 애쓰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일하면서도 이처럼 강한 확신을 품고 있는 여자는 처음이다.”

 

* 정치 스승 콜을 버리고 당 대표에 -  16년을 총리로 재직했던 헬무트 콜은 1998년 연임에 실패했다. 불법 정치후원금 스캔들에 휘말려 정치적 생명도 위태롭게 됐다. 메르켈은 정치 스승인 콜에게 비수를 꽂는다. 자신의 이름을 달고 ‘헬무트 콜은 해당 행위를 했다’는 기고를 신문에 올렸다. 이 글은 콜에 이어 CDU(기독민주연합당)를 이끌게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경쟁자 ‘쇼이블레’를 물러나게 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그 역시 질퍽한 선거자금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적들이 제거되자 메르켈은 2000년 초 당 대표직에 출마했고 반대 없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로 당선됐다. 메르켈은 자기 인생에서 콜의 역할을 자주 인정했지만, 그에게 빚진 것은 정치적인 빚이지 개인적인 빚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이 된 후 제2의 기회를 준 나라에 더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 ‘자신만만하지만 겸손한 독일’을 꿈꾸다 - 독일은 의원내각제라 국회의원 선거 최다득표 정당이 연합정부를 구성한다. 총리도 막강한 자리가 아니다. 연방공화국의 권한, 특히 국내 문제에 대한 권한은 16개 주와 막강한 헌법재판소에 분산되어 있다. 총리는 국내 정치보다는 국제 사안에 훨씬 큰 재량권을 갖고 있다. 메르켈은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연합정부를 이끌게 된다. 알파메일(alpha male), 즉 계속 떠들어대게 놔두면서 상대가 자폭할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렸다. 국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전진하고,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인 지는 여론조사를 자주 활용했다. 그는 독일을 자신만만하면서도 겸손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책상에는 독일 출신으로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예카테리나 여제 초상화 액자가 놓여 있다. 그가 늘 외고 다니는 ‘침착함 속에 힘이 있다(In der Ruhe leigt die Kraft)’라는 주문이 새겨진 글라스 큐브도 놓여 있다. 

 

* 독재자 푸틴과의 악연 - 메르켈은 인종주의와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러시아와 늘 강력히 맞섰다. 푸틴은 동독에서 스파이로 활동했었다. 지멘스나 바이엘 티센 같은 주요기업에 소속된 과학자와 비즈니스맨들을 포섭하는 게 주 임무였다. 푸틴은 자신을 ‘최후의 위대한 내셔널리스트’라고 평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럽연합과 동맹국인 미국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메르켈과는 동일한 배경에서 태어났으나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푸틴의 롤 모델은 개혁주의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독재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푸틴은 늘 메르켈을 겁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반대로 메르켈은 푸틴에게 창피를 주는 법을 알았다. 푸틴에게 인권침해나 잔혹행위가 그의 감시 아래 행해지고 있다며 책임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것이었다.     

 

* 메르켈의 결혼 생활 - 메르켈은 20살부터 자기보다 한 살 많으며 같은 라이프치히 대학 물리학과에 다니던 올리히 메르켈과 사귀어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23세 되던 해에 그와 결혼한다. 부부가 되면 아파트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고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결혼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직도 메르켈이라는 첫 남편의 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첫 결혼 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두 번째 결혼은 과학자로 현재의 남편 요하임 지우어다. 그는 역사적인 첫 여성 독일 총리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실험실에서 양자화학을 연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부재를 메르켈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 마거릿 대처와 비교되다 - 평소 조용한 메르켈도 고 마거릿 대처와 비교되는 것에는 발끈하곤 했다. 힐러리는 두 사람에 대해 “메르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데 반해 대처는 이미지를 무척 많이 의식했다”고 평가했다. 대처는 모든 회의를 전투에 참가하듯이 임했지만, 메르켈은 회의는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한 자리라고 여겼다고 전한다. 둘은 공통점도 있다. 훈련받은 과학자 출신에 노력을 통해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남성들이 판을 치는 정계에서 활약했다. 특히 메르켈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조차 존경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를 아시잖아요!(You know me!)’라는 아이러니한 캠페인으로 선거에서 이겼을 정도다.

 

* 버락 오바마와의 캐미 - 메르켈은 처음에 오바마를 경계했다. 그가 대통령도 되기 전에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선거 연설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메르켈이 보기에 그는 아직 그런 특권을 요구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바마가 2010년에 건강보험개혁법안을 통과시키자 그를 인정하게 된다. 오바마도 메르켈을 본보기 삼아, 무슨 일이든 그와 상의하려 했다. 둘은 실용을 중시하지만 원칙에서 벗어난 모험도 주저하지 않았다. 전임자들 같은 ‘게임하는 방식’의 정치도 싫어했다. 자신들의 역할을 문제 해결로 보았다. 모두 지적이라 감정보다 사실을 신뢰했다. 놀라운 역경을 이겨낸 아웃사이더라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둘의 캐미는 2013년 6월 미국의 내부 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이 오바마 행정부의 메르켈 개인 핸드폰 도청 사실을 폭로하면서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감시국가에서 자랐던 메르켈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바마에게 전화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친구는 친구를 염탐하지 않아요.”   

 

* 메르켈의 최대 치적 ‘유럽연합’ - 메르켈이 총리로서 세운 목표 중 하나가 독일을 정상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역사적 업적이 유럽연합이다. 동일한 통화를 사용하는 19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국경 없는 대륙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유로는 심각한 결함을  갖고 태어났다. 유럽연방준비은행 같은 중앙은행 시스템이 없었다. 유로지역 내부에서 노동력이 이동하는 데 제한이 있었다. 유럽 국가들이 금융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는 입으로는 유럽을 사랑한다고 공언하면서도 독일에 해를 끼치면서 유럽을 구할 의향은 없어 보였다. 몇 년에 걸쳐 그리스에 여러 차례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데 동의했으면서도 그가 보여준 느릿한 반응은 가혹한 긴축정책 그것이었다. 

 

* 우크라이나 두고 푸틴과 맞서다 - 유대계가 많아 히틀러에게 대량학살의 표적이 되었던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대표 사례가 되었다. 러시아는 구제금융을 무기로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에게 EU와의 교역협상을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의 침공에 속수무책이었다. 푸틴은 크림반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곳 주민들이 러시아의 개입을 요청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메르켈은 서구를 대표해 푸틴을 상대해야 했다. 38번이나 푸틴과 참을성 있게 대화했다. 푸틴은 침략군이 자신의 군대가 아니라고 계속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메르켈에게는 집중력과 강철 같은 투지가 있었다. 이런 소프트 파워만으로도 그는 푸틴에게 고통스러운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는 휴전 협정에 푸틴의 서명을 받아냈다.  

 

* 러시아에 대한 잇단 경제 제재 -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났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은 계속됐다. 메르켈은 다음 조치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푸틴에게 경제적 처벌의 두려움을 강하게 심어주려는 의도였다. 메르켈은 재계 인사들부터 설득했다. 해마다 30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 6000곳의 독일-러시아 교역량을 4분의 1로 축소시켰다. 독일 은행들도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푸틴의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들이 신생 벤처기업 설립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훨씬 어렵게 만들었다. 이후 모든 EU 회원국이 러시아 제재 3라운드에 동의하면서 푸틴과 그 측근들은 여행을 금지당하고 은행대출은 동결되었으며 교역은 중단됐다. 이후 러시아는 7년 동안 제제를 당했다. 

 

* ‘홀로코스트 주범’에서 ‘세계적 도덕국가’로 - 유럽의 심각한 난민 위기 속에서 메르켈은 독일을 세계적인 윤리적 중심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독일을 이민자의 나라로 변신시킨 것이다. 독일에 도착한 난민 수는 2012년 7만 7000명에서 2015년에는 47만 5000명으로 급증했다. 난민들을 ‘벌떼’라고 부르고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여기며 대부분 서유럽 지도자들이 외면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헝가리와 세르비아 국경에서 무장한 경비대원들이 지친 난민들을 가축 우리 같은 컨테이너에 몰아넣는 장면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에 버려진 냉동 트럭 안에 갇혀 질식사한 난민들에 사람들도 동요했다. 2015년 8월 말에 드디어 메르켈은 “독일은 난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라며 EU 26개 회원국에도 수용 역량에 맞춰 더 많은 수의 만민들에게 망명지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메르켈은 자신의 난민정책이 홀로코스트 이후 독일의 자랑스러운 전후 헌법, 즉 기본법에 따른 것임을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 “대안이 없어…” 유례 없는 네 번째 총리 도전 - 2016년에 메르켈은 임기 중 최악의 경험을 한다. 애지중지하던 유럽연합이 좌초했고 잇단 테러가 그의 난민 정책을 위협했다. 11년을 통치하면서 생긴 ‘메르켈 피로감’도 한 몫 했다. 2005년 그에게 권력을 안겨준 ‘대연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에선 그가 극도로 혐오한 트럼프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베를린이 유럽의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다. 오바마가 동맹국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총리 출마를 다시 강권했지만 메르켈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11월 20일에 거의 유례없는 네 번째 임기의 총리직 입후보를 발표했다. 다행히 당원들 89.5%가 그를 지지했다.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이 전 세계에서 발흥하는 상황에서 자신 외에는 달리 대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2016년은 메르켈이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해가 되었다.

 

* 독일을 싫어한 트럼프과 등을 지다 -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부터 독일에 기이한 분노심을 보였다. “미국에 굴러 들어오는 모든 메르세데스-벤츠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경고하더니 “NATO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EU는 교역부분에서 미국을 박살내려고 결성되었다”고 하고, 메르켈과 푸틴 중에 누굴 더 신뢰하느냐는 질문에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는 등 메르켈의 심기를 건드렸다. 미국이 독일 방위를 위해 지불한 돈이 1조 달러에 이른다며 그 만큼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자극했다. 모욕적인 외교를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트럼프 앞에서 “더 이상 미국은 믿음직한 파트너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방카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와의 관계 개선에 힘쓰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점점 우경화되는 독일 - 2017년 선거에서 메르켈은 가까스로 총리직을 유지한다. 다시 대연정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난민에 반하는 AfD가 전체 의석의 15%를 차지하는 등 동독 유권자의 20% 가까이가 우익 민족주의 정당에 표를 줬다. 그것은 메르켈의 모든 것, 난민과 여성의 권리 향상, 평등 결혼, 나토 등에 대한 도전이자 증오였다. 그는 평소대로 참을성있는 대화를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은 동독 출신인 메르켈이 자기들을 위해 해준 것이 뭐가 있냐고 불만을 터트렸다. 성공한 동독 여성의 아바타였던 메르켈을 이제 많은 동독 남성들은 자신들이 패배자라는 사실을 날마다 상기시켜주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낙관주의자였던 그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메르켈은 자신이 정한 일정에 따라 은퇴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총리직은 유지하되 기독민주연합의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 총리 3년을 EU 강화나 기후변화 문제 대처 등에 쏟으려 했다. 하지만 극우로 치닫는 독일 현실이 그를 그대로 풀어주지 않았다.

 

* ‘강한 유럽’ 공유했지만 너무 급진적인 마크롱 - 39세의 진보적 경제학자 에마뉘엘 마크롱이 2017년 5월 프랑스 최연소 국가수반이 되었다. 두 사람은 푸틴과 중국, 트럼프에 맞설 ‘유럽합중국’이라는 원대한 꿈을 공유했다. 하지만 신중하게 전진시키려는 메르켈에 반해 마크롱은 당장 실현하고 싶어 했다. ‘자급자족 유럽’을 꿈꾼 마크롱은 나토를 대치할 유럽군 창설을 원했지만 무력에 반대하는 메르켈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나토는 뇌사 상태”라는 마크롱의 발언으로 둘 사이는 크게 벌어진다. 메르켈이 보기에 프랑스는 유럽의 단결보다 권력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나라였다. 독일을 경제대국으로는 인정하지만 동등한 정치적 반열이라고는 받아들이지도 않는 듯했다. 에펠탑 만찬과 화려한 샹젤리제 열병식으로 트럼프의 넋을 빼놓는 마크롱이 그는 영 미덥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의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은행조합’을 만들자는 마크롱의 계획에는 동의했다. 마크롱에게는 “더 강한 유럽을 만들고 싶은 당신을 이해하지만, 혼자서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유럽 대륙을 허약하게 만들 뿐이예요”라고 주지시키기도 했다.

 

* 유대인들에 대한 부채를 갚다 - 메르켈은 2019년 12월에 폴란드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를 방문했다. 나치스의 살인적인 수용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상징적인 곳이었다. 앞서 그는 부헨발트와 다하우, 작센하우젠에 있는 나치스 강제수용소를 찾았고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아드 바셈’에는 화환을 바쳤었다. 독일의 유대인 집단 처형장이었던 이곳에서 메르켈은 유대인들에 대한 오래된 중요한 역사적 부채를 갚는다. 그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잔혹한 거짓말이 새겨진 철제 정문의 건물 앞에서 이렇게 애기했다. “우리 독일인은 희생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자행한 범죄를 기억하게 하고, 가해자들의 신원을 밝히며, 피해자들을 추념해야 하는 빚을 졌습니다. 이것은 우리 정체성에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 코로나에 정면으로 맞서다 - 메르켈은 2020년 3월19일 대국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TV 앞에 섰다. 그의 첫 마디는 “Es is ernst(심각한 상황입니다)”였다. 코로나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축구경기도 보러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살피라고 간청했다. 서구 어느 나라보다 빠른 대처였다. 국민들은 그가 지난 15년 동안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를 신뢰했다. 메르켈의 지지도는 다시 80%까지 치솟았다. 며칠 후 거주지 근처 마켓에서 카트에 와인 두 병과 두루마리 화장지 몇 개를 사는 메르켈이 목격되었다. 사재기를 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배웠던, 국가적 위기에서 리더는 국민들 앞에 직접 나서 책임지고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실천한 것이다. 

 

* 유럽 코로나 지원을 이끌어내다 - 메르켈이 ‘짠돌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고수했던 긴축예산은 코로나 상황에서 제대로 성과를 냈다.  잉여 예산으로 보건 위기에 대처한 것이다. 이동 제한을 요구했을 때 가정마다 지원된 지원금과 세금 삭감, 사업체에 내준 대출금은 미국이 집행한 구제 패키지의 4배에 달했다. 대상자들은 부채를 떠안을 필요도 없었다. 기업의 조업 단축도 재빨리 확대 시행됐다. 메르켈은 코로나로 고통받는 유럽연합 회원국 지원에도 나섰다. 각고의 설득 끝에 2021년 7월 21일 그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판란드 등 이른바 ‘유럽의 짠돌이’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 등을 위해 금고를 열게 만들었다. 총 지원 규모가 8590억 달러에 달했다. 마크롱은 협상 타결 후 트윗에 ‘유럽을 위한 역사적인 날’이라고 올렸다. 이기적인 유럽 국가들이 하나로 똘똘 뭉친 것이다. 

 

* 중국과 합의를 이끌다 - 메르켈은 2020년 7월에 임기가 6개월인 유럽연합의 순번제 의장국 자리를 맡았다. 그는 그 6개월 동안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매진한다. 이미 유럽연합의 최대 교역 파트너는 미국이 아닌 중국이었다. 그 해 마지막 날 중국과 유럽연합 27개국은 역사적인 합의를 이끌어 냈다. 중국은 무역과 은행업 분야의 상당한 장애물들을 걷어내고, EU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들을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기후변화 문제의 진전, 시민사회에 대한 유레없는 책무, 강제 노동 이용 관행의 개혁, 그리고 인권 분야 다른 양보들도 약속을 받았다. 메르켈은 중국 역시 트럼프가 4년간 망쳤던 동맹관계에 미국이 전적으로 재합류하기 전에 협상을 타결하려 애쓴다는 점을 빈틈없이 계산했다. 베이징도 새로 단결한 서구가 더 힘든 적수가 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협상 타결 후 이렇게 말했다. “환상을 품어선 안됩니다. 중국은 우리의 경쟁자입니다. 그러나 이제 평평한 경기장이 펼쳐질 것입니다.” 메르켈의 중국 정책은 미국에 대한 신호이기도 했다. 유럽은 자체적인 이익을 위해 일방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 ‘노력한 지도자’로 기억되길 원하는 메르켈 - 메르켈은 “총리라는 자리는 ‘저주받은 의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16년 동안 재임하면서 스캔들 하나 없었다. 임기를 고작 몇 달 남기고도 레임덕을 몰랐다. 저자는 “이제 메르켈은 조국인 독일의 상징이자 독일을 반영한 인물이 되었다”고 총평했다. 메르켈은 늘 넘치는 호기심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대하는 열린 마음을 견지했다. 그의 난민 정책은 독일의 이미지를 바꿔 놓았다. 저자가 메르켈에게 ‘긴 정치인생 동안 다인을 지탱해준 특성 하나를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주저없이 “참을성이요”라고 답했다.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길 바라느냐는 질문에는 “‘그는 노력했다’는 평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리곤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저자는 그를 ‘스프린터’가 아니라 ‘마라토너’라고 평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떠난다는 사실을 메르켈은 자랑스러워 할 수 있게 됐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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